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6화 (276/293)
  • 276.

    돌아가는 길은 끊임없이 걷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지겨울 때까지 걸었다. 사실 지겹진 않았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부어오른 곳은 오른쪽 발목인데 왜 발목을 제외한 모든 몸이 굳어 버리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업혀서 이동할 수는 없었다. 습격에 대비해 알렉스의 체력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괜찮다고 주장했지만 무시했다. 사람 몸은 강철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동 속도는 그냥 걷는 것보다 느렸다.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해 밤을 통해 이동해야 했던 데다가, 하필 다친 곳이 다리여서 문제였다. 알렉스가 목발이라도 되는 듯 의지해서 걷다가, 못 견딜 지경이 되면 그에게 업혔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송구스러워하면서 나를 업었다. 그 말만 아니면 덜 의식될 텐데.

    중간에 수색병 무리와 마주쳤다. 알렉스가 내 입을 막고 나무 뒤에 숨었다. 숨죽이고 있는 동안 병사들은 지나갔다.

    “그놈들도 못 찾은 걸 보면 이미 어디서 목이라도 꺾여 있는 거 아냐. 아니면 진작 그놈들에게든 우리에게든 발견됐겠지…….”

    “하여간 높은 분들은.”

    불평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대화를 머리에 담고 천천히 움직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에 어쩔 수 없이 부하가 걸렸다. 발목이 혼자 열을 품고 지끈거리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 추측이 전부 잘못됐고, 셔벗 왕이 나를 이용하다 버렸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노력한다고 다 이뤄지면 세상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겠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

    “조프리 전하. 깨어나셨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왕국의 홍복입니다.”

    셔벗의 기사가 감격해서 말했다.

    알렉스의 등에 업혀 기절해 있는 동안 나를 둘러싼 배경이 바뀌었다.

    산등성이가 완만한 길로 바뀌고 내가 타고 있는 건 알렉스에서 마차로 변했다.

    난 알렉스의 다리에 기대 누워 이동하고 있었다.

    “곧 왕성입니다, 전하.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저 폭도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겠군요!”

    셔벗 왕의 충성스러운 기사가 말했다.

    우리를 태운 마차는 전속력으로 이동했다. 나는 기사의 말을 통해 나를 찾던 병력이 토피넛 상단을 통해 구한 용병이며, 셔벗 왕이 이들을 도와 나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셔벗의 공작들이 선전 포고를 했다는 것까지.

    내가 가져갈 정보는 쓸모없어졌다.

    하지만 안 좋은 일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어서, 내 몸뚱이는 그 이상으로 쓸모 있어진 듯했다.

    왕성이 열리고 필리프 왕과 로잘린 왕비가 나를 맞았다. 국왕 부부 곁에는 셔벗의 대신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레이를 비롯한 내 일행들이 있었다.

    살았다. 순간 안도감에 휩싸였다. 난 가까스로 비틀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조프리.”

    셔벗 왕이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로잘린 왕비는 옆에서 울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당혹스러운 반응이었지만, 나는 사이좋은 조카처럼 셔벗 왕을 마주 안았다.

    셔벗 기사단이 함성을 질렀다.

    “저 역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조프리 전하께서 귀환하셨다!”

    “우와아아아아!”

    그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귀족들은 동조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구경하러 나온 궁인들이 보였다. 그들이 환호하고 안도하는 모습을 봤다.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면 됐다.

    셔벗 왕은 함성이 끝날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 * *

    일행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나는 셔벗 왕과 독대했다.

    그는 내게 셔벗에 남으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은 내가 셔벗 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셔벗 공작들이 반란을 일으켜 준 덕에 팔자에도 없는 진로가 갑자기 생겼다. 고마워해야 할까?

    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나도 셔벗 왕에게 요청할 게 있었다.

    내가 셔벗에 남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바움쿠헨 백작은 반드시 돌려보내야 했다.

    “에이드와 코크가 후계자 시험의 불공정을 이유로 반기를 들었다. 너에게 정당성이 없으며 내가 너를 후계자로 삼는 것은 약속을 깨는 일이라는 게 그들이 내건 명분이었지. 귀족원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공작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자들도 생기더구나. 이미 약조된 바가 있었겠지.”

    셔벗 왕은 갑자기 말했다. 내게 상황을 설명해 주려는 투였다.

    막을 수도 없어서 들었다.

    그는 이미 말한 적 있었다. 두 공작에게 역심이 있으며 왕은 나를 보호하러 국경까지 내려온 거라고.

    나는 그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보통 내게 나쁜 정보는 사실이긴 했다.

    “그러던 중 사신이 네 투구를 가져왔지. 나는……. 믿을 뻔했단다. 네 비서들이 투구가 네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믿었을 거야.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조프리, 이만 비스코티로 돌아가렴.”

    난 하려던 말을 잊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비스코티에서 사신을 보내 너를 돌려보내길 요청했단다. 너를 이 이상 셔벗에 두는 건 옳지 않아. 비스코티보다 이곳이 네게 더 위험할지 모르겠구나.”

    진심인가?

