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상인이 없다면 셔벗의 어느 영지도 지금과 같은 번영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각 지역을 대표하는 자들이 저 귀족들뿐입니까?”
아니……. 이게 무슨…….
이번에는 내가 로웰을 쳐다봤다. 너 알고 데려왔어?
로웰은 사색이 돼서 고개를 저었다.
난 입이 마르는 중에도 궁금해졌다.
“콜린 코크에게도 이렇게 말했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분은 저희가 보인 성의의 대가로 훌륭한 정책을 발표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돈으로 부릴 수 있는 분임을 알았으나 신의를 지키지 않으셨더군요. 그분이 저희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책은 말했잖아?”
“그게 저희를 위해서였겠습니까? 전하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된 순간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누구도 그분의 말이 실현되지 않으리란 것은 알겠지요.”
내 말은 어떻게 믿게?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난 말을 골랐다.
“그대의 성의에 보답하는 건 폐하께서나 가능한 일일 거야.”
사람 잘못 찾았다는 말을 돌려서 하자, 가레스는 내 눈을 바로 쳐다봤다.
“예. 그러니 이 셔벗의 주인이 되실 분께 찾아온 것입니다.”
상인들의 아부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난 어떻게 믿게?”
“전하께선 저희와 같은 자들도 존중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내가 상인들을 무시한 기억은 없지만.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일걸. 원래 돈 많은 사람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무시하는 쪽이 대단한 거 아니야?
가레스가 말했다.
“전하께서는 비스코티의 시민들이 신문을 만들도록 후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셔벗의 신문을 후원한 게 저희입니다, 전하. 저희는 더 공정한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적어도 버는 사람이 버는 만큼 그대로 가져가는…….”
갑자기 알렉스가 걸음을 옮기더니 몸으로 문을 막았다.
“…….”
내가 왕자가 아니라는 소문을 신나서 퍼 나른 게 너희라고?
* * *
물론 소문의 진범이 제 발로 나타난 건 아니었다. 가레스는 내 표정과 알렉스의 행동을 인지하고 표정이 변해서 변명했다.
그는 소문과 아무 관계도 없고 그저 자금을 지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전하와 같은 뜻을 전달하는 이들이라 생각하여 도운 것입니다!”
아무래도 좋았다. 앞으로 그를 이용하는 데 죄책감은 안 느낄 것 같다.
그는 협력을 약속하고 나갔다.
“선이 닿는 대로 기자들을 수배해 보겠습니다, 전하. 제 순수한 마음을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응, 그래.”
셔벗 왕은 왕성 연회 일자를 잡고 귀족들을 초청했다. 가레스가 이끄는 토피넛 상단이 연회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몽블랑이 조력했다.
두 상단은 경쟁자가 그렇듯 본래 사이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어서, 두 상단의 합작은 여러 사람의 흥미를 끈 듯했다.
그중에는 스프라우트 공작도 있었다.
“가레스 토피넛과는 본래부터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그렇지는 않은데.”
“토피넛 상단의 지원 없이는 귀족 행세를 못 할 자들이 귀족원에 여럿 있으니 전하께서는 절대적인 지지표를 얻으셨군요.”
아, 정말?
상단주는 이미 자기 힘으로 왕을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다. 귀족원에 자리를 만든다느니 뭐니도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일단 내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콜린에게 돈을 먹였을 정도면 미셸도 지원했을 것이다. 되는 쪽을 간 보다가 갈아탈 생각인지도 모른다.
공작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지지는 없을 테지만, 난 그가 오해하도록 놔뒀다.
물건도 잘 팔리는 것처럼 보여야 살 마음이 드는 법이다.
내가 괜찮은 줄처럼 보여야 공작도 한번 당겨 줄 마음이 들겠지.
“그래. 그대가 돕는다면 더욱 그렇겠지. 폐하께서 왕성 연회를 여실 거야. 그대가 찾아 준다면 기쁘겠어.”
“폐하께서?”
“응. 일련의 일들로 내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더군. 내게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지. 나는 연회를 좋아하니 말이야.”
셔벗 왕이 나를 이렇게 아낀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자 공작은 대답했다.
“예, 전하. 물론 제가 참석해야지요.”
스프라우트 공작은 교양을 아는 사람이어서 소문을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공작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그러지 못해서 가는 길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저택을 나오자 쨍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한숨이 나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에게 난 왕이 아끼는 조카처럼 보일 것이다. 셔벗의 대상인과 스프라우트 공작이 근처에서 어른거리면 혹시 싶기도 하겠지.
