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5화 (265/293)
  • 265.

    성을 가로지르는 동안 방해는 없었다. 셔벗 왕이 보낸 기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서, 누가 나를 가로막았대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심장이 계속 뛰었다. 언제부터 두근거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주변 건물들이 심장 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흔들리는 건 나일지도 몰랐다. 내가 멀쩡히 걷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신경이 곤두선 채 집무실에 도착했다. 내가 들어가자, 셔벗 왕은 들고 있던 전단을 내리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을 내보냈다.

    “조프리 왕자.”

    “거리에 붙었다는 선전이 그거예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뜸 묻자, 셔벗 왕은 일축했다.

    “읽을 가치도 없는 물건이야.”

    “주세요. 읽고 싶어요.”

    “조프리 왕자…….”

    난 손을 내밀었다. 셔벗 왕은 들고 있던 전단을 넘겨줬다.

    받아 드는데, 손이 떨려서 잡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허공을 헤매다가 간신히 얇은 종이를 잡아챘다.

    조악한 조판으로 찍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밀라네 공주의 외도!>

    <사생아 왕자 조프리 - 부정의 증거 발견!>

    “걱정하지 마라. 전단 유포자를 잡아들이고 출처를 추적하고 있어. 함부로 입을 놀린 자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하마. 감히 공주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다니. 감히…….”

    셔벗 왕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내가 바르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증거는요?”

    “증거?”

    “여기, 부정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 조프리 왕자. 조프리!”

    셔벗왕은 내 어깨를 잡았다. 강한 힘이 가해져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소파에 주저앉은 뒤에야 내가 지금까지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앉은 채로도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몸에 피가 돌지 않았다.

    이렇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고?

    파이 공작도 입을 닫았는데, 비스코티도 아닌 다른 나라에서?

    “증거는 없다! 밀라네는 의무를 아는 아이였어! 네가 네 어미를 믿지 못하느냐?”

    셔벗 왕은 속이 상하는 듯했다.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뒤늦게 인식했다. 이 사람은 모른다. 왕비님은 자신의 형제에게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조프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최악의 상황에서 비밀을 들었고, 그 순간에 그런 얘기를 한 왕비님을 원망했을지언정 다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때 비밀이 밝혀져서, 내가 비스코티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될 상황에 처하는 순간 같은 건.

    돌아가지 못한다.

    내가 비스코티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언제부터 이런 전단이 붙은 거죠? 어디에?”

    “밤사이 붙이고 간 것 같구나. 수도 곳곳에 붙어 있는 걸 병사들이 수거해서 불태우고 있단다.”

    난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

    밤부터 붙어 있었다면, 이미 수도의 모든 사람이 읽었을 것이다. 낮까지 자는 건 팔자 좋은 귀족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셔벗 왕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병사들을 동원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새벽부터 활동하는 평민들은 그 전에 다 읽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 사람이 알면, 열 사람이 아는 건 순식간이다.

    병사들이 전단을 치운다고 소란을 피웠다면 더 관심을 부추겼을 것이다.

    망했네.

    머리가 식었다.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은 건 아니겠지! 네가 그러면 안 돼. 주모자를 처벌해 밀라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마.”

    “배후가 두 공작이라면요?”

    이렇게 대규모로 일을 벌였다면 배후는 두 공작 중 하나다.

    왕은 공작들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나 때문에 공작을 잡아들일 것도 아니잖아.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왜?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공격할 바에야 다른 상대를 공격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가장 약한 경쟁자를 공격해서 어쩌려고? 영원히 레이스에 올라오지도 못하게 탈락시키려는 건가?

    그럴 거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어야지!

    그랬다면 나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예외는 없어. 너를 무사히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잖니.”

    셔벗 왕은 여전히 내 어깨를 잡고 있었다.

    왕의 약속이다. 정신없이 뛰던 심장이 제 속도를 찾았다.

    괜찮을까?

    증거만 없다면, 악의적인 비방으로 취급할 수 있다.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곤란한 듯한 시종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폐하. 모리스 상송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반드시 지금 폐하를 뵈어야만 한다고…….”

    “기다리라고 전해라.”

    “폐하! 조프리 전하에 대한 일입니다. 아셔야만 합니다!”

    모리스가 외쳤다. 그가 다급해하는 목소리는 처음이라 나는 조금 놀랐다.

    필리프 왕이 나를 돌아봤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과 관련된 일인가?

    모리스는 새하얗게 질려서 들어오더니,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폐하…….”

    “말해 보게. 무슨 일인가?”

    “폐하, 잠시……. 폐하께만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난 필리프 왕에게 재빨리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함께 듣고 싶습니다. ……부탁드려요.”

