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5화 (275/293)
  • 275.

    로웰은 초조해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바움쿠헨 백작과 귀족 동맹군의 충돌이 보고된 곳은 칼라일 산맥 유입이었다.

    백작은 귀족군을 격파했으나 비스코티 방면에서 새로운 병력을 발견했다. 백작이 이끄는 사신단은 수가 적었고 맡은 바 임무도 전투의 승리가 아니었다. 백작은 정체불명의 군대와 대치하며 비스코티에 연락을 취했다. 동시에 셔벗 왕성으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로웰은 토피넛 상단주와 면담을 가졌다.

    상단주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선약이 있다며 찾아온 로웰을 기다리게 했으며, 그를 만난 뒤에도 환영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태도다.

    로웰은 역시 상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는 않았다. 그의 생각을 상단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단주는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솔직하게 말했다.

    “조프리 전하께서 습격당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런 상황에 폐하의 편을 들라는 것은 상단의 명운을 걸라는 소리인데…….”

    “필리프 폐하의 편을 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조프리 전하에 대한 신의를 지키시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상단주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시겠지만 셔벗에서 장사하면서 공작들과 척을 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로서는 공작 측에 합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해 신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로웰이 웃었다.

    “아니요.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전하를 찾았을 때부터 상단주께서는 상단의 명운을 걸지 않으셨습니까? 전쟁이 피해 가기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다가, 승자의 처분에 상단의 운명을 맡기실 겁니까? 그럴 분이 아닐 텐데요.”

    토피넛 상단주는 귀족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충분 이상의 돈을 먹여 놓아도 은혜를 모르고 손을 벌리는 자들이다.

    필리프 왕은 합리적이었으나 상인들이 건방지게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두고 볼 인물이 아니었다. 두 공작은 보다 귀족적인 인물이었고, 그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면 그 피해 복구를 상단에게 청구할 인물들이다.

    그들의 땅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상단의 재산이 그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역시 조프리 왕자만 한 인물이 없다.

    상단주는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 왕자가 죽었지 않은가?

    로웰 몽블랑이 선뜻 말했다.

    “상인답게 값을 계산하라고 하세요.”

    “무슨 말입니까?”

    “상단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대단한 부자이십니다. 상단주께서는 전하께 용병과 물품을 팔아 주십시오. 제값 이상으로 치르겠습니다. 전시이니까요. 특수가 통하는 상황이죠.”

    그렇게 해 준다면 상단주에게도 명분이 섰다.

    상단주는 로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놈이 몽블랑의 그 망나니가 맞나?

    조프리 왕자의 비서로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사람 홀리는 재주로 붙어 있는가 했다. 왕자의 투자 조언자라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왕자는 이놈의 재주를 어떻게 알아봤단 말인가?

    “그건……. 나쁘지 않군요.”

    “거래가 끝나면 아주 좋다는 말씀이 나오실 겁니다.”

    로웰은 미소 지었다.

    그는 왕자의 자산을 다양한 방법으로 굴리고 있었다. 몽블랑 상단에 예금된 다량의 금액은 전표로 유통할 수 있을 것이다. 현물이라면 이델라가 왕실 모독죄로 수거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귀중품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거래를 끝내고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로웰은 상단을 나오자마자 에브니아에게 붙들렸다. 또 사람을 붙인 모양이다. 그는 화내는 대신 웃는 얼굴로 에브니아를 맞이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집안의 감시도 심해졌을 텐데.”

    “그게 문제야? 네가 위험에 처했는데. 로웰, 어서 왕성에서 나와. 몽블랑으로 들어가든가 어디든 거처를 옮겨서 숨어 있어. 내가 때 되면 안전하게 피신하게 해 줄 테니까.”

    에브니아는 머릿수건을 벗었다. 눈부신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로웰은 눈썹을 올렸다.

    “우리 각하께 들켰어?”

    “무슨 말이야! 조프리 왕자가 죽었잖아! 더 이상 엮이지 마. 일이 잠잠해진 뒤에 나오면 다들 너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할 거야.”

    로웰은 화가 치밀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

    “왜?”

    에브니아의 얼굴에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충성심은 통할 말이 아니다. 오히려 조프리 왕자를 질투할 것이다.

    로웰이 말했다.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난 파산해.”

    “파산?”

    에브니아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좋은 집 아가씨인 그녀는 파산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으나, 그 단어가 주는 심각성만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빈털터리에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 어디를 가도 명예를 회복할 수 없을 거야.”

    “내 집으로 들어오면 되잖아.”

    로웰은 짧게 웃었다. 에브니아는 그 소리가 날카롭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웰은 그녀가 좋아하는 애교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지? 네 아버지가 받아 줄 리 없잖아.”

    “나랑 사랑의 도피를 해.”

