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4화 (264/293)
  • 264.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시간은 금방 끝났다. 왕성에 도착하니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전하. 이 미천한 상인에게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부유한 차림의 남자였다. 자기소개가 아니라도 그가 상인이란 걸 알겠다.

    로웰이 남자를 보고 놀랐다.

    “가레스 토피넛!”

    “누구야?”

    “토피넛 상단주. 셔벗의 대상인이에요.”

    그런 사람이 왜 날 찾아오는데?

    가레스가 고개를 숙였다.

    “전하. 긴말 올리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 * *

    파벨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조프리 왕자가 셔벗 후계자가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면서 미셸과 콜린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은혜도 모르는 미셸은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파티에 너를 대동하라고? 너를?’

    이 모욕적인 반응에는 파벨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미셸이 어울리는 무리들은 단순하고 소란스러워서, 파벨 같은 귀족들과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는 기사가 싫었다!

    파벨은 콜린에게 연락을 넣었으나 집사를 통해 바쁘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미셸을 아주 버리고 갈아타야 하나? 하지만 그런다고 콜린이 자신을 받아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파벨은 권력의 향방을 좇느라 골치가 아팠다. 그러던 중 전에 어울리던 무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파티에 참석했으나 즐겁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놈들과 어떻게 어울렸을까?

    이제 그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곳에 있었다. 권력의 중심에는 다가가지도 못한 채 놀고 있는 한량들과는 급이 달랐다.

    파벨의 속내도 모르는 친구들은 헛소리나 하고 있었다.

    “왕자 전하 초대할 수 없냐? 너 같은 아카데미 다녔잖아.”

    “쟤가 무슨 수로 왕자 전하를 알아?”

    “그러게.”

    킬킬거리는 놈들을 파벨은 한심스레 쳐다봤다.

    “네놈들이 조프리 왕자를 알아?”

    “너는 아냐?”

    “또 시작이네.”

    아무것도 모르니 속 편해서 좋을 것이다.

    조프리 왕자는 향수병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파티 참석도 피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셔벗의 귀족들은 전부 몸이 달아 있었다. 그가 처음 참석한 스프라우트 공작의 파티엔 온갖 군상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왕자는 교활하게도 스프라우트 공작과 접촉하고, 물밑에선 중립 성향의 귀족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를 초대해 사교계의 강자로 떠오를 귀족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 왕자다운 행보였다. 파벨은 왕자의 정체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말했다.

    “조프리 왕자가 얼마나 속내가 검은지 나밖에 눈치채지 못했을걸. 너희는 운이 좋아. 내가 아니었으면 왕자의 마수에 걸려 허우적거렸을 놈들을 구제해 줘야겠군.”

    파벨은 취해서 떠들다가 한밤중에 마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의 서재로 끌려갔다.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지 말라지 않았느냐! 너는 한번 말하면 알아듣지를 못하는구나. 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러느냐?”

    파벨은 아버지야말로 누구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조프리 왕자에 대해 좀 떠들고 다녔다고 이렇게 자식을 핍박한단 말인가?

    하지만 모리스는 파벨을 서재에 가둬 버렸고, 파벨은 아버지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밖에 누구 없냐? 집사! 문 열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사용인은 달려오지 않았다.

    파벨은 열이 올랐다.

    그는 마음을 접고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예비용 열쇠라도 있을지 모른다. 나가면 가장 먼저 사용인들을 족치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모든 서랍을 다 열어 봤다.

    “이건 또 뭐야?”

    그는 잠긴 서랍을 발로 차서 열었다가, 그 안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목재로 만든 고급스러운 상자였다. 파벨이 상자를 열자 안에서 편지 뭉치가 후드득 떨어졌다.

    수신인은 모리스 상송.

    발신인은…….

    밀라네?

    그게 누구지?

    ……밀라네 공주!

    “……!”

    파벨은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 * *

    “전하께서 이 나라에서 행하시려는 일에, 저 귀족들보다 저희가 도움이 될 겁니다.”

    가레스가 말했다. 그는 상인답게 풍채가 좋고 달변이라는 인상이었다.

