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4화 (274/293)
  • 274.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희뿌옇게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깨어 있는 건가 싶었지만,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다 잠든 모양이었다.

    피곤했을 것이다. 환자 하나를 업고 간호하느라 며칠을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테니까.

    기회였다.

    동틀 녘이라 때도 좋았다. 밤에 산을 헤맬 자신은 없었다.

    수통을 허리에 매고 일어섰다.

    알렉스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발목에 부목이 대어 있었다. 질긴 풀을 엮어 끈을 만들어 묶은 모양새였다.

    단단히 매어 있는지 몇 번 만져 본 뒤 걸음을 옮겼다.

    알렉스에게 나를 호위해서 내려가라는 건 과한 요구였다. 알렉스는 눈에 띈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무거운 갑주는 죄다 버린 듯했지만, 그는 겉모습만으로 기사처럼 보였다. 그와 내가 걸어가면 누가 봐도 도망 중인 왕자와 그 기사처럼 보일 것이다.

    나 혼자는 그보다 눈에 안 띌 자신이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었다.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습격받은 장소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말을 발견할 수 있겠지.

    알렉스의 말이 옳았다. 내 몸은 지독하게 느렸다. 달팽이와 좋은 승부가 될 듯했다. 이 발로 걸어서 내려가는 것보단 말을 찾으러 거슬러 올라가는 게 더 빠른 길이었다.

    말은 비싼 동물이다. 용병들이 죄다 끌고 갔을 확률이 높지만, 습격 때 도망쳤다 주인을 잃은 장소로 다시 돌아온 말이 한 마리라도 있을지 모른다.

    “전하.”

    그러나 얼마 걷기도 전에 알렉스에게 붙들렸다.

    그는 피로해 보였다.

    “늦으면 돌아갈 왕국도 사라질지 몰라.”

    “전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말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난 내려갈 생각이었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 아니, 따라오지 마.”

    “…….”

    “명령이야.”

    알렉스는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난 그가 필요 없다고 말한 셈이다. 그가 상처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죽는 것보단 낫겠지.

    “싫습니다.”

    어?

    “전하. 저는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좋은 기사는 아닙니다. 이미 전하께 불충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알렉스가 망설이지도 않고 다가와서 나를 안아 들었다. 전날처럼 나는 동굴로 끌려갔다.

    “알렉!”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름 부르기밖에 없었다.

    “제게 화내셔도 됩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난 이미 화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겐 전하의 기사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가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렉스는 왕국 제일의 기사였다. 바움쿠헨 백작과 에드워드를 제한다면, 아마 확실히 그럴 것이다. 난 그가 기사로서 쓸모없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저는 전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알렉스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닥불은 그새 꺼져 있었다.

    “제 목숨을 구하시고, 제가 친구들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제게 집과 스승님과, 제가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 제가 전하께 감히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알렉스가 괴로운 듯 말해서 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불충한 감정이라는 게…….

    “스승님은 제가 전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작이 무슨 소리를 했다고?

    “그렇다면, 제가 충심에서 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실은 전하를 연모해서 행한 일이 아닙니까? 저는 감히 전하를 넘보는 것이 아닙니까? 전하 곁을 비우기 싫어했던 것도, 전하께 접근하는 자들을 적대하는 것도 기사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충성스러운 기사라면, 지금도 전하의 뜻을 받들어 비스코티로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전 그럴 수 없습니다…….”

    알렉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 같긴 했다.

    나만 상태가 안 좋은 줄 알았더니 알렉스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고민을 내내 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면 안 돼?”

    “예?”

    “충심으로 한 일이 아니면 안 돼? 넌 나한테 나쁜 일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잖아. 뭐 잘못된 것도 아닌데 왜 널 괴롭혀? 자연스러운 감정이잖아.”

    내가 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삽질은 멈췄다.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전하께서는……. 제가 전하를 연모해도 괜찮으십니까?”

    “너야말로 괜찮겠어?”

    나 같은 걸 좋아해서.

    “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어.”

    그 말을 뱉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강제로 신경을 쓰게 만드는 상대가 있다. 내 인생을 쥐고 흔들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방금 전까지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꼴로 혼자 비스코티에 입국하겠다고?

    가다가 아무 일도 안 생기면 그게 더 놀라울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비스코티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알렉스의 말대로 몸을 회복한 뒤 일행과 합류하는 거였다.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봤다. 그가 낙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전하를 계속 연모해도 되겠습니까?”

    알렉스는 그냥 그렇게 물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마음을 허락받는 것뿐이라는 듯이.

    그가 긴장하고 있어서 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원하는 건 애정에 대한 보답도 아니었다.

