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3화 (273/293)
  • 273.

    “조프리 왕자!”

    이런 망할.

    눈이 뻑뻑했다. 감았다 뜨자, 배어 있던 땀이 눈꺼풀 아래로 흘러내렸다.

    뿌옇던 초점이 하나로 맞춰졌다. 수풀에서 튀어나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수를 셀 수 있었지만, 그 수가 순식간에서 늘어서 의미를 잃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알렉스가 말했다. 그가 나를 뒤에 세워서 나는 절벽 가까이 서게 됐다.

    뭐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뛰어서 허파가 아팠다.

    난 가까스로 물었다.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어?”

    “제가 앞을 막을 테니 틈을 봐서 도망치십시오.”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이 돌아왔다.

    무슨 수로?

    그가 한 팔로 네 명을 상대하면서 다른 한 팔로는 나를 쫓아올 열다섯 명을 붙잡으면 가능할 것도 같다.

    헛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검을 들었다. 토할 것 같다.

    수풀에서 들리는 쇠붙이 소리와 고함이 누구의 것인지 알 듯했다.

    내 뒤를 따라온 기사들이 있다.

    몇 명이나 죽었을까.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포상금은 내 차지…….”

    포상금?

    알렉스는 걸어오는 병사의 목을 베어 버리고 그 뒤에 서 있던 병사의 얼굴에 검을 꽂았다. 검이 뽑히는 순간 핏줄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갑주로 가려지지 않는 틈만 찌르고 베어서, 마치 허수아비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전하!”

    알렉스는 지금이라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쓰러지고 있는 건 사람이었다. 칼로 찌르고 벨 때마다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렸다.

    병사들은 현명했다. 알렉스를 상대하는 게 좋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왕자를 노려! 기사는 가만 두고…….”

    알렉스가 현명한 병사의 머리와 몸을 분리시켰다. 그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절명하자, 병사들은 주춤했다. 욕심보다 안전에 대한 본능이 앞선 것이다.

    그럴 만한 위용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 사람이 낼 수 있는 위력엔 한계가 있었다. 나라는 짐까지 달린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전하!”

    “무리야. 뒤를 봐.”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 너머를 보고 침묵했다.

    돌아갈 길목이 완전히 막혔다. 이제는 병사의 수를 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알렉스 바움쿠헨. 위명이 거짓이 아니었군.”

    병사들 사이에서 장검을 든 남자가 튀어나왔다.

    “꼭 한번 겨뤄 보고 싶었지. 이런 상황에 만나 유감이군.”

    가지가지 한다. 남자는 백 미터 밖에서 봐도 기사였다. 반면에 병사들은 용병 무리 같았다.

    상황에 대해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왕자를 넘길 생각은 없나? 그대는 훌륭한 기사이지만 바르지 못한 주인을 위해 그 힘을 쓰고 있군. 공자께서는 그대의 실력을 더욱 높이 평가하실 걸세.”

    “말이 많군.”

    알렉스가 먼저 달려들었다.

    처음이었다.

    좋은 신호가 아니다.

    검이 몇 차례 부딪혔다.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들렸다. 날이 햇빛에 빛나서 눈이 아팠다.

    알렉스와 기사가 맞붙고 떨어질 때마다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는 게 보였다.

    그와 대등하게라도 붙었던 사람이 이제껏 없었다.

    몇 시간을 자고 달렸더라?

    알렉스라고 강철로 만들어져 있을 리 없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것이다.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뭔가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쓰러뜨린…….

    저들 중에는 궁병이 있다.

    순간 나무 옆에서 번뜩이는 쇠붙이가 보였다. 하나가 아니다.

    수풀 사이로, 일제히 시위에 올린 십수 개의 화살이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알렉!”

    난 두 번 볼 것도 없이 알렉스를 끌어당겼다.

    절벽 밑은 급류였다.

    하지만 화살집이 되는 것보단 살 확률이 클 것이다.

    “안 돼! 붙잡아!”

    기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알렉스가 나를 들고 뛰었다.

    몸이 한순간 중력을 거슬렀다가, 추가 달린 듯 아래로 떨어졌다.

    낙하감은 기묘할 정도로 길었다. 비명이 멀어지고, 알렉스가 나를 꽉 끌어안는 감각만 느껴졌다.

    풍덩!

    무언가에 얻어맞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의식이 날아갔다.

    * * *

    몸이 무거웠다. 내 머리맡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현관을 열고 들어온 엄마가 내 열을 재 보고 있다.

    눈꺼풀이 뜨거웠다. 머리맡을 맴돌던 기척이 사라지고 내 옆에 누군가 앉아 있다. 왕비님은 울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에드워드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고, 내게 계속 말하고 있다.

