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3화 (263/293)

263.

농담이지?

사람 대하기 불편해하던 콜린의 태도와 대기실에서 과도하게 긴장하던 모습이 연달아 떠올랐다.

얘는 대체 왜 이 시험을 수락한 거지?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이어서 해답도 떠올랐다. 그가 수락하지 않아도, 미셸 쪽만 설득됐다면 시험 종목은 정해진다.

미셸은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나를 보내려고 적극적으로 귀족들을 밀어붙였대도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이거였다.

콜린이 이대로 쓰러져서 실려 나가고 두 번째 시험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셸은 멍청이로 낙인찍히고 콜린은 정신이든 몸이든 어딘가 문제가 있는 애처럼 비칠 것이다.

최악의 결과였다.

주변이 약간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미셸을 보느라 정신 팔렸던 귀족들이 콜린의 이상을 알아차린 듯했다. 가까운 자리에 앉은 귀족들만 그런 듯했으나, 동요가 퍼져 나가면 모두 알아차리는 건 순간이다.

다른 수가 없었다. 난 몸으로 방청석을 막아 콜린과 귀족들 사이를 차단했다.

“정신 차려. 지금 너 아무도 안 봐. 숨 쉬어.”

빠르게 말하자 콜린이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다, 다음…….”

지금 네 차례가 문제야?

문제긴 했다. 난 콜린에게 좀 더 붙었다.

“다 미셸을 보고 있어. 필리프 폐하께서도 걔한테 화내느라 바쁘실걸. 네 순서 멀었어. 괜찮아. 숨 쉴 수 있어?”

“…….”

콜린이 숨을 쉬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등이 들썩였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점 없던 눈이 나를 봤다. 파랗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됐나?

“왜…….”

콜린의 입술이 달싹였다.

네가 예뻐서 도운 거 아니다. 난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순서가 멀었다고 말해 뒀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셔벗왕은 미셸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콜린.”

심지어 왕은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회장은 아주 조용했다. 이 분위기에서 방금 전까지 떨던 사람이 발표할 수 있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콜린은 침착하게 준비해 온 말을 시작했다.

“……상인들은 늘 불만이 많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나, 이들의 불평은 들어 볼 만하다 생각됩니다. 옆 나라 비스코티에서 무서운 기세로 대외 교역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동방 교역을 통한 이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 셔벗에서 유행하는 기물들도 비스코티 항구를 통해 유통되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이득을 비스코티가 독점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콜린은 대외 교역을 장려하는 방안으로 관세를 낮추고 항구의 치안을 강화하며 새 교역로를 찾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난 듣자마자 내가 괜한 준비를 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준비 잘해 왔잖아.

관세를 낮추자는 건 상인들을 위한 정책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콜린은 교역량이 늘어나면 오히려 걷을 수 있는 세금은 많아질 것이며, 또 상인들이 시장에 도달하기 위해 육로를 이용해야 하는 만큼 각 영지에서 걷을 통행료로 늘어날 것임을 상기시켰다.

“……왕비 전하께서 최근 열 개의 구빈원을 새로 여시며 자선에 힘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셔벗에는 의무를 아는 명예로운 귀족들이 많으니, 또 이 소득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쓰이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에게 자선 행사에 돈 좀 쓰라는 뜻이다.

물론 기부금은 강요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 귀족들은 내는 시늉만 해도 충분했다.

이렇게 해서 콜린은 내가 하려던 주제도 가로챘다. 왕실의 체면을 살리고 귀족들의 실리도 챙기는 방식으로.

누구 전략일까? 훌륭하다.

듣기로는 다 좋은 말이었다. 문제는 그 교역 확대 자체였다.

내가 교역에 대해 알 리가 없었지만, 투자 때문에 대충 들은 바가 있었다. 배 타고 먼 길 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새 항로를 찾는 거라면 천문학적인 돈만 쓰고 아무 성과도 못 낼 수 있었다.

내가 그랬어야 했는데.

셔벗왕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훌륭하군! 하지만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만한 비용을 상인들이 댈 수 없을 텐데?”

“예. 그리하여 폐하의 은혜를 청합니다. 여기 있는 조프리 왕자가 이미 비스코티에서 상인들을 후원해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상당한 비용이 들겠지만, 비스코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셔벗에서 못 하겠습니까? 물론……. 비스코티에서 우애를 보인다면 불필요한 지출과 희생이 줄어드리라 생각됩니다.”

콜린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

아, 비스코티에서 이용하는 항로를 공개하라고?

제정신인가?

대단히 뻔뻔한 요구라 관객석도 웅성거렸다. 그러나 곧 조용해졌는데, 내 대답을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스프라우트 공작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역시 조프리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좋다는 대답을 하면, 비스코티 대신 셔벗의 편을 들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난 콜린에게 번번이 감탄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왜 몰랐지?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백성들에게 동정적이라 귀족들에게 해가 될 만한…….’ 뭐 이런 이미지 메이킹을 하지 않아도, 내겐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나 비스코티인이잖아?

그리고 비스코티인이라면 여기서 절대 항로를 내줄 리 없었다.

“좋습니다. 양국의 우애를 위해서라면 항로가 아깝겠습니까?”

