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7화 (277/293)
  • 277.

    그러나 셔벗 왕의 자신만만한 발언대로 일이 돌아가진 않았다.

    내가 멀쩡한 꼴로 돌아왔다는 건 공작들에게도 금방 알려진 모양이었다. 사실 멀쩡하진 않았지만 셔벗 왕의 기사들은 그렇게 선전했다.

    소문 속의 나는 기사 한 명과 등을 맞대고 수백 명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대단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비스코티의 소문도 와전되기가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셔벗은 스케일이 달랐다.

    이건 사기 아닌가?

    아무튼 그 소문은 일행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다들 아카데미 출신이어서 내 비참한 검술 실력을 알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이델라가 우는 동안 알렉스는 임시 부목을 풀고 새 붕대를 감았다. 밖에서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도트가 진수성찬을 끌고 들어왔다.

    “왕자님께 드릴 보양식이라고 하니까, 다들 열심히 준비해 줬어요.”

    도트는 눈이 붉어져서 말했다.

    오는 길에 육포를 먹었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같이 먹은 알렉스는 옆에서 ‘전하, 많이 드십시오.’ 하고 부추기고 있었다.

    난 억지로 수프를 먹으며 조용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드물게도 로웰과 그레이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데 그 자세가 심히 불량했다.

    잔소리 들을 것 같다.

    습격당한 게 내 탓도 아닌데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내 탓이 전혀 없냐고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입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이가 팔짱을 풀더니 말했다.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전하께서 무사히…….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서…….”

    그레이가 이마를 감싸더니 주저앉았다. 난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델라는 울다 말고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도트도 훌쩍여서 방 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누가 보면 죽었다 살아 돌아온 줄 알겠다.

    “나 멀쩡해.”

    “알아요. 저도 눈 있어요.”

    아, 그래.

    그러더니 그레이는 갑자기 말했다.

    “뭐가 멀쩡해요? 전하께서는 목숨이 여러 개예요? 다치셨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계셨으면 되잖아요. 저희가 찾을 때까지!”

    “그래. 다음부터는 그럴게.”

    달래 주자 그레이는 또다시 화냈다.

    “다음은 없어요!”

    “맞아요.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죠.”

    로웰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또 겪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제가 전하를 지키고 있었으면서 부상을 막지 못해서…….”

    알렉스가 고해 성사를 재개했다.

    넌 그만하고.

    그냥 두면 다들 울기만 할 것 같아서 나는 물었다.

    “바움쿠헨 기사단은 어떻게 됐어?”

    “귀환자는 세 명. 나머지는 복귀 중이거나 부상, 혹은 사망. 다수는 포로로 잡힌 것 같아요.”

    그레이가 보고했다.

    바움쿠헨 백작에게 면목이 없다.

    “백작은?”

    “비스코티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막혔다는 듯해요. 한차례 습격이 있었지만 물리쳤대요. 현재 상대와의 병력 차 때문에 대치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어요. 돌아오라고 할까요?”

    “아니.”

    대치 중이라는 건 비스코티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기만 했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바움쿠헨 백작이 셔벗 왕의 편을 들어 싸우면 공작 측에게 좋을 게 없다.

    비스코티의 반란이나 진압하라고 놓아주는 게 서로 편하지 않나.

    “그야 당연히 막아야죠. 전하께서 어디 계실 줄 알고요?”

    그레이가 말했다.

    사신단은 두 갈래로 나뉘어 비스코티로 향했다. 그중 어느 쪽에 내가 없을지 셔벗 공작은 알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첫 충돌이 있었고, 다음은 대치가 이어졌다. 왜냐하면, 그사이 귀족군은 다른 곳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그 말은…….

    당연하지만 공작들이 노리는 건 나라는 소리였다. 백작이나 사신단, 혹은 비스코티가 아니라.

    그레이는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비스코티의 반란은 셔벗의 반역자들이 부추긴 듯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다리로 비스코티로 돌아가시는 건 무리잖아요.”

    “안 돌아가. 내가 돌아가 봤자 도움도 안 되고.”

    그보다 비스코티의 반란이 셔벗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는 또 뭔지 모르겠다. 그레이는 자기가 이해한 걸 남도 이해했을 거라고 멋대로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그레이의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공작들이 보낸 사신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귀족군은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실을 확인하러 사신을 급파한 듯했다.

    사신은 국왕 부부에게 예의를 차린 뒤 나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내게 용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미사여구와 수사적 의례가 가득한 말을 늘어놓은 뒤 본론을 꺼냈다.

    “그러나 폐하께서 후계자로 세운 저 조프리 왕자는 어떤 인물입니까? 정당한 서약을 통해 이어진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출생부터 부정한 자입니다. 게다가 저자가 자란 비스코티는 또 어떤 나라입니까? 비스코티의 무도한 정복 전쟁으로 북방의 작은 부족들은 끊임없이 고통받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비명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명예로운 셔벗은 이들의 독립을 마땅히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충심으로 청합니다, 폐하. 약속을 지키십시오. 저 탐욕스러운 비스코티와 그곳에서 자란 뿌리도 명확지 않은 사생아를 폐하고 정당한 주인이 자리를 잇도록 하십시오. 하나 된 셔벗의 힘이라면 더 큰 영광을 이룩하지 못하겠습니까?”

