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전하께서는 훌륭하게 비스코티를 보호하셨죠. 홀로 셔벗으로 와서 나라를 지키고 계시는데 누가 뭐라겠어요? 전하께서 용감하고 영리하며 기사도와 인품까지 갖춘 분이라는 건 이제 셔벗의 모든 귀족이 알고 있어요. 다만 아쉽게도 너무도 비스코티인이었던거죠.”
그레이는 들고 있던 걸 내려놓았다.
-어리석은 모리스.
나를 비난하는 건 그만둬. 전부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어? 내가 떠나자마자 결혼해 버린 건 너야…….
편지 전문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물건이 탁자 위에 툭 떨어졌다.
얼핏 봐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난 그레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데 아니게 됐잖아요.”
“…….”
그는 흥분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목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져서, 괴롭게 느껴졌다.
“비스코티로 돌아가면 전하께선 위험인물이 될 거예요. 평생 전하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영지에서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 음해와 음모에 시달리겠죠. 그것 때문에 전하께서 셔벗에 남으시면 좋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이젠 정반대 이유로 전하께서 셔벗에 남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반대 이유?”
“전하께서 비스코티로 돌아가시면, 전하께서는 의혹과 희롱의 대상이 되겠죠……. 제가 그걸 볼 수 없어요.”
“…….”
“제가 참을 수 없어요, 전하.”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이기적인 요청이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그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 * *
그레이의 말을 계속 생각했다.
조프리는 원래도 정치적으로 위험인물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위험인물이 되게 생겼다.
이 경우 위험에 처한 쪽은 나였다.
일단 비스코티에서는 법적으로 죄인이다. 신분 사칭, 왕족 능멸, 기타 등등 죄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스코티 백성들은 여차하면 귀족들에게 신발도 던지고 욕도 하는 대쪽 같은 성정을 갖추고 있었다. 광장으로 끌려가서 돌을 맞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셔벗에선 법적인 처벌은 안 받나?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내가 얼마나 자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초에 불을 켜고 의자에 앉자, 도트가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왕자님, 요깃거리라도 가져올까요? 따듯한 수프라면 소화도 잘 될 거예요.”
“응.”
“빵도 드시겠어요?”
“그래.”
그것만으로 도트는 기뻐하며 나갔다. 잠시 뒤엔 알렉스가 들어와서 물병과 잔을 놓고 나를 살펴봤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복도는 소란해졌으나 신경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대충 먹으면서 그레이가 놓고 간 문제의 편지를 읽었다. 시간순대로 잘도 정리되어 있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꼼꼼한 성격인 듯했다. 한쪽의 편지밖에 없는데도 무슨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내용을 보니, 왕비님이 셔벗에 살던 시절인 듯했다. 왕비 전하가 아닌, 공주라고 불리던 시절의.
“…….”
내 편지도 아닌데 속이 술렁거렸다. 내 편지가 아니어서인지도 모른다.
예상 이상으로 정석적인 연애 편지여서, 왕비님이 이걸 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왕비님의 연애 생활까지 알 필요는 없다. 난 죽 넘겨서 마지막 장만 읽었다. 상황이 바뀌어 왕비님은 ‘왕비님’이 되어 있었다.
다 읽은 뒤에는, 입맛이 없어서 쟁반을 물렸다.
이런 게 공개됐다고?
왕비님은 견디지 못할 텐데.
마지막 편지에는 이 모든 편지를 태워 버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명령인지 부탁인지. 하여튼 상대는 따르지 않았고, 편지는 공개됐다.
다시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편지까지 끄집어내서 조프리를 공격해야 할 이유가 뭐지?
난 셔벗 왕이 원하는 대로 맞춰 줬다. 공작들에게도 밉보이지 않게 고분고분 지냈다.
세력을 만들지도 분란을 조장하지도 않았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분란이야 내가 알 바 아니고.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있던 셈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겠다는 사람을 멱살 잡아 끌어내고 있다. 패배자가 돼서 귀국하는 것도 싫고 그냥 죽으라는데…….
슬슬 화가 치밀고 있다.
날이 밝아 왔다. 도트는 내가 여전히 깨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물었다.
“비서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만나 보시겠어요?”