    “돈 한 푼 없는 남자와 도피하겠다고? 에브니아, 그렇게 살 수 있어?”

    “살 수 있어.”

    에브니아는 그렇게 말했으나, 순간 손에 물을 묻히며 부엌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비참한 꼴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아버지는 금방 용서할 거야. 로웰, 아무 걱정 하지 마.”

    “아니. 안 그럴 거야.”

    로웰이 가볍게 말했다. 에브니아는 그를 노려봤으나 이내 두려워졌다.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려고?”

    “내가 파산을 피하려면 전하께서 살아 계셔야 해. 찾도록 도와줘.”

    “오, 로웰. 물론이야. 아버지를 꼭 설득할게.”

    에브니아가 달려갔다. 로웰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프리 전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방법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로웰의 특기였고, 그는 조프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죄책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조프리를 찾기까지, 그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 * *

    조프리 왕자의 투구는 사신의 두 손에 공손히 들려 필리프 왕 앞에 도달했다.

    셔벗의 궁정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으나 그레이는 그렇게까지 순진하게 놀아날 정신은 갖추지 못했다.

    그는 조프리 왕자가 알렉스 바움쿠헨과 함께 실종됐음을 주목했다. 셔벗의 반역자들에게 포로로 잡힌 기사 중 바움쿠헨은 없었다.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에게 수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그가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자는 그레이에게 절대 곁은 내어주지 않았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다소 멍청했으나 충성심과 무예로는 따를 자가 없었다. 왕성에 침입해 왕자를 구출해 내는 기사가 습격으로부터 주인을 지키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레이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로웰 몽블랑과 이델라 에클레어는 수색대를 꾸렸다. 왕자가 습격당한 산맥으로 급파하겠다는 것을 그레이가 잠시 막았다.

    “왜 막으시는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출발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는 중에도 왕자님은 적군에게 쫓기며 험한 산에서 고초를 겪고 계실 텐데…….”

    왕자의 시종이 괴로워하는 것을 그레이는 흘려들었다.

    왕자가 비스코티로 떠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소수였다. 저 시종과 왕자의 비서들, 같이 출발한 사신단과 셔벗 왕이다.

    그레이는 반역자들이 왕자의 출발을 어떻게 알았을지 의문이었다.

    사신단의 일원 중 왕자를 배신할 사람은 없다. 배신하고 싶더라도 배신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신단은 바움쿠헨 백작의 통제하에 있었고, 출발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떠났다.

    셔벗에 남은 측근들은 배신할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라면 셔벗 왕이었으나, 왕자가 사라지면 위기에 몰릴 사람이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리 없었다.

    그가 왕자를 해치고 싶었다면 더 좋은 시기가 바로 이전에 있었다. 셔벗 왕이 노망이 든 게 아니라면 왕자의 행방을 외부에 흘리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잘 맞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알아듣긴 힘든데요.”

    “네, 저희가 각하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어서요.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로웰과 이델라가 말했다. 그레이는 왕자의 비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하께서 떠나시고, 그분이 가시는 길과 때를 습격자들이 너무도 빠르게 알아차렸다는 말입니다.”

    “저희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이델라의 눈이 커졌다.

    “배신자까지도 필요 없죠. 전하께서 어떤 소식을 들으면 비스코티로 출발하리라는 사실이 명백하니까요. 비스코티의 반란과 에드워드 전하의 실종을 셔벗의 반역자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두 공작이 국경 반란을 획책했다고요?”

    이델라는 놀랐다. 말없이 듣고 있던 로웰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게 전하를 구하러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왕자가 실종됐는데 정세 분석이나 하고 있을 때냐는 뜻이다. 그레이는 신경이 곤두서는 걸 억눌렀다.

    “……감정을 앞세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전하께선 명민한 분이십니다. 내가 추측한 걸 전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비스코티의 위기로 인해 잠시 급한 판단을 내리셨지만, 곧 습격의 의미를 깨달으시겠죠.”

    로웰 몽블랑만 조급한 게 아니다. 그레이도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한 줌이나 되는 수색대로 산맥을 전부 뒤지고 다닐 셈은 아니겠죠. 적군은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막기 위해 비스코티 방면을 막으려 할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실종지에서 셔벗 왕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레이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왕자는 그레이가 만나 본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으나, 늘 더 많은 사람을 위하는 판단을 내렸다.

    왕자가 혼자 비스코티로 피신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권을 틀어쥐는 결정을 내릴까?

    그레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색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왕성으로 오는 길목을 틀어막으러 떠났다.

    얼마 뒤 그들은 누군가를 업은 채 걸어오는 장신의 기사를 발견했다.

    그가 알렉스 바움쿠헨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셔벗 왕성으로 급보가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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