    셔벗 왕은 왕실의 명예를 방어하느라 열심히 내 편을 들었다. 그 때문에 셔벗 공작들은 명분을 잡고 반기를 드러낼 수 있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빠지면 셔벗 왕에겐 문제가 생긴다. 내가 행방불명이었던 동안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왕성으로 오는 길에, 셔벗 왕의 기사는 왕성의 분위기가 얼마나 나쁜지 우리에게 알려 줬다. 귀족들이 언제 등을 돌려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고 기사는 말했다.

    셔벗 왕은 용맹으로 유명한 왕도 아니었다. 반면 에이드는 대대로 훌륭한 기사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미셸 에이드의 경우 셔벗에서 명성을 다투는 기사였다.

    두 공작의 영지를 합치면 단순히 계산해서 셔벗의 절반이 넘는다. 왕국의 반이 왕에게 반기를 드는 셈이다.

    셔벗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움쿠헨 백작이 이끄는 사신단도 공작의 병력에 포위당해 대치 중이라고 들었어요. 비스코티로 돌아가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내가 너를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단다.”

    왕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비스코티로 돌려보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돌려보내기 싫어하셨잖아요.”

    왕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왜 이제 나를 돌려보낼 생각이 들었지?

    그는 내가 셔벗에 오길 바랐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돌아가도 된다고 말한 뒤 나를 후계자 시험으로 끌어들였다. 내게 시험에서 떨어지라고 말했으나, 그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미셸 에이드에게 한 것처럼 왕이 내게 소리쳤다면, 셔벗의 귀족들은 나를 달리 봤을 것이다.

    내겐 에이드 같은 배경이 없었다. 이곳에서 내 배경은 셔벗 왕이었고 셔벗의 왕실이었다. 아마 셔벗 귀족들에게 내가 정말로 비스코티 사람으로 보인 적은 없을 것이다. 셔벗 왕이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사실 모르기 힘들 정도로 그는 나를 총애했다.

    셔벗 왕이 나를 봤다. 곤란한 표정이었다.

    민망해하는 건가?

    “이미 너는 알고 있잖니. 나는 미셸과 콜린을 후계자감으로 본 적 없단다. 둘 중 누구를 삼든 셔벗은 갈라지겠지. 그렇다면 누구를 언제 후계자로 삼든 상관없겠지. 그래서 지목하지 않았어.”

    셔벗 왕이 두 사람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느낌은 받았다. 내가 알던 왕이 나를 보던 것과 비슷한 태도를 취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마음에 전혀 없는데도, 그래야만 하니까 말을 건다거나 시선을 주는 모습이.

    다른 귀족들은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두 공자는 느꼈을 것이다. 그런 건 받는 쪽은 모를 수 없다.

    그 두 사람이 왜 나를 경계했는지도 나는 알 것 같았다.

    “실은 그렇게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단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왕위를 잇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태어나 보니 유일한 왕자였다. 뒤이어 태어난 형제들은 모두 어려서 죽었고 건강하게 자란 한 명은 딸이었지. 그 아이가 원한다면 난 그 아이의 아들에게 왕관을 넘겨줘도 괜찮다고 생각했단다. 난 줄곧 시인이 되고 싶었거든……. 외국을 돌아다니며 시를 쓰고……. 그래서 밀라네는 나를 싫어했지.”

    셔벗 왕이 말했다.

    나는 지금 왕이 진로 선택을 잘못했다는 고백을 듣고 있었다.

    “다른 왕비를 들여 왕국을 안정시켜야 한다고도 생각했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반란자들은 싹을 자르고 그 재산은 전부 회수해 왕실의 감시하에 두었단다. 예술가들을 후원했지만 동시에 귀족들의 사치 풍조를 방조했지. 넘치는 부로 병사를 키우고 영지를 다스리기보다 개인의 향락에 쓰도록 만들었단다. 그 때문에 가난한 영지에서는 과도한 부담을 지게 되었지.”

    외국인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셔벗 왕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콜린의 독서 모임 회원들은 셔벗 왕의 의중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꿰뚫고 있었다.

    왕은 사치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귀족들이 왕권을 넘보는 데 돈을 쓸 바에는 사치하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왕권이 강해지고 전쟁은 사라져서 셔벗 왕은 현군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나라가 평화로우면 교역도 발달한다. 귀족들의 주머니를 가장 많이 채워 주는 건 영지민이 아니라 교역을 다니는 상인들이었다. 이 나라의 착취라는 건 비스코티와 양상이 달랐다.

    자기 욕을 하는 것 같은데 난 이 사람이 좋은 왕이긴 하구나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가 왕위를 원치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네가 후계자가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너는 좋은 아이고, 보고 있으면 자랑스럽고, 또 걱정이 돼서……. 하지만 내가 또 잘못된 판단을 한 것 같구나.”

    셔벗 왕은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렴. 너를 위험에서 보호하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란다. 친위대를 붙여 주마.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들이란다.”

    그는 여전히 왕비님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왕비님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볼 때 왕비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제 호위로 친위대를 붙여 주시면, 폐하는요?”

    “걱정해 주는 거니? 기쁘구나. 하지만 괜찮단다. 이 성벽을 넘어 누가 나를 해치러 오겠니?”

    셔벗 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연락하는 친척이 있어 본 적이 없으니까.

    이 사람은 조프리의 삼촌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