    알렉스는 내가 만난 가장 순수한 사람일 것이다. 충성 맹세를 받을 때도, 그 순수한 마음이 탐나 손을 뻗었다. 그에게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알렉스는 다시 벽에 기대 잠들었다. 내가 누워 있는 자리와 동굴 입구를 가로막는 위치였다. 아무 데나 앉을 줄 알았는데 다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움직이면 그림자라도 그의 시야를 가릴 만했다.

    ‘편하게 자도 돼. 안 나갈 테니까.’

    ‘예, 전하.’

    대답은 잘했다. 알렉스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난 그냥 눈을 붙였다.

    악몽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 깰 때마다 알렉스가 보였다. 풀을 엮어서 깔개 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 사실 이불이었는지, 다음에 깼을 땐 내 배 위에 올라가 있었다.

    눈을 뜨자 다시 낮이었다. 열이 땀과 함께 빠져나간 듯 몸이 가벼웠다.

    “일어나셨습니까?”

    알렉스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알렉, 내려가자.”

    “열은…….”

    “내렸어. 확인해 볼래?”

    알렉스가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호자처럼 굴던 태도를 바꿔 보고했다.

    “그간 두 차례 수색대로 보이는 병사들이 이 근처를 돌았습니다. 소속을 알 수 없어 행방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백작이 이끄는 병력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백작도 습격당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를 노릴 만한 세력. 기사와 용병을 동원할 재력이 있고, 내가 왕성에서 빠져나갔다는 걸 알 만한.

    그런 세력은 많지 않았다.

    “그 기사, ‘공자’라고 말하지 않았어?”

    “예. 들었습니다. 습격의 배후가 셔벗의 공작 중 하나입니까?”

    “그런 것 같은데.”

    가지가지 한다.

    나는 비스코티로 귀국하는 걸 잡아 죽여야 할 정도로 위협 인물이 된 모양이었다.

    귀국 후에는 안전할까? 귀국 자체도 문제였다. 사방이 지뢰밭이다.

    알렉스와 내가 이 셔벗 땅에서 일행을 찾아 자력 귀환하는 건……. 일 초만 생각해도 무리였다.

    일행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신단의 규모는 이미 알려져 있다. 셔벗 공작이 바움쿠헨 백작을 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반드시 승리할 만한 규모를 동원했을 것이다.

    백작은 반드시 비스코티로 돌아가야 한다. 에드워드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백작이었다.

    냉정해지니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돌아가야 할 곳은 비스코티가 아니다.

    “왕성으로 돌아가자.”

    “왕성?”

    “셔벗 왕성.”

    공작이 병력을 움직였다. 셔벗 왕은 이 소식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 * *

    콜린 코크는 수색대의 보고를 들었다.

    -낙하한 부근을 샅샅이 뒤졌으나 조프리 왕자의 행방을 알 수 없음.

    “물살에 떠내려갔겠지. 그 절벽에서 떨어져서 무슨 수로 살겠어? 머리부터 떨어져서 죽었을 거다.”

    미셸이 빈정거렸다. 콜린은 신경이 곤두서는 걸 내리눌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약속한 보수를 주시면…….”

    수색대의 대장이 말했다.

    “무슨 보수?”

    “예?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시체를 발견하면 지급하겠다고 했잖아. 그대가 가져온 게 시체인가?”

    수색대 대장은 얼굴을 붉히고 나갔다.

    미셸이 코웃음 쳤다.

    “알뜰하기도 하지. 비열하기도 이를 데 없고. 참 재주도 좋아.”

    “그만해.”

    콜린은 이를 악물었다. 에이드 공작이 찬동했는데도 미셸은 조프리 왕자를 습격하는 계략 자체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와 충돌하고 왕자를 놓친 건 에이드 공작의 병력이었다. 에이드의 실패가 아닌가?

    왕자는 추락했고 수색대는 절벽 아래에서 조프리 왕자의 투구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콜린은 불안증이 도졌으나 더 찾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왕자의 시체를 확인했다면 일은 훨씬 쉬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증언으로도 충분했다.

    셔벗을 가로지르는 큰 강은 거대한 산맥에서부터 그 줄기가 시작됐다. 지리를 모르는 자들은 조금만 올라가도 험한 산세에 갇히기 마련이었다.

    평생을 셔벗 밖에서 자란 왕자가 그 사실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왕자는 죽었다! 콜린의 공이다.

    이제 필리프 왕에겐 후계자가 없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콜린은 필리프 왕에게 사신을 보냈다.

    “폐하께 위로를 전해 드리게.”

    “예, 공자님.”

    사신은 투구를 가진 채 왕성으로 향했다.

    왕은 왕국의 절반을 장악한 세력과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타협해야 할 것이다.

    후계자를 잃은 왕을 귀족들이 어떻게 믿고 운명을 맡기겠는가?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공작에게 합류하면 왕도 버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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