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1화 (271/293)
  • 271.

    “저를 이렇게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저 남색자가 감히 왕위를 노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저는 아버지마저 등지지 않았습니까? 제 희생을 알아 달라고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충신을 대접하지 않으신다면 누가 공자를 따르겠습니까?”

    파벨은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다. 콜린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럼 조프리 왕자를 사생아로 만들어 봐.”

    “예?”

    “사생아에 남색자로 만들어 보라고. 약점이 되도록.”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인데 제가 만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명예를 아는 귀족들과 함께 당당하게 조프리 왕자를 추궁하면…….”

    “나 스스로 폐하와 왕실의 명예에 누를 끼치라는 말인가?”

    콜린은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는 조프리 왕자가 저렇게 뻔뻔한 사람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파벨이 편지 뭉치를 안고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파벨이 말할 것도 없이 콜린은 귀족들을 규합해 조프리 왕자를 쫓아냈을 터였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셔벗 귀족들을 설득했다. 파벨의 편지 공개가 오히려 조프리를 셔벗 귀족으로 만들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콜린에게 거금을 지원한 토피넛 상단의 가레스는 조프리 왕자에게 돌아섰고, 스프라우트 공작은 그 전까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전면으로 나선 듯했다.

    셔벗 왕은 조프리 왕자를 후계자 시험에 끌어들였으나, 시험 과정에서 편을 들어 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편애를 과시하고 있었다.

    항의할 수도 없었다. 셔벗 왕에게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조프리 왕자와 셔벗 왕실을 음해하고 있다는 명분이. 셔벗 왕은 왕자를 보호해야 마땅했다…….

    이 상황에서 왕자를 공격한다니, 왕의 진노를 한 몸에 받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파벨이 물었다. 콜린이 묻고 싶은 일이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 귀족들을 설득해서 왕께 고해 보래도? 성공한다면 큰 공을 세우는 셈이 되겠지.”

    “아니, 제가 무슨 수로…….”

    “못 하겠으면 나가.”

    하인들이 파벨을 끌어냈다. 그는 끌려가며 소란을 피웠다.

    콜린은 손톱을 깨물었다. 주변에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쓸모 있는 자들은 죄다 왕자가 빼앗아 갔으니까.

    조프리 왕자는 콜린이 바라던 일을 쉽게 해냈다.

    미셸은 왕자를 존중했다. 콜린을 못 미더워하는 귀족들도 왕자에게는 식견을 구하고자 했다.

    그가 공들여 끌어들인 토피넛 상단은 어떤가. 두 번째 시험을 온전히 사용해 그들을 밀어 주었는데도 왕자에게로 적을 옮겼다.

    콜린은 손이 아플 때까지 손톱을 깨물었다.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왕자를 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셸이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왕자와 결이 달랐다. 무력을 신봉하는 기사들과 변경백들, 강경한 성향을 가진 귀족들은 미셸에게 호의를 보였다.

    왕자는 온화한 인물이었다. 양국의 문제를 외교로 해결하기 위해 찾아왔고, 자국에서는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미셸과는 반대였다. 이는 콜린과 비슷했다.

    콜린은 왕자를 꺾어 낼 자신이 없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왕자는 왕가의 핏줄이라는 정통성도 계승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중시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셔벗 성을 가진 왕실이 코크나 에이드 왕조로 넘어가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자들이.

    모든 것이 왕자에게 유리해 보였다. 콜린은 판을 엎을 방법을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집사가 들어와 코크 공작의 호출을 알렸다. 콜린은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비스코티에서 답이 왔다.”

    코크 공작이 말했다.

    콜린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비스코티의 불만 세력이 그에게 협력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폐하께서 자초한 일이야. 두 공자 중 더 적합한 자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무시하지 않았느냐? 귀족들에게 다음 왕을 선택할 권리를 준다던 것도 미끼일 뿐이야. 폐하의 마음은 처음부터 조프리 왕자에게 있었어. 에이드 공작에게도 사람을 보냈다.”

    코크 공작은 명분을 말했다.

    콜린은 동의했다. 왕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미셸과 자신 중에 고른다면, 왕의 의중을 이해하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째서 선택지에도 없던 조프리 왕자에게 그가 밀려나야 하는가?

    먼저 약속을 어긴 건 왕이었다.

    왕은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왕의 충신인 그들이 왕을 바른길로 돌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조프리 왕자는 그 비싼 얼굴을 외부에 보이느라 최근 외출이 잦았다. 기회는 충분할 것이다.