    ‘괜찮아. 일어나기만 해.’

    ‘그렇게만 해 줘.’

    눈이 뜨였다.

    에드워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웅크린 채 기침을 내뱉자 배가 땅겼다.

    “전하! 의식을 차리셨습니까?”

    알렉스가 달려왔다. 찬 수건이 이마에 닿았다. 수건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는데, 얼굴을 닦은 수건은 곧 미적지근해졌다.

    열이 나는 것 같다.

    알렉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기침이 끝날 때까지 매달렸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곳이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납처럼 무거웠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몇 시야?”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전하.”

    질문을 마친 뒤에야 시계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알렉스는 내 질문에 대답도 안 하고 사라졌다. 그 와중에 나를 어딘가에 기대 놓아서,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동굴인 것 같다. 한쪽에선 작게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도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추워서 몸이 떨렸다.

    마지막 기억이 되살아났다. 절벽에서 떨어졌지.

    몸이 왜 젖지 않았지? 살펴보니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있었다. 다 마른 옷이 내 몸 위에 덮여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젖은 몸이 다 마를 정도다. 쨍하던 해는 떨어지고 밤이 돼서 추운지 더운지도 알 수 없게 됐다. 다행히 추격자는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벽을 잡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걸을 수는 있을 것 같다.

    “……!”

    한 발을 내딛는데 신음이 절로 나왔다.

    오른쪽 발목이 이상했다.

    어둠 속에서 봐도 형체가 범상치 않았다. 부었나?

    발을 질질 끌면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이 동굴은 왜 이렇게 긴 걸까. 입구까지는 가는 데만도 한 세월이었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수통을 들고 돌아오던 알렉스와 마주쳤다.

    “전하! 여기까진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무리하시면…….”

    “가야 돼.”

    알렉스가 멈춰 섰다. 난 그에게 팔을 뻗었다. 비틀거리자 그는 나를 부축했다. 발목에 걸린 부하가 사라지자 좀 살 것 같았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내려가서, 말을 구해서, 나를 말 위에 묶어 줘. 팔다리는 멀쩡하니까 떨어질 것 같진 않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말이 더듬더듬 나갔다. 멍한 머리로 열심히 설명했다.

    순간 발밑이 아래로 꺼졌다. 알렉스가 나를 번쩍 안았다.

    “안 됩니다, 전하.”

    “잠깐…….”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전하께선 아프십니다. 누워 계십시오. 죽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도트 님께 요리를 배웠으니 맛이 나쁘지 않을 겁니다.”

    고생해서 걸어 나온 동굴 속으로 몸이 역행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성큼성큼 걸어서 나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놨다.

    몇 걸음 만에 원위치로 돌아왔다.

    믿을 수 없어서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지금 내가 못 가게 막겠다는 건가?

    “알렉!”

    “이틀을 꼬박 앓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틀이나 지났다고?

    “그게 중요해?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지금 내려가시면 전하께서는 쓰러지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여기서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가 막아서면 나는 나갈 수 없다. 설득해야 한다.

    “기사들이 내게 휴가를 주려고 희생한 건 아닐 거잖아. 먼저 산을 내려가자. 가서 좋은 숙소를 잡으면 열은 떨어질 거야. 치료라면 비스코티 왕성에서 받을 수 있잖아.”

    “전하 몸으로 산길을 내려가기는 무리입니다.”

    난 우겼다.

    “동굴 앞까지 잘 걸었잖아.”

    “눈의 초점도 안 맞지 않습니까?”

    “앞은 보여.”

    “추격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릅니다. 전하, 안 됩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명령이야. 그래도?”

    “……죄송합니다. 제발, 전하.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에드워드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갈게, 기다려, 하는 약간 기울어진 글씨체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에드워드가 죽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죽이고 있다.

    알렉스가 내 손을 잡았다.

    “전하. 손이 다치십니다. 치고 싶다면 저를 치십시오.”

    내가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에 힘을 풀자, 알렉스는 안도한 듯했다.

    남을 때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취미는 없다. 한차례 오른 열이 식자, 초조함에 목이 말랐다.

    알렉스가 수통을 내게 쥐여 주었다. 물을 마시자, 그는 나를 자리에 눕혔다.

    “쉬고 계십시오. 열이 내리고, 전하께서 움직이실 수 있다고 판단되면 명에 따르겠습니다.”

    “알렉.”

    난 나가려는 알렉스를 불렀다.

    “화풀이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선 제게 화를 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가끔은……. 저는…….”

    그는 입을 다물더니 나갔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난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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