“응.”
그가 머뭇거렸다.
“그 전에 씻을 물을 준비할까요?”
“응, 그래.”
지금 내 꼴이 영 아닌 모양이다. 도트의 시중을 받고 보송보송해져서 나가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내가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태도 변화는 없었다. 조심하는 기색이 느껴질 뿐이다.
로웰은 옷이 구겨졌고 이델라는 잠을 못 잔 기색이었다. 그레이만이 평소와 똑같았다.
“은밀히 모리스 상송을 만나 보고 싶은데. 접촉할 수 있을까?”
로웰에게 묻자 그가 바로 답했다.
“상송 저택에 사람을 보내고 장소를 준비할게요.”
난 고개를 끄덕이고 이델라를 봤다.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한번 대화하고 싶다고 연락을 넣어 줘.”
“예, 전하.”
“셔벗 왕에게 내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요청하고.”
“예.”
그레이가 답했다.
“사신단 준비는?”
바움쿠헨 백작에게 물었는데,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분위기가 떨떠름했다.
“…….”
백작이 턱을 긁었다.
“준비는 해 두었습니다만, 전하를 두고 출발하라는 둥 하시면 안 따를 겁니다.”
“충성 맹세는 어디 간 거야?”
황당해져서 묻자, 백작이 대꾸했다.
“제 충성심이 주인을 버리고 어디 가질 못해서 말입니다.”
할 말이 없었다. 날 괜히 물었다.
“비스코티로 못 돌아가도?”
“결심하셨습니까?”
난 백작을 쳐다봤다. 방을 둘러보니 다들 말이 없었다.
그레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이미 공유된 사항이었던 모양이다.
그 계획, 실현 가능성 있다고 믿는 건가? 진심으로?
나도 달리 떠오른 대책이 없지만…….
“쥐도 막다른 길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잖아. 셔벗 공작들은 병법엔 조예가 없는 모양이야.”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백작은 황당해했다.
“전하가 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굉장히 거대한 쥐겠군요.”
무슨 뜻일까? 위로인지 뭔지 모르겠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모르겠어. 사실 아무것도 결정 못 했어. 내가 그대들을 데려왔는데 책임도 못 지고 있네.”
밤새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그레이는 새벽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았다.
침대에 틀어박혀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날 두고 갈 준비를 하라고 해도 그레이까지 듣는 척도 안 했다. 무슨 고집인지 모르겠다.
그레이가 새벽에 말하고 간 대책은 알렉스의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솔직히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 봐야지. 우겨 보자.”
망하라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
갑자기 로웰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또 전하께서 혼자 이상한 결정 하실까 봐 걱정했잖아요.”
“그럴 리 없다니까요. 이제 저희를 믿어 주시는걸요.”
이델라가 나를 변호했다. 그러는 그녀도 안도한 얼굴이었다. 팽팽하던 방 안의 공기가 한풀 느슨해졌다.
난 의아해졌다.
“……다들 못 들었어? 난 정말 왕의 친자가 아니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전하께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긴 했어요. 전 사연 있는 미인에게 약하거든요. 그게 이런 사연일 줄은 몰랐지만.”
로웰이 아무 말이나 했다. 알렉스가 말했다.
“수작 부리지 마라.”
“……그러니까 제 말은요, 어떻게든 될 거라는 거예요. 혼자 고민하지 마세요.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니까요.”
“도망?”
그레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로웰을 쳐다봤다.
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셔벗은 배편 구하기가 힘들 텐데.”
“뭐 어때요. 전하 한 분이라면 어느 상단 행렬에나 끼어도 아무도 모를 텐데요.”
“잠깐만요, 도망이라는 게…….”
그레이는 뒤늦게 이해했다.
로웰은 무슨 일만 생기면 외국행을 권하는 버릇이 있다.
지금 보니 본인이 효과를 봐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셔벗에서 공녀와 문제가 생기니 비스코티로 도망친 전적이 있다.
로웰은 한 번 겪은 일을 난 세 번째 겪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 * *
에드워드의 매는 그날 밤 도착했다.
-기다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비스코티의 사람들이나 신분 사칭이나 배신 같은, 내 속을 술렁이던 단어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