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6화 (266/293)
  • 266.

    그야 내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생기니까. 당연히 관련이 있지. 내 말은 대비해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소리였다.

    그레이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버리고 가라는 게 아니라…….”

    방법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 입을 다물자, 그레이가 말을 이었다.

    “셔벗 왕이 뭐라던가요? 전하. 말씀해 주세요. 대처를 해야 하잖아요.”

    달래는 어투였다. 내가 어린애라도 된 듯했다. 본인은 아는 건가?

    “……기다리라고. 소문을 퍼뜨린 주모자들을 잡아들이겠다고.”

    그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셔벗 왕가에도 치명적인 소문이니까요. 상대는 전하만을 공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셔벗 왕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거예요.”

    “금방 잡을 수 있겠죠? 왕실을 모욕한 죄인이잖아요.”

    이델라가 물었다.

    “잡을 수 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셔벗 왕이 나선 이상, 여차하면 죄인을 만들어서라도 잡아들일 테니까요. 전하. 이만한 일로 전하께 문제가 생기진 않아요. 본국에서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본국에서와 같은 일?

    순식간에 주변이 모두 적이 되고,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되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레이가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이…….

    “…….”

    있을지도 모른다.

    비스코티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바움쿠헨 백작이 팔짱을 풀고 말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극단적인 말씀 말아 주십시오. 왜 자꾸 제 간을 바닥에 떨어뜨리십니까? 저도 나이가 있어서 슬슬 건강 관리를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백작의 건강은 또 무슨 관련일까. 그가 아무 말이나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냥 들었다.

    이들은 상황을 모르고 있다. 그레이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으니까.

    “비스코티에서는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양국 왕실의 명예에 먹칠을 해 놓았는데요. 전하를 이따위 유언비어로 흔들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예. 비스코티에선 아무도 안 믿을걸요. 사람들이 화내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요. 왜 하필 이런 소재로 공격을 했을까요?”

    로웰이 전단을 읽으며 말했다. 저건 또 어디서 받아 왔는지 모르겠다.

    유언비어. 증거가 없으면, 이만한 말로 날 흔들 수 없다고.

    그 말 덕분에 머리가 식었다.

    증거는 있다.

    왜 하필 조프리의 출생으로 나를 공격했냐고? 저들도 증거 없이 이런 말로 나를 흔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데도 공격했다는 건, 이 방법이 통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머리의 열이 한층 식었다. 나는 완전히 냉정해져서 주변을 둘러봤다.

    도트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마세요.’

    난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가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실은 나도 무서웠다.

    동시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보고 전하를 버리고 가라는 소리예요?’

    그레이의 말을 듣는 순간 그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는 이미 한번 날 버렸고, 저번에도 날 셔벗에 두고 가려고 했는데도 그랬다.

    문득 알렉스가 내게 잔을 내밀었다. 안에 식은 차가 들어 있었다. 단숨에 들이켰다. 나도 몰랐는데 입이 말라 있었다.

    “아니. 비스코티에선 믿게 될 거야. 셔벗 왕도 마찬가지고.”

    “전하.”

    그레이가 내 팔을 잡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그는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라면 내 입으로 밝히는 게 나았다.

    “난 비스코티 왕의 친자가 아니야. 내 친부가 따로 있다던데. 전단 유포자에게 증거가 있어. 아마 확실한 증거겠지. 이렇게 나설 정도니까.”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대로 준비해. ……그레이.”

    “전하!”

    그레이가 이성을 잃고 외쳤다.

    그가 느끼는 게 배신감이든 뭐든 난 받아 줄 상태가 아니었다. 눈 떠 보니 이 몸에 들어와 있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남의 출생까지 선택하라는 말이야?

    내가 꼬아 놓은 관계를 정리하는 것만 해도 한계였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밖에서 문이 쿵쿵 울렸다.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이보세요…….”

    “전하께서 날 찾으실 거라니까! 전하! 저 제임스입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일 못하는 병사들이 또 누굴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상대가 기숙사장이어서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게 내가 일을 맡긴 적이 있어서 기숙사장은 여기 몇 번 드나들었다. 병사들이 칼같이 잘라 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가 봐.”

    난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도트와 알렉스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들도 내보냈다.

    잘못 엉킨 실타래처럼 머리가 엉망이었다.

    기숙사장이 왜 찾아왔을까. 알 것 같았지만 그냥 들여보냈다.

