소설리스트

0과 1-283화 (283/293)
  • 283.

    “그 비열한 놈들이!”

    미셸이 끌려 나갔다. 그는 연합군과 협상에 성공할 때까지 탑에 갇힐 것이다.

    그가 난리를 쳐 준 덕분에 실제로 코크와 에이드의 관계가 삐걱거린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좋은 소식은 이어서 들려왔다.

    왕성의 포위가 풀리자 전령의 통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간 보내지 못한 구원 요청이 날아갔다. 막힌 둑이 터지듯 외부의 소식도 날아들고 있었다.

    “알렉스 바움쿠헨 경의 보고입니다! 끈질기게 막아서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현재 복귀 중입니다!”

    “애슬턴 백작의 지원군이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사흘 내로 합류 가능하다고 합니다!”

    동맹 세력이 합류하고 있었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알렉스도 전속력으로 병력을 돌렸다.

    가장 놀라운 일은 로웰의 귀환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오겠다더니 병력을 이끌고 왔다.

    낯선 병력이 성 앞으로 다가오자 왕성은 비상이 걸렸다. 그곳에서 사람 한 명이 튀어나와 서툰 승마 솜씨로 달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투구도 쓰지 않은 전령이 성벽 아래서 손을 흔들었다. 이 더위에 그을리지도 않은 흰 팔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로웰이었다.

    놀라서 맞으러 가자, 로웰은 활짝 웃으며 “전하” 하고 외쳤다.

    “무슨 병사들이야?”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이요.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몽블랑은 전하를 지원할 거예요.”

    “그래도 돼?”

    무슨 설득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비스코티에서 나는 거의 역적 아닌가? 비스코티 상인이 나를 돕고 싶어 할 리 없다.

    “아버지가 셔벗 시장을 먹어 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셨거든요……. 그러고도 실패해서요. 전하의 덕을 보게 된다면 춤을 추며 기뻐하실걸요. 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셸 에이드를 잡으셨다면서요.”

    로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어? 왜 여기에? 전하?”

    “로웰 몽블랑.”

    에드워드가 그를 알은척했다.

    로웰을 알고 있었어?

    나는 놀랐지만 로웰만큼 놀라지는 않은 듯했다.

    “어……. 예? 예?”

    하긴. 저번에 불러서 무슨 수작에 협조시켰다고 했지.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에드워드의 사교성이 는 듯했다.

    “왜 에드워드 전하가…… 여기 계시죠?”

    로웰은 내게 묻다가 그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에드워드에게서 나왔다.

    “조프리가 나를 필요로 하니까.”

    “…….”

    순간적으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저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지 않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난 부연 설명을 해 봤다.

    “왜 비스코티가 아니라 여기에 있냐는 거잖아.”

    “네가 나를 불렀잖아, 조프리.”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측근들이 제대로 했다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겠지.”

    그가 덧붙였다.

    “…….”

    그레이까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너 왜 싸움을 걸어?

    “전하, 저와 잠깐 말씀 좀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로웰이 웃으며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에드워드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달하자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분 뭐예요? 왜 여기 계세요? 실종은 어떻게 된 건데요?”

    “몰라.”

    “예?”

    로웰은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나도 그 점을 모르겠다.

    바빠서 단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변명이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시간은 내려면 얼마든 낼 수 있다.

    단지 내가 그럴 생각을 못 했을 뿐이다. 에드워드를 본 순간 다른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긴장감에 사로잡혀서, 단둘이 붙어 있을 시간도 피했다.

    “……꼭 제게 설명하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분, 전하의 비밀은 알고 계신 거죠? 알고 전하를 도우러 오신 거예요?”

    “응.”

    “실종되셨던 분이잖아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자마자 하신 일이 외국으로 달려오신 거라고요? 저는 이해가 잘…….”

    그러고 보니 그랬다. 에드워드는 바로 달려왔을 것이다.

    온몸의 피가 다시 빠르게 돌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시간상 비스코티 왕성을 거쳐 왔을 리가 없다. 곧장 셔벗으로 내달렸을 것이다.

    내가 잘못될까 봐?

    아니다. 셔벗 왕성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은 셔벗 내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내가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건 몰랐다.

    내게 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

    입이 말랐다.