내가 정말 후계자라도 되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던 사람들은 낭패를 보게 된다.
연회장에선 좀 폭군인 척하는 게 나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내게 좋은 교훈을 하나 줬다. 폭군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신하는 없다는 게 그것이다.
에드워드가 주도하는 비스코티 대전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그게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설마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셔벗 왕은 전단을 붙이고 다니던 불충한 자들을 잡아들여 감옥에 가뒀다. 한편으로 성대한 연회를 열어 나를 귀족들 앞에 소개했다.
연회에 다른 두 공작은 초대받지 못했다. 스프라우트 공작만 참석했을 뿐이다.
누군가 두 공작을 언급하자, 왕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귀족들은 눈치가 귀신같았다. 연회장이 내게 의혹을 제기할 만한 적임지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웃는 얼굴로 좋은 말만 했다.
거리의 소문은 없는 일인 듯했다. 나도 뻔뻔함으로는 누구한테 지는 법이 없는데, 귀족들의 연기력은 본받을 만했다.
얼굴에 쥐가 날 정도로 웃으며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연회가 파한 새벽에는 녹초가 됐다.
술은 내 곁에서 수행하던 알렉스와 로웰이 다 받아 마셨는데 얼굴이 홧홧하고 몸에 열이 올랐다.
긴장했던 모양이다.
셔벗 귀족들의 입은 당분간 막을 수 있겠지. 적어도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경거망동하진 않을 것이다.
몰려들어서 나를 추궁하진 않을 듯했다. 그것만으로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비스코티의 반응은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내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아서.
일단 도트부터 내 시야에 닿는 곳에서 비스코티 신문을 전부 회수했다.
‘앗, 전하. 청소가 아직이었네요.’ 하면서.
그렇게 회수한 신문들은 다 불쏘시개가 된 듯했다.
도트와 알렉스가 밖에서 불장난하는 모습을 봤다. 처음엔 이 더위에 무슨 짓인가 했다. 내가 비스코티 소식을 떠올릴 만한 물건은 치우고 보는 듯했다.
덕분에 비스코티 여론이 최악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겠지.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셔벗 귀족원은 내 자격 심사는 입에 올리지 않고 세 번째 시험 주제를 토론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내게 다시 초대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을 추렸다.
거의 매일 밤 모임에 참석하는 듯했다.
비스코티 귀족들보다 셔벗 귀족들과 더 많이 만나는 거 아닌가?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최대한 버텨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뒤는 어쩔지 아무 계획도 없지만.
그러던 중 비스코티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왕자님, 에드워드 전하가 실종되셨다고…….”
하얗게 질린 도트가 말했다.
* * *
콜린 코크는 하인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스프라우트 공작 저택을 염탐하라고 보내 놓은 하인이 뒤늦은 보고를 올렸다.
“조프리 왕자의 비서인 이델라 에클레어가 저택을 방문했습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머물다 떠났으며, 공작과 접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 로웰 몽블랑이 아니었지?”
하인이 바닥에 엎드렸다.
“저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겨 공작 저택의 심부름꾼에게 캐물어 보니, 몽블랑과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자가 저택 근처에서 가끔 목격됐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 몰래 저택을 드나든 것으로 보이는데, 차림새가 달라 저로서는 식별할 수가…….”
변명이 길었다.
콜린은 눈을 감았다. 이 쓸모없는 게…….
“나가!”
콜린이 파벨레 상송을 돌아봤다.
파벨은 공을 인정받기 위해 콜린을 찾았으나,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콜린을 찾은 사람들은 지금 조프리 왕자가 어떤 모임에 참석했는지, 그곳에 누가 초대됐고 또 누가 왕자에게 좋은 반응을 보였는지 차례로 보고하고 나갔다.
수도에서 유명한 독서 클럽의 모 남작과 그 회원들도 왕자의 연회에 참석해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듯했다.
그 소식을 듣고 콜린은 발작이라도 할 것처럼 반응했다. 파벨은 그가 클럽 소속이라는 점을 떠올렸다.
소속된 클럽의 회원들이 콜린이 아닌 왕자의 뒤에 선 것이다.
파벨은 조급해졌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 귀족들은 자존심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생아 따위를 주인으로 모시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조용히 해.”
콜린이 대답했다. 파벨은 놀라서 그를 봤다. 곧이어 분개했다. 자신을 하인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