    봉투에 나쁜 소식이 들어 있다는 걸 알면, 그걸 열어 보는 사람도 있고 영원히 열어 보지 않고 서랍 깊은 곳에 숨겨 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 중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남들이 찾아와서 모든 봉투를 열어젖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마지막 경우였다.

    기숙사장은 흥분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서야 의복을 정제했다.

    이미 흐트러진 꼴을 본 뒤라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옷이 잔뜩 구겨지고 먼지투성이인 게 집에서 나온 모습은 아니었다.

    “누구한테 맞았어?”

    “예? 경비병에게 잠깐 끌려가서……. 별일 아닙니다! 그보다 전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별일 같은데. 내가 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만.

    “무슨 소식? 나에 대한 소문이 셔벗 수도 전역에 퍼졌다는 소식이라면 들었어.”

    “그겁니다! 알고 계셨군요! 전하, 바로 반박 기사를 쓰겠습니다. 셔벗 기자는 이런 터무니없는 걸 기사랍시고 쓰다니…….”

    “기사?”

    난 이마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기숙사장이 분개해서 말했다.

    “예! 제가 이곳에서 신문을 만들겠다고 준비하는 무리를 만났는데, 그자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정치놀음에 이용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랬다면 저희의 노하우를 전수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잠깐. 기사라면 이게 셔벗 전역에 퍼진다는 소리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비법을 전수했으니…….”

    망하는 데는 여러모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미래가 진창에 박히는 데는 수가 없었다.

    기숙사장의 말을 들어 보니, 전단은 기사의 일부를 떼어서 벽에 붙인 거라는 듯했다.

    그리고 문제의 기사는 여러 경로로 수도 성곽을 넘어 셔벗 전역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

    대처 방법이든 뭐든 아무것도 안 떠올랐다.

    내 예상보다 더 빨리 비스코티에도 알려지겠네.

    “전하께서 해명하시면 기사에 실어서 반박하겠습니다. 비스코티에도 알리고, 셔벗에도 최근 비스코티의 신문이 대유행 중이니…….”

    기숙사장은 열심히 반박 기사를 낼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난 머리가 아팠다.

    “내가 해명하면 그대로 싣겠다고?”

    “예? 전하, 저는 그게…….”

    “호의는 고마워. 취재에는 못 응하겠는데. 기사를 내든 말든 알아서 해. 조사도……. 네가 기자잖아.”

    난 그를 내보냈다. 기숙사장에게 화풀이할 필요는 없겠지.

    어용 언론인인지 그냥 가십지 기자인지 헷갈리는 기숙사장은 아무튼 나를 돕겠다고 찾아온 듯했다. 그도 곧 조프리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비스코티 전역에 뿌리게 되겠지만.

    혼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창밖이 어두워졌을 무렵,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왔다.

    알렉스였다.

    대화를 주고받은 상대는 도트일까.

    누가 몰래 들어가서 잠든 내 시중을 들지 논의라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깨어 있는 것을 보고 알렉스는 놀랐다.

    나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그가 갑자기 ‘나를 속이다니’라며 화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뒤에 서 있지 않은 알렉스는 거대했다. 그냥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을 수그리자, 그 거대한 몸이 내 시야 밑으로 내려갔다.

    물이 찰랑거리는 대야에 수건이 걸쳐 있었다.

    그는 수건의 물을 쭉 짜더니 내 이마를 닦아 주었다. 닦아 낸 곳에 바람이 닿자 피부가 시원해졌다.

    열 오른 몸이 식었다.

    땀을 흘리진 않았는데.

    오늘이 더웠는지 추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름이니 더웠겠지.

    손을 펼치자 식은땀이 흥건했다.

    알렉스는 내 목을 닦아 준 뒤, 내 손바닥도 가져가서 꼼꼼히 닦았다. 커다란 손이 잘도 섬세하게 움직였다.

    평소처럼 시중드는 태도였다.

    난 궁금해져서 물었다.

    “뭐 안 물어봐?”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든지. 언제부터 속였냐든지. 왜 말 안 했냐든지.

    알렉스는 내 손을 쥔 채 머뭇거렸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제가 증거를 훔쳐 올까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난 잠시 뒤에 그 말을 이해했다.

    “뭐를? ……뭔 줄 알고?”

    “중요한 물건이라면 거처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을 테니, 누가 숨겼는지만 알아내면 제가 훔쳐 오겠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말하는 듯했다.

    저게 가능한 건가?

    아니……. 가능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서.

    다른 건 안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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