    왕성에 소식은 넣어 둔 걸까? 살아 있다는 신호는 제때 보내야 할 거 아니야. 다들 걱정하는 것도 모른다. 애가 걱정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생각이 계속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로웰이 나를 보더니 문득 물었다.

    “전하, 그분이 전하의 비밀을 아신 게……. 왕비 전하의 편지가 공개된 이후가 맞나요?”

    미심쩍다는 투였다.

    대답은 ‘아니’였지만, 그는 그렇다는 답을 원하는 듯했다.

    그런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가 내 비밀을 안 시기가 중요한가?

    “아닐걸?”

    “……전하께서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요? 언제부터요?”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게 중요해?”

    로웰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해.”

    “그러고 구경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경을 안 써?”

    에드워드는 팔짱까지 끼고 구경꾼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가 작게 웃었다.

    “네가 시야 밖에 있는 게 불안해서 그래. 그냥 호위병 같은 걸로 생각해.”

    “호위병은 너처럼 안 쳐다봐.”

    “귀는 막고 있을게.”

    에드워드가 두 손을 귀에 대는 시늉을 했다. 귀엽다. 이게 아니라…….

    “다음에, 확실해지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로웰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는 복도를 지나 사라지면서도 에드워드를 유심히 봤다.

    반대로 에드워드는 로웰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눈을 떼면 내가 사라질 것처럼 보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잖아.”

    “그건 힘들어.”

    에드워드가 선선히 대답했다. 말은 선선한데 내용이 이상했다.

    “아니…….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 봐.”

    “응.”

    노력하는 척은커녕 듣는 척도 안 하고 있는데.

    침묵이 돌았다. 에드워드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복도에 진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내가 느끼는 긴장감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느끼는 거리감이라고.

    하지만 착각할 수 없었다. 다시 목이 타고 있었다.

    난 정신을 다잡았다. 둘 중 하나는 제정신이어야 할 테니까.

    “비스코티에서 너 실종 소식 난 건 알고 있어?”

    “그러게. 잠깐 자리를 이탈했을 뿐인데.”

    넌 열흘이 잠깐이야? 소식이 오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얼마나 오래 연락 두절이었는지 모른다.

    울컥했지만 참았다. 싸우지 말자.

    “잠깐이든 뭐든 이탈하면 안 되지……. 어떻게 된 거였어? 걱정했잖아.”

    걱정하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걱정할 줄 몰랐어.”

    “그걸 왜 몰라?”

    널 챙기라고 했잖아!

    에드워드는 내 말을 듣겠다고 했다. 적어도 난 널 걱정할 줄 알았어야지.

    “너를 걱정하느라 다른 생각은 할 틈이 없었어.”

    순간 화가 누그러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드워드가 설명했다.

    “비스코티는 문제없어. 정리하고 왔으니까. 너를 만나러 오면서 후방을 위태롭게 만들 순 없잖아.”

    “…….”

    “반란이 일어났는데 시간은 없었어. 네가 기다리고 있었잖아. 길게 끌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 전면전을 벌이면 희생이 클 테고 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미끼를 걸어 보기로 했어. 지도자만 잡으면 반란은 와해될 테니까.”

    “그 미끼가 너야?”

    납득은 되는데……. 내 말을 전혀 안 들었다는 건 알겠다.

    “위험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

    웃기지 마.

    그냥 들어도 위험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에드워드는 반란을 제압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화를 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벽에 머리를 대자 이마가 시원해졌다.

    에드워드가 손을 내밀었다. 잡고 기대라는 것 같았다. 난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환자는 아니었다.

    그보다 맥박이 야단이었다. 손을 잡으면 에드워드는 틀림없이 눈치챌 것이다.

    내가 마주 잡지 않자, 에드워드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표정 변화가 없는데도 그가 실망한 걸 알 수 있었다.

    난 왜 이런 걸 알까?

    한숨을 쉬고 에드워드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붙잡은 손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누구의 맥박인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어서, 에드워드는 입을 열었다.

    “손이 뜨거워.”

    “어.”

    “두근거려.”

    “…….”

    “이상해, 조프리.”

    “조용히 좀 해 봐.”

    그의 목소리가 들뜬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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