난 일단 대답했다. 저쪽에서 ‘우애’씩이나 언급했는데 내가 못 써먹을 이유가 없다.

몇몇이 신음했다. 관객석에서 전체적으로 놀란 소음 같은 것이 들렸다.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셔벗에서도 물론 상응하는 우정을 보여 주시겠지요. 신항로는 상인들과 비스코티의 용감한 선원들이 목숨을 걸고 뚫은 길입니다. 필리프 폐하께서는 그 가치를 모르실 분이 아니니까요.”

각오가 됐냐는 소리다.

신항로의 대가로 뭘 받아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신항로의 필요성을 연설한 사람은 콜린이니 알아서 할 것이다.

“그렇군. 우애의 대가라. 콜린,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애에 대가를 바라는 일에 대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씀이십니까?”

콜린은 악간 더듬거리면서도 날카롭게 반문했다.

그런 맥락이라면 나도 할 말은 많았다.

“우애를 증명하기 위해 저는 셔벗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

콜린은 입을 다물었다.

비스코티를 위협해서 나를 부른 사람은 셔벗 왕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셔벗 왕을 공격하는 꼴이 된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다른 귀족들도 떠올린 모양이었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까먹었나? 일이 많긴 했다.

아무튼 귀족들에게 난 비스코티인으로 보이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귀족들은 아주 시끄러워져서 왕이 정숙을 명령해야 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왕실이 앞장서 구빈 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코크 공자의 말에 전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백성들을 살찌우는 것이 왕가에 속한 사람의 의무일 텐데, 제 생각은 대안이 없이 얕기만 하지 않았나 반성을…….”

대충 준비해 온 말까지 마치자 시험이 끝났다. 콜린이 잘해 줘서, 사실 내 의견을 말하는 척하면서 그를 칭찬하기만 했다.

왕은 콜린에게 그랬듯 내게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제대로 듣는 사람도 없었다.

정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귀족들은 건물을 나갈 때까지 시끄러웠다. 조프리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경우 내게 좋은 쪽이었다. ‘조프리 왕자를 이 나라 후계자로 세우는 게 옳은 일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테니까.

두 공작이 처음부터 노렸던 논란이었다. 내가 땔감도 던져 줬으니 잘 타오를 것이다.

“어떻게 되셨어요?”

마차로 돌아가자 그레이가 물었다.

난 잠깐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져 본 적은 별로 없지만, 이번 시험을 평가하자면, 솔직히 말해서…….

나 엄청 잘하지 않았나?

한순간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들었다.

“잘했어.”

“정말요?”

“응. 기대 이상으로.”

“왕자님이 하시는 일인데 당연하죠!”

“훌륭하십니다, 전하.”

도트와 알렉스가 맞장구쳤다.

그건 아니고. 콜린의 활약이 컸다.

양국의 우정이니 뭐니 하는 소리도 오갔으니 귀국하기 전에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이 나라가 전쟁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비스코티 귀족들이 믿을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게 만들었으니, 역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 협정 받아 내야지.

그래야 반란을 꾀하는 이들도 에드워드를 덜 괴롭힐 거고…….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귀족들 반응은 예상대로였나요?”

그레이가 물었다.

“응, 그게…….”

내가 상황을 설명하자 마차 안은 왁자지껄해졌다.

“와아, 에이드 경. 그분 조금도 도움이 안 되네요!”

“처음부터 미셸 에이드는 그런 놈이었습니다.”

“미셸 본인은 그렇다 치고, 에이드 공작이 그런 헛소리를 하게 놔두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로웰이 의아해했다.

“공작도 예상했던 발언은 아닌 것 같아.”

첫 번째 시험에서 미셸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그를 미는 쪽이 에드워드의 장래에도 좋지 않을까 했는데 오늘 보니 글렀다.

모시는 왕이 좀 멍청한 쪽을 선호하는 귀족들도 많으니 지지층이 와해될 것 같진 않지만.

“그보다 항로라니. 비스코티를 정말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고서야…….”

그레이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응. 진심으로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차하면 진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곤란했다. 비스코티의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항로를 알려 달라고 하면 ‘싫습니다’ 할 배짱이 있을까?

없을 것 같다.

비스코티는 옆 나라가 크는 동안 뭐 한 걸까?

“좀 노력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봐, 크래커 공작.”

“그게 전하께서 하실 말씀이세요? ……같이 돌아가실 거잖아요. 가서 함께 만들면 되겠네요. 부강한 나라.”

그레이는 짜증을 내는 듯하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데 귀만 빨갰다.

“…….”

농담이었는데…….

이델라가 갑자기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가 났다.

무심코 쳐다보자, 그녀는 변명했다.

“조금 더워서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더 신경 쓰였다.

그녀 옆에서 로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덥네요. 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네? 아하하. 일은요.”

“있었던 것 같은데요. 생각도 못 한 일이. 저도 들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전하 앞입니다. 잡담은 다른 곳에서 하세요.”

그레이가 말하자 로웰은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네, 각하.”

로웰이 나를 쳐다봤다. 그가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괜히 켕겼다.

그는 눈치가 귀신같았다. 뭔가 알아챘나?

왜 내가 긴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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