    사신은 하고 싶은 말은 다 쏟아 내더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나도 저런 식으로 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상대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숙련된 사신이어서 말에 끊임이 없고 논리 구조가 탄탄했다. 적어도 하고자 하는 말이 중간에 끊기거나 타인에 이해 주제가 바뀌는 일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화를 돋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필리프 왕은 몹시 노했다. 로잘린 왕비의 얼굴도 새빨개져서, 가장 냉정한 사람이 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요사스러운 혀를 함부로 놀리고 몸 성히 돌아가길 바라느냐?”

    기사들이 사신을 무릎 꿇렸다. 사신의 안색이 변했다.

    “폐하, 사신을 해하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닥쳐라!”

    아무도 필리프 왕을 말리지 않았다. 왕의 미움을 사고 싶어 하는 귀족은 없다.

    그러나 이미 저쪽에 명분이 있는 전쟁이었다. 필리프 왕이 나를 보호하고자 했던 의도와는 별개로, 왕은 오래전부터 두 공자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것도 약속이라고 하면 약속이었다. 왕이 곤란해진 게 전부 나 때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 책임이 있었다.

    “그대의 충성심은 몹시 교만하군. 어느 종이 주인에게 명령하는가? 어느 종이 감히 주인의 가족을 모욕하고 뻔뻔하게 충심을 입에 담지?”

    “이 사생아가!”

    알렉스 손에 검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알렉스라면 맨손으로도 사신의 목을 꺾을 수 있겠지만. 그는 내 팔을 꺾고 앞으로 튀어 나가진 못했다.

    “내뱉은 말이 본인의 뜻이라면 그대는 당장 부끄러워해야 마땅하고, 남의 생각을 읊었을 뿐이라면 그대의 진짜 주인에게 돌아가 들은 대로 전하게. 그대는 수치를 모르는 자거나 남의 말을 전할 뿐인 종인데, 어느 쪽이든 사신에는 맞지 않군. 역도의 진영에는 인재가 없나?”

    “조프리 왕자!”

    “뭐 하는가? 저 무례한 종을 내쫓지 않고.”

    알렉스의 옷자락을 놓칠 것 같아서 명령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곳은 비스코티 왕성이 아니었다.

    아무도 명령을 듣지 않으면 부끄럽겠다 싶었는데 기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사신을 끌어냈다.

    사신은 필리프 왕의 진영에 두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떠났다.

    하나는 모든 병사를 분노하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정보를 줬다는 것이다.

    사신은 제 입으로 비스코티의 반란이 셔벗의 공작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실토했다.

    이런 망할.

    알렉스가 손을 잡아서 벽을 치지도 못했다.

    붕대 감아 놓은 발을 순간 봤다가 멍청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당장 울 사람이 두 명은 떠올랐다. 낫는 시간이 길어지면 애초에 나만 손해다.

    흥분하지 말자. 백작은 에드워드에게 이상이 생기면 당장 국경에서부터 소식이 날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가 몇 년이나 지낸 장소다. 국경에 대해서라면 그의 말을 믿는 게 옳았다.

    사신이 남긴 말은 하나 더 있었다.

    ‘하나 된 셔벗의 힘이라면 더 큰 영광을 이룩하지 못하겠습니까?’

    셔벗의 반역자들이 왜 비스코티를 건드렸을까?

    혼란해진 비스코티는 나를 지원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비스코티는 혼란한 정도를 넘어 혼돈에 빠졌다. 에드워드는 실종됐고 대신들은 이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데마저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북방 이민족과 손잡은 셔벗 공작들이 욕심을 낼 만했다.

    솔직히 말해, 욕심도 아니었다. 합리적인 판단 그 자체다.

    지금 비스코티는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줌 병력으로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욕 나올 것 같다.

    이렇게 되면 필리프 왕의 위기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셔벗의 내전은 반드시 필리프 왕의 승리로 돌아가야 한다.

    손으로 감은 눈 위를 문질렀다. 두통이 가시는지는 모르겠고 한숨이 나오긴 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

    “도트. 이걸 바움쿠헨 백작에게 전해 줘.”

    “예, 전하.”

    도트는 눈에 안 띄는 차림으로 성을 빠져나갔다. 내 인장이 찍힌 위임장이 백작에게 떠났다.

    내 인장이 얼마나 역할을 해 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파이 공작은 왕국이 망하길 바라는 인물은 아니었다.

    반역자인 스승님을 믿고 있어야 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그 사신은 벌하는 게 옳았어.”

    필리프 왕이 말했다.

    “사신이잖아요. 저쪽에 더 명분을 줄 필요는 없어요.”

    “네가 나를 생각해 모욕을 감내할 필요는 없어.”

    왕은 속상한 듯했다.

    난 딱히 모욕을 감내하지 않았다. 사신은 질질 끌려서 나갔는데 그걸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상관없었다.

    사신단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뭘 해야 할지 난 아직 정하지 못했다.

    내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이상한 데서 장래가 덜컥 정해져 버린 느낌이다.

    “페하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이기도 하잖아요.”

    필리프 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챈 듯했다.

    “정말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나 같은 걸 후계자로 삼아도 괜찮나?

    필리프 왕이 뺨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 괜찮겠니?”

    그건 내가 했던 말이다.

    “저는 비스코티와 셔벗의 안녕을 위해 두 왕국이 화평하길 바라요. 셔벗의 내전에 비스코티가 희생되지 않기를 원해요. 그러려면 폐하께서 이 반란을 잠재우셔야 한다고 믿어요.”

    “응. 그럴 생각이었단다. 그러니까 조프리, 네 말은…….”

    필리프 왕은 어설프게 물었다.

    “우리의 아이가 되어 주겠다는 거니?”

    내가 그런 소리를 한 마디라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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