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9화 (269/293)
  • 269.

    그 사람이 에드워드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오겠다는 거야, 대체?

    보고서를 받아 보는 게 에드워드 혼자만은 아니다. 파이 공작은 왕성에 갇혀 있느라 할 일이 없는지 내게도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내 안부를 묻고 있으니 편지라고는 해야 할 텐데, 내용의 대부분은 에드워드가 얼마나 강압적이고 제멋대로 국정을 이끌어 가는지에 대해서였다.

    난 편지에 쓴 것과 똑같이 에드워드한테 말해 보라고 했고, 답장은 안 왔다.

    왕이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일 때는 아무 말도 없더니 왜 이제 와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에드워드가 자기가 하는 헛소리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

    왕성도 못 비우는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셔벗 왕은 연락을 받고 바로 시간을 냈다. 그를 만나러 가보니 로잘린 왕비가 함께 있었다.

    “조프리 왕자!”

    그녀는 놀란 듯 외치더니 내 팔을 잡았다. 추위에 떠는 어린애 대하듯 내 팔을 쓸어서, 이번엔 내가 놀랐다.

    “왕자, 놀랐겠지요. 걱정 마요. 경비대가 이 불충한 자들의 은신처를 찾아냈답니다. 원고는 불사르고 범인들은 하옥했으니 곧 소문이 가라앉을 거예요.”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왕비 전하. 폐하.”

    난 두 사람을 돌아봤다.

    “조프리 왕자.”

    셔벗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은 빼먹으면 안 될 호칭인 것처럼 나를 왕자라고 불렀다.

    왕비님이 항상 그랬던 게 기억났다. 왕비님이 나를 조프리 왕자라고 불렀던 이유는, 내가 왕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님은 조프리를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고, 로제 부인이 에드워드에게 그러는 것처럼 애칭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조프리가 반드시 왕자여야 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말해 보렴.”

    셔벗 왕은 난처한 듯했다. 그는 모리스 상송과의 대화를 듣고 싶다는 내 지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셔벗 왕에게 다시 물어볼 일은 아니었다. 그 건이라면 더 자세히 들려줄 적임자가 있다.

    “왕성에서 연회를 열어 주세요. 핑계는 뭐든 좋아요. 최대한 규모를 키워서 소문을 내주시고, 시험에 관련된 귀족들을 초대해 주세요.”

    왕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니?”

    감당할 수 있겠냐는 뜻이다.

    내 말은 셔벗 왕에게 나를 위한 연회를 열어 달라는 거였다. 수도 귀족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고, 지지한다는 뜻을 보여 달라고.

    권력으로 소문을 덮고 혈통에 관해서 우기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겠지.

    “예. 도와주세요, 폐하.”

    “돕다니, 당연한 것을.”

    난 셔벗 왕에게 성의를 다했다. 그가 되돌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라도 그는 나를 도와야 했다. 그레이의 말대로 이건 왕실의 명예가 달린 문제다.

    “제가 조프리 왕자 곁에 있을게요. 나를 찾아요, 왕자. 연회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할게요.”

    로잘린 왕비가 말했다. 귀족들의 의혹과 무례한 시선에서 나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까지 해 달라는 건 아니었지만, 난 고개만 끄덕였다. 셔벗 왕실의 입장을 보여 주기에 그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거였다. 나한테 해될 일도 아니다.

    “조프리.”

    셔벗 왕이 나를 불렀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몇 번 두드리고 나를 놓아줬다.

    나오면서 본 셔벗 왕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를 로잘린 왕비가 끌어안았다.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면서.

    두 사람이 나에 대한 대화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이마를 문지르며 나왔다.

    두 공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난 시험이 끝나고 비스코티로 돌아갔을 것이다.

    내가 조프리였다면, 갑자기 밝혀진 출생의 비밀이 수치스럽고 충격적이어서 어딘가 틀어박혔을지도 모른다.

    셔벗 왕과 왕비에게 위로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조프리가 아니었고, 두 공작이 기대하는 것보다 뻔뻔한 인물이었다.

    내가 건너온 다리를 두 공작이 불태웠다.

    쥐도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남의 퇴로에 불을 지르면 그 불길이 자신들에게 달려들 거라는 생각쯤은 해 뒀어야 했다.