    사실 상인이라면 눈치도 빠를 텐데. 난 의문이었다.

    “내가 이 나라에서 하려는 일이 뭐지?”

    “전하께서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동정심이 깊고, 공정한 눈으로 다른 이들을 보는 분이시지요. 전하께서 귀족들에게 섣불리 손을 내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전하께서 꿈꾸는 세상에 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아부인가? 헷갈렸다.

    “아, 그래. 고맙군. 나를 왜 찾아왔지?”

    “저희는 전하께 방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저는 보시다시피 힘없는 상인입니다. 그러나 고귀한 분들도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제 하찮은 능력이 전하께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몽블랑 상단이 대단하다 하나, 이 나라에서는 제가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제 동료들이 전하를 돕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공손하게 몸을 낮추는 데 비해 말은 자신감이 넘쳤다.

    내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난 도움이 필요 없었다.

    “나를 도우면서 그대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그렇군. 그대는 돌아가는 게 좋겠어.”

    “예?”

    가레스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이유 없는 행운이 찾아올 만큼 훌륭한 인생을 산 기억은 없군. 상인이 이득 없이 움직인다는 얘기도 들어 본 적 없어. 그대가 내게 무엇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나는 그대에게 줄 생각이 없어. 그러니 이만 가 보는 게 낫겠다는 말이야.”

    축객령을 내리자 도트가 문을 열었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레스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내게 물었다.

    “전하, 저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십니까?”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상인 연합이거나 뭐 그렇겠지.

    내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일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왔나? 귀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게 상인들에게 호의적이라는 의미가 되진 않을 텐데.

    콜린이 훨씬 호의적일 거라고 알려 주고 싶었지만, 괜한 참견인 것 같아 그만뒀다. 알아서 하겠지.

    가레스는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하더니, 이내 도트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

    소식이 늦은 상인이다. 늦을 거면 차라리 며칠 뒤에 찾아오면 좋았을 텐데. 귀족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나왔는지도 좀 듣고.

    어쨌든.

    셔벗의 대상인도 무사히 돌려보냈다. 조프리의 지지 세력은 전혀 없고, 시험 평가는 엉망이다. 방금 전에는 조프리가 너무나도 ‘비스코티인’이라는 도장까지 찍혀 버렸다.

    조프리의 회생 가능성은…… 없다.

    옅은 두통이 가시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피곤했던 모양이다. 알렉스는 내가 하품하는 모습을 보더니 오늘 운동을 빼 줬다.

    “왕자님, 푹 쉬세요. 고생하셨어요. 내일은 깨우지 않을 테니까요.”

    “예, 전하. 쉬십시오.”

    도트는 잠 오는 차를 내왔고 알렉스는 내 어깨를 주물렀다.

    혈액 순환은 잘 되는 것 같다.

    노력은 고마웠지만 지금 잘 생각은 없었다. 난 두 사람이 방을 나간 뒤에도 뜬눈으로 밤까지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회갈색 깃털을 가진 매가 창가로 날아들었다.

    매는 애교스럽게 내 손끝을 깨물었다. 매끄러운 깃털을 슬슬 쓰다듬어 주고, 난 에드워드에게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곧 돌아갈게.

    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참았던 피로가 쏟아졌다.

    하품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간만에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다. 눈을 뜬 건 가까이서 느껴지는 소란 때문이었다.

    “……그레이?”

    “전하.”

    그레이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햇살이 눈을 찔렀다. 벌써 낮인가?

    “무슨 일이야? 침실까지 찾아오고.”

    오래 잔 탓에 머리가 아팠다. 내가 일어나 앉을 때까지 그레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돌아보니 로웰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움쿠헨 백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굳은 얼굴이었다.

    “……전하. 소식 들으셨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드워드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비스코티에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지금 비스코티를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전하.”

    그레이가 말했다.

    “전하께서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선전이 셔벗에 돌고 있어요.”

    “뭐?”

    찬물을 맞은 듯했다. 잠기운이 깨끗이 사라지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셔벗 왕의 시종이 알렸다.

    “전하.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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