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7화 (267/293)
  • 267.

    “남의 집에 잠입해 본 적 있어?”

    “남의 집은 아니지만, 왕성이라면 잠입해 봤습니다.”

    “왕성?”

    “예, 전하. 그때 전하를 몰래 모시고 나왔고, 들키지 않았습니다. 귀족의 저택이라면 왕성보다 경계가 덜하리라 생각됩니다.”

    놀랍게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알렉스가 왕성에 잠입해서 나를 데리고 나간 과정을 생각해 보면, 어디서든 못 훔칠 게 없어 보이긴 했다.

    진짜 나 어떻게 데리고 나갔던 거지? 왕성 보안 괜찮은 건가?

    “그러게. 굉장한 걸 훔쳤네. 왕자를 훔쳐 본 도둑은 너밖에 없을걸.”

    “그렇습니까?”

    알렉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 손을 다 닦고 수건을 다시 빨고 있었다. 물기가 대야로 주르륵 떨어졌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 우스웠다.

    “‘그렇습니까’가 아니지. 일단 난 왕자부터 아니잖아.”

    알렉스는 도둑도 아니었다. 그는 날 구출했다. 예전에 소매치기를 하긴 했지만.

    “하지만 전하께서는 제게 가장 귀한 분입니다.”

    “…….”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더라도, 알렉스처럼 진실하게 들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는 내가 누가 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받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전하가 아니라니까.”

    “죄송합니다. 다른 호칭으로는 전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알렉스는 곤란해했다.

    나도 다른 호칭으로는 불려 본 적이 없다. 왕비님과 도트는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에드워드야 이름으로 부르지만.

    “편하게 불러.”

    잠행을 나가면 도트는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알렉스는 고심하더니 말했다.

    “주인님?”

    “…….”

    아니, 그건 좀…….

    “그냥 이름으로 불러.”

    “……조프리?”

    “…….”

    보통 ‘조프리 님’이라고 부르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전하. 쉬십시오.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알렉스는 뻣뻣하게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물이 가득 든 대야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촛불까지 켜고 나갔다. 엄청난 묘기였다.

    괜히 그를 괴롭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해졌다.

    알렉스는 쉬라고 했지만 쉴 수도 없었다. 머리가 멋대로 돌아갔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해서 그 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에드워드와의 약속은 지킬 수 없다.

    셔벗과 비스코티의 관계는……. 이상해지겠지.

    내가 신경 쓸 처지인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소문을 퍼뜨리는 건 두 공작 중 하나거나 둘 다일 것이다.

    목표는 조프리를 망하게 만드는 거겠고.

    “…….”

    파이 공작 때와 달리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원하는 대로 들어줄 테니 증거를 내게 달라고 할까? 그들이 내게 바라는 건 내가 재기 불능이 되는 걸 텐데, 그건 협상으로는 얻을 수 없다.

    애초에 그냥 놔두면 망할 상대를 어설프게 살려 줘서 공작들에게 득 될 게 없었다.

    소문은 이미 퍼졌다. 사람들은 이상해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억지로 막는다고 입을 다물 리 없다.

    생각할수록 답이 없었다.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눈을 감고 있다가, 하루를 내도록 잔 듯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잤는데도 피로는 풀리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문을 열어 보자 그레이가 벽에 기대서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복도는 어둡고 습한 느낌이었다. 병사들은 한 칸 떨어진 위치에서 졸고 있었다. 투구 위에서 촛불이 일렁였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전하.”

    “들어와.”

    누군가 대책을 떠올린다면 그 사람은 그레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게 직언하려면, 그 시간은 밤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수긍하지 않을 테니까.

    왕자가 아닌 조프리를 비스코티로 데려갈 순 없다.

    우긴다면 데려갈 순 있겠지만, 누구도 환영하지 않겠지.

    사신단은 나를 끊어 내면 비스코티로 귀환할 수 있다. 지금도 나 때문에 붙잡혀 있는 거니까. 그레이라면 거기까지 떠올렸을 것이다.

    “생각은 정리됐어?”

    “예, 전하.”

    “귀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반발은 예상했다.

    알렉스부터가 들은 척할 위인이 아니다. 내가 사신단에 포함시킨 사람들은 다들 좋은 사람이어서, 기꺼이 나를 지키려고 할 터였다.