    셔벗 왕과 연회 일정을 조율하고, 스프라우트 공작에게서 왕성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내가 이델라를 스프라우트 공작 저택으로 보내자, 로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저를 보내시는 게 낫지 않나요? 공작이 망설이고 있다면 설득할 수 있을 텐데요. 그 공작은 외동딸을 아끼는 편이어서요.”

    에브니아 스프라우트가 애지중지 자란 공녀 같기는 했다.

    “아니. 공녀에게 사과하고 관계는 정리해.”

    로웰이 당황했다.

    “예? 하지만 전하. 지금 스프라우트 공작이 필요하신 거 아니에요?”

    “응. 공작과 협상할 거야. 하지만 그건 내 일이지.”

    애초에 로웰이 부담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저와 틀어지면 에브니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는데요. 독특한 성격이어서요.”

    “시간을 끌면 더 곤란해지겠지. 널 좋아하잖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상황을 봐서 정 떨어지게 만들려고 했어요. 전하 성품에 사람 감정을 이용하는 계획이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잖아요.”

    로웰은 웃으며 설득하려고 했다. 난 그가 자신하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 떨어지게 만들기 힘들겠지. 넌 괜찮은 사람이잖아.”

    “예?”

    로웰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평판이 나쁜데 인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연애관이 문란한 데 반해 사랑관은 멀쩡하기까지 했다.

    그가 ‘사랑에 냉소적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사랑을 믿는…….’ 뭐 그런 종류의 바람둥이든 아니든 나랑은 관계없지만.

    “네 인생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바쳐. 나한테 바치려고 하지 말고.”

    난 이델라에게 시선을 뒀다. 가도 돼, 라는 신호를 보내자 그녀는 두 손을 가슴에 얹었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저건 무슨 신호일까?

    “아……. 저 정말 큰일 났네요, 전하. 가슴이 두근거려요.”

    로웰이 웃었다.

    “천천히 차이고 올게요. 전하께 피해 안 가게.”

    그가 말했다.

    아니……. 너나 걱정하라니까.

    “보호대 차고 가. 칼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말해 주자 그는 다시 웃었다.

    셔벗의 대상인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그를 데려온 사람은 로웰이었다. 가레스는 나를 보더니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전하, 제가 전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상인들의 화법은 귀족들과 달라서 직접적으로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가 도와준다면 물론 좋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셔벗 상인과 내가 엮일 일이 뭐가 있지?

    문득 콜린 코크의 두 번째 시험이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상인들을 위한 정책을 주장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물어 달라고 흔들던 약점과도 관계없었다.

    물론 그가 예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앞에는 셔벗의 대상인이 있었다. 그가 가장 열세인 후보를 괜히 찾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치 뉴스가 떠오르는 게 괜한 일은 아니겠지.

    정치인들이 종종 뇌물 수수로 전파를 타지 않나?

    잘 모르는 국회의원과 잘 모르는 기업가가 검찰 조사를 받는다느니 뭐라느니 하던 게 생각났다.

    그 기업가가 의원 한 명한테만 돈을 뿌렸을 리도 없고, 의원이 한 명한테만 돈을 받지도 않았겠지.

    “콜린 코크로는 부족했나?”

    가레스에게 묻자 그의 눈이 커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가 로웰을 돌아봤다. 로웰은 고개를 저었다.

    가레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코크 공작령은 저희의 주요 교역로 중 하나여서, 관계를 끊기 어려웠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그는 부인하는 대신 변명했다.

    아, 진짜였어?

    아무래도 좋긴 했다.

    “내가 용서할 일은 아니로군. 나를 찾은 이유가 뭐지?”

    내가 줄 수 있는 건 콜린 코크가 더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 텐데. 누가 봐도 저쪽이 튼튼한 동아줄이다.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명성을 오래 흠모해 왔기에 저의 작은 도움이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된다면 그저 기쁠 뿐입니다.”

    “응. 그래. 내게 뭘 바라나?”

    로웰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가레스는 그걸 보더니 난감한 낯이 됐다.

    “나는 그대처럼 영리하지 못해서 말로 하지 않으면 몰라. 그대가 제공할 도움의 대가를 말해. 상인답게 값을 제시해. 내가 치를 수 있는지 들어 봐야지.”

    피곤해져서 말하자 가레스가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는 듣던 것과 같은 분이군요.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노여워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응.”

    “저 귀족원이라 불리는 곳에 저희의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