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필리프 왕의 곁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느라 발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발은 대체 언제 낫는 거지.
“붉은 투구.”
문득 떠올랐다. 눈에 띄는 장식을 차고 있던 기사들은 보통 최후가 좋지 않았다. 그 장식에 주인을 보호하는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을 적들에게 발각시키는 능력은 뛰어나서, 자기 실력을 자신하던 기사들은 무명 병사에게도 최후를 맞이하거나 했다.
미셸은 왜 장식을 달았을까?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멀쩡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자신의 위치를 속여 적의 정예를 한곳으로 유인하고, 자신은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왕성을 급습하려는 이유 같은 게.
난 필리프 왕에게 내 추측을 말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정말로 미셸 에이드로군. 에이드 공작의 정예야.”
“…….”
대전은 침묵에 잠겼다. 평화로운 셔벗은 성문 앞까지 쳐들어온 적군을 상대해 본 일이 없는 듯했다.
난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런 경험은 살면서 한 번만 해도 충분했다.
미셸 에이드의 병력이 왕성을 포위했다.
* * *
미셸 에이드는 왕자를 습격하는 계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공작은 잠시 서로에 대한 원한을 잊고 손을 잡기로 했으나 두 아들의 마음까지 조절할 수는 없었다.
미셸은 콜린 코크가 저지른 비열하고 자잘한 짓을 잊지 않았다. 그가 날뛰는 말에서 떨어져 목이라도 꺾였다면 콜린은 마음 깊이 기뻐했을 것이다.
조프리 왕자는 음험하고 야망 넘치는 인물이었으나 비열하지는 않았다. 콜린의 음모를 간파하는 지혜를 겸비했으며 승부에 진심으로 응했다.
그가 몸을 날려 미셸을 살렸을 때, 미셸은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라이벌로 삼을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미셸은 또래 중 적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체격이 크고 힘이 세서, 열네 살이 되었을 땐 성인들과 힘겨루기를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뛰어난 존재였다. 알렉스 바움쿠헨과의 겨루기는 기억에서 잊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너무도 방심했다거나.
그런 미셸이 인정하는 조프리 왕자를 비열한 콜린은 꼭 자기 같은 방식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미셸은 영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습격 계획을 짜는 데도 시큰둥했다. 왕자를 제거한 뒤, 코크 공작을 언제 배신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즐거울 지경이었다.
콜린에겐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 코크 공작 일파는 비열하다는 확신만 더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왕자는 살아 돌아왔고 콜린의 계획은 격파됐다. 단신으로 습격에서 살아나온 활약 때문에 왕자의 인기는 오히려 치솟았다.
미셸은 몸에 활력이 도는 걸 느꼈다. 과연 그의 라이벌이다.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아버지. 제게 병력을 맡겨 주십시오. 수도로 가는 길을 뚫겠습니다. 저 콜린 코크는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미셸은 필리프 왕이 자신에게 바라던 것을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용맹만으로도 온 나라의 성을 무릎 꿇릴 자신이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지혜를 내보이기로 했다.
그를 존경하는 병사들을 독려해서 험난한 협곡을 통과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조프리 왕자는 알아챌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영감을 얻었는지를.
미셸은 왕자와의 승부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장했고 또 믿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날의 시합이 자신의 유일한 패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미셸 에이드는 왕성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병사들이 화살을 쏴도 닿지 않을 거리까지 다가간 뒤 성벽 위를 향해 소리쳤다.
“조프리 왕자, 못다 한 승부를 겨루자! 그대가 당당한 사내라면 나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마지막으로는 주는 기회다!”
* * *
미셸이 성 앞에서 하는 행동은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미셸을 겨냥했다. 수십 발의 화살이 미셸의 발치에 떨어졌지만 그는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듯했다. 그 모습에 에이드군의 사기는 올라갔고 국왕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미셸 에이드는 십 분쯤 떠들다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말은 하루 내내 국왕군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셸은 혼자 떠드는 짓을 이틀쯤 하더니 싫증을 냈고, 대신 그의 병사들이 단체로 성 앞에서 악을 썼다.
도트는 그 내용을 전해 주진 않았다. 물론 소용은 없어서, 난 어떻게든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조프리 왕자는 남자도 아니라든가 남색이라 그렇다든가, 사생아가 명예도 모른다든가 하는 뻔한 내용이었다.