    필리프 왕의 눈이 커졌다. 그는 목을 가다듬더니, 모리스에게 명령했다.

    “왕자의 일이라면 함께 들어도 되겠지. 말해 보게.”

    모리스는 견딜 수 없는 듯했다. 그럴수록 불안해졌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눈을 감았다.

    “폐하.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이 사태의 책임은 어리석은 신에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자들의 손에……. 공주님의 편지가 들어간 듯합니다.”

    * * *

    셔벗 왕은 표정이 변해서 나를 내보냈다. 문이 닫히고 나는 복도에 남겨졌다. 왕의 기사들이 다시 나를 둘러쌌다. 방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왕비님의 편지가 주모자들에게 있다.

    그게 증거가 된다?

    속이 메슥거렸다.

    모리스 상송은 한때 왕비님을 가르친 적이 있다. 플랑베 부인은 왕비님이 갓 비스코티에 왔을 때 몹시 외로워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적인 사제 관계 이상으로 끈끈했다면.

    왕비님은 모리스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왕의 사적인 장소를 벗어나자마자 알렉스가 다가왔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자, 알렉스는 의아한 듯 내 앞으로 왔다.

    남의 일일 땐 그렇구나 싶었다.

    조프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애였는데도 열등감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런 성격으로 자랄 만한 배경이라고 생각은 했다. 비스코티 왕성에서 자라면 멀쩡한 애도 이상해질 테니까.

    하지만 불안감의 근원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조프리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건 캐릭터 설정일 뿐이었다. 한순간에 서 있는 위치가 변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변하는 상황 같은 건 상상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어?”

    “예. 전하께서 돌아오셔서 명령을 내려 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감히 전하를 모욕한 자들을 잡아들이겠습니다.”

    알렉스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옳지 않았다.

    저 전단에 담긴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알렉.”

    “예, 전하.”

    알렉스는 의심 한 점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전하’라고 불러서, 내가 얼마나 그 호칭에 익숙해져 있는지 깨달았다.

    방으로 돌아가자, 나가기 전과 다름없는 인원이 안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왕비 전하는 셔벗의 공주인데요? 전하를 깎아내리려면 이런 극단적인 소문이 아니라…….”

    “……전하께서 왜 이런 괴로운 일을 당하셔야 하는 거죠? 돌아가신 분을 모욕해 가면서까지…….”

    서로 주고받던 말이 내가 들어가자 사라졌다.

    “전하, 괜찮으세요? 안색이…….”

    “셔벗 왕이 뭐랍니까? 설마 전하께 책임을 돌리진 않았겠죠.”

    “셔벗 왕실에서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일 텐데요. 왕실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요. 일단 사신단 이름을 걸고 정식으로 항의해 둘게요.”

    다들 한 마디씩 해서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은 순식간에 시장통으로 변했다.

    누구도 선전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조프리는 이들에게 당연히 왕자였다.

    바움쿠헨 백작은 왕자인 내게 충성을 맹세했고, 다른 사람들은 내 요청을 받고 사신단에 합류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건방진 생각이었다.

    후계자 분쟁에 휘말렸을 때부터 그랬지만, 나는 이들을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끌고 들어왔다.

    비스코티 사람들은…….

    ‘왕자 전하’라며 조프리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적어도 받은 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셔벗과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까지는 내가 해야 한다고.

    전쟁 낼 뻔했다가 외국 나간 왕자가 사실 왕자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면, 비스코티 사람들은 잘도 행복해할 것이다.

    배신감을 느끼겠지.

    가슴뼈 아래가 지끈거렸다.

    조프리의 혈통 문제는 아직은 논란이었다. 하지만 증거가 저쪽에 있었고, 곧 사실로 밝혀질 거였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에 사신단까지 끌려 들어가게 할 순 없었다.

    “전하?”

    그레이가 불렀다. 예민한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 찡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레이는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할 필요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도트. 문 잠가 줘.”

    “왕자님…….”

    도트는 아까부터 불안한 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 방에서 유일하게 조프리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할 말이 있어.”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라면 이들이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게 해야 했다.

    “나 없이 비스코티에 돌아갈 준비를 해 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방이 조용해졌다.

    “말 그대로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령 내가 없더라도 사신단 일정에 차질이 없게 해 둬. 내게 무슨 문제가 생겨도 너희는 관계없는 거야.”

    순간 그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하. 분명히 말씀해 주세요. 무슨 말씀을 들으신 거예요? 전하께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그게 저희와 관련이 없어요?”

    “…….”

    나는 조금 멍해졌다.

    “저희보고 전하를 버리고 가라는 소리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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