    그런 사람들을 골랐다. 셔벗행이 두렵고 믿을 만한 사람이 적어서.

    난 셔벗과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출발했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됐다.

    “생각을 해 봤어요,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될지.”

    “사실이야.”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그의 질문은 의외성이 없어서 답하기 쉬웠다.

    “오래됐지.”

    “얼마나?”

    “그게 중요해?”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로제 부인이 죽고 나서였으니까. 오 년 됐나.”

    “그렇게 오래. 혼자…….”

    그레이는 되새기는 듯했다.

    어떻게 숨길 수 있었냐고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괴로워하시는 동안 저는 몰랐네요. 그때 전하 곁에는 저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항상 늦고 어리석고, 이기적이니……. 전하께서 저를 거부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난 귀를 의심했다. 그레이가 자학하고 있었다.

    “전하, 셔벗의 후계자가 되세요.”

    “…….”

    “스프라우트 공작을 끌어들이고 셔벗 왕에게 보호를 요청하세요. 셔벗 왕은 왕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소문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스프라우트 공녀와 결혼하든, 어떤 이권을 내어주든, 공작이 전하의 방패가 되게 하세요. 전하를 지지하는 자들이 전하를 보호하도록 만드세요.”

    이건 내가 생각한 대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열이 올랐다.

    “그래서? 비스코티로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 살아? 소문을 못 들은 척하고 의혹은 외면하고, 가망 없는 다툼에 뛰어들어서 또 견제당하고 의심받으며 버틸까?”

    이번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곳이 외국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의식되면서 몸이 추워졌다. 그레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요. 셔벗 왕이 되세요.”

    “뭐…….”

    점입가경이다.

    “제임스 퐁듀를 만났어요. 예의 증거를 조사해 왔던데요. 기사를 써서 비스코티로 보내겠다더군요. 어딘가 부러뜨려서 가둬 놓을까 생각했지만, 그래 봤자 소문을 막을 순 없을 테니 그냥 뒀어요.”

    대화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기숙사장을 가둬서 소문을 막을 수 있으면 그랬을 거란 소린가?

    “그 증거 혹시 편지야?”

    “예. ……아셨어요? 전하의 친부와 밀라네 왕비가 주고받은 밀서라던데요. 이게 진짜라면요.”

    “친부?”

    현실감 없는 단어다. 난 멍하니 되물었다.

    “그 사람 살아 있어?”

    어째서인지 난 조프리의 친부가 이미 죽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조프리의 출생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일 거라고.

    아니라면 왕비님이 죽었는데 모습 한번 보이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레이는 힐끗 나를 봤다.

    “예. 전하도 아는 사람이에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모리스 상송. 셔벗의 대문장가. 예전에 왕비 전하를 가르쳤다더군요. 젊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염문이 도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 실제로 예전에 두 사람이 사이좋았다는 증언도 있어서……. 셔벗 귀족들 사이에선 지금 이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탕 바구니를 안고 다니던 모리스 상송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아들이랑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인 건 비슷했지만.

    그 사람이 조프리랑 닮았나? 아니, 이게 아니라…….

    모리스 상송이 조프리의 생부면, 조프리 형제가 파벨레 상송이야?

    “중요한 건 셔벗 귀족들의 반응이에요.”

    “뭐, 다들 미쳤대?”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어이없음이 임계치를 넘어서 화도 안 났다. 에드워드보다 파벨이 조프리랑 닮았나?

    전혀 모르겠다. 조프리가 조각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살면서 에드워드를 닮은 건 로제 부인과 장인이 만든 예술품 정도밖에 본 적 없지만…….

    “분위기가 묘해요.”

    “무슨 뜻이야?”

    “밀라네 왕비는 원래 셔벗 귀족과 결혼할 확률이 높았어요. 왕비 전하와 셔벗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왕의 후계자가 되어 셔벗을 통치할 예정이었다는 거죠.”

    그레이는 배경만 말하고 나보고 알아서 추측하라고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어쨌든 알아듣긴 쉬웠다.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라는 거지. 왕비님이 셔벗 귀족과 결혼했다면 낳았을.

    “두 번째 시험에서, 콜린 코크는 전하가 비스코티인이고, 비스코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분이라는 걸 강조했잖아요.”

    “…….”

    이게 이렇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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