    * * *

    비스코티는 다채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왕이 병환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정국을 잡은 에드워드 왕자는 수많은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어제 시장에서 습격당했다면 다음 날에는 농가를 지나다가 습격당하는 식이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의연하게 습격자들을 전부 베어 버렸기 때문에, 그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은 실감 나는 감상을 기자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누구던가? 끝이 보이지 않던 국경 분쟁을 종결지은 영웅이었다.

    비스코티인들은 왕자의 활약상을 익히 들어 왔으나 목격한 적은 없었다. 눈앞에서 본 에드워드 왕자는 정복왕 에드워드의 현신 그 자체였다.

    그가 처치한 자들이 더러운 반역자들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왕자가 무자비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반역자들은 또 누구인가? 조프리 왕자를 음해하고, 나중에는 그를 습격했던 비열한 무리가 아닌가.

    사실 반역자들과 일련의 사건들은 연관성이 크지 않았으나 시민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안에서는 에드워드 왕자가 빛나는 활약으로 반역자들을 잡아들이고, 밖에서는 조프리 왕자가 셔벗에서 스스로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광장이나 카페, 술집에서 신문을 펼쳐 놓고 두 왕자의 소식을 살피는 게 낙이었다.

    “조프리 전하께서 셔벗에 도착하자마자 셔벗 왕이 두 팔 벌려 맞이했다며?”

    “셔벗 왕이 현군이라는 칭송은 들었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전하의 뛰어남을 첫눈에 알아보고 흠뻑 빠져서 후계자가 되어 달라고 했다니까.”

    “전쟁을 멈추러 셔벗에 가셔서는 그곳의 왕이 되시다니.”

    비스코티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소식이었기 때문에, 조프리 왕자의 일은 순식간에 과장됐다.

    시민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왕자가 후계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왕자를 따라 셔벗에 넘어간 기자들은 연일 기사를 보내고 있었다.

    셔벗 사교계의 선남선녀들이 왕자를 보고 싶어서 상사병을 앓는다느니, 왕자가 셔벗에서도 비스코티를 그리워하며 ‘향수병이 생길 지경’이라고 애국심을 표했다느니 하는 기사들이었다.

    “역시 왕자님이시군.”

    시민들은 기뻐하면서도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조프리 왕자가 셔벗의 후계자가 된다면 비스코티에 방문할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장에 잠행을 나온 왕자를 모른 척하는 건 평민들의 은밀한 기쁨이었다. 앞으로 그런 즐거움은 없어지겠지.

    그러던 중 날벼락 같은 소식이 비스코티를 강타했다.

    <조프리 왕자는 왕자가 아니다?>

    <셔벗발 의혹 제기! 밀라네 왕비와 정부가 주고받은 수십 통의 편지 공개돼……>

    처음 시민들은 믿지 않았다.

    감히 셔벗인들이 누굴 모욕한단 말인가?

    그러나 증거가 공개되고 과거 셔벗 왕성에서 일한 궁인들과 귀족들의 증언이 발표됐다. 왕비의 부정은 셔벗의 잘못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면 어째서 셔벗에서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제기된단 말인가?

    비스코티는 술렁였다.

    “전하께서 우리를 속였다는 건가?”

    “그럴 줄 알았어. 귀족들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미담만 있는 귀족이 어디 있어? 어딘가 구린 게 있으니 겉으로 좋은 사람 행세를 하고 다녔겠지.”

    “내일부터 네 입으로 밥 먹기 싫으면 헛소리 계속 해라.”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왕자의 혈통은 명백히 의심스러웠다.

    왕자가 과연 그 사실을 몰랐을까?

    시민들은 의문을 느꼈다. 이는 곧 배신감과 분노가 되었다.

    조프리 왕자가 얼마나 현명한 인물인지는 셔벗인들보다 그들이 더 잘 알았다.

    비난 여론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기자들은 왕자가 직접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하께 해명을 들어야 한다.

    기사에 동조하다가 시민들은 문득 공포를 느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왕자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건, 다시 말해 비스코티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까 전하께서 비스코티로 돌아올 일은 없다는 것으로…….

    이대로 조프리 전하를 잃게 되나?

    그러던 중 북방에서 반란이 일었다. 분쟁이 종결된 국경 지역이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군을 이끌고 국경으로 향했다.

    왕자의 행방이 묘연해진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비스코티는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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