며칠간 퍼붓던 모욕이 끝나자 미셸 에이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공성이 시작됐다. 왕성의 주력은 알렉스와 함께 빠져나갔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방어에 동원됐다.
적병들은 사다리와 갈고리를 걸치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동트는 새벽부터 밤까지, 병사들은 적병들에게 활을 퍼붓고 뜨거운 물을 부으며 성벽을 뛰어다녔다. 난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다.
미셸 에이드가 다시 제안했다.
“조프리 왕자! 언제까지 성벽 뒤에 숨을 생각이냐?”
성벽 아래에서 외친 말이다. 나는 듣지 못해야 정상이었지만, 역시 그 말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레이가 말했다.
“나가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
“들은 척도 하지 마세요. 아예 외출하지 마세요.”
“그러고 있잖아.”
그레이는 내 다리를 봤다. 필리프 왕이 붙여 준 의사가 발목을 점검하고 있었다. 의사는 회복이 더딘 편이라고 말하고 나갔다. 의사들은 몸 상태를 보수적으로 평가하는 버릇이 있었다.
내 발은 거의 다 나았다. 붓기는 반쯤 가라앉아서 겉보기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통증은 참으면 된다.
“안 나가실 거라면서 왜 붕대를 풀고 계세요?”
“새 붕대를 갈아야 하니까.”
“붕대 간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레이가 지적했다.
“미셸 에이드는 초조해하고 있는 거예요. 조금만 버티면 돼요. 알렉스 바움쿠헨이 돌아올 테고 동맹 귀족들도 지원군을 보낼 테니까요.”
공성전은 공격하는 쪽에게 불리한 게임이다. 왕성의 성벽은 굳건해서 함락하기 어려웠다. 버티면 지원군이 올 것이다.
“못 버티면?”
“셔벗의 성벽은 굳건하고 병사들은 왕에게 충성하고 있어요. 못 버틸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이건 책 속이 아니잖아.”
논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위기에 병사들은 지쳤고 불안에 떨었다. 궁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모두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
미셸의 말은 대개 헛소리였지만 옳은 말도 있었다. 나는 병사들을 방패로 삼고 있었다.
“내가 단기 접전에 응하겠다고 하면 시간을 벌 수 있을까?”
내가 습격을 피하느라 약간의 부상을 입었으며, 붕대를 풀고 몸을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통할까?
“……그게 왜 궁금하세요?”
“미셸이 훌륭한 기사라면 이삼 일은 기다려 줄지도 모르잖아. 내가 나가서 싸우다 뒤로 물러나는 건 어때? 미셸이 따라와 줄까?”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하신지 저는 의문인데요.”
“미셸이 성벽 가까이 오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못해도 시간을 벌 수 있고, 잘되면 미셸을 잡을 수도 있어. 시도해 보는 건 나쁘지 않잖아.”
“아니요. 나빠요, 전하. 제가 정말 그런 계획을 찬성하리라 생각하세요?”
“아니.”
내가 생각하는 걸 그레이가 떠올리지 못할 리 없다.
미셸은 오만한 성격이다. 내가 힘겨워하는 것 같으면 쫓을지도 모른다.
성벽 가까이 유인한다면 병사들로 하여금 사로잡게 할 수 있다. 미셸만 수중에 들어오면 반란군은 와해된다. 에이드 공작은 협상에 응할 테니까.
미셸은 본인의 무력보다 그 몸이 가진 가치가 더 대단했다. 본인이 자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미셸의 몸보다 내 몸이 더 가치 있다는 거였다.
쓸모는 없는데 가치가 있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미셸을 유인하기는커녕 내가 잡혀 버리면 답이 없었다.
“기다리세요, 전하.”
그레이의 충고는 대개 옳았다.
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갈게. 거기 있어.
셔벗으로 오면서, 나는 에드워드에게 돌아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나를 믿지 않았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는 로제 부인이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그 상태로 성안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걸 기다림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외에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림은 지독했다.
다시 한밤중에 눈이 뜨였다. 열려 있는 창이 보였다. 그곳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더는 여름이 아니었다.
창을 열어 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다리는 건 오지 않는다.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렸다. 새가 홰치는 소리.
창가로 매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