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2화 (262/293)

262.

시험이 치러지는 귀족원 건물은 왕성 외부에 있었다. 후보자 개인의 능력을 보겠다고 해서 보좌관은 동행할 수 없었다.

귀족원 건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우리는 계획을 점검했다.

“셔벗 귀족들의 반감을 살 필요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구휼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는 논지를 유지하세요. 중요한 건 전하께서 결정적인 부분에서 귀족들과 충돌할 거라는 신호를 주는 것뿐이니까요.”

“응, 그래.”

“왕자님, 여기 따듯한 차예요. 보온병에 담아 놨으니 중간에 갈증이 나시면 꼭 드시고요.”

“응.”

“전하, 어깨가 굳었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악! 고마운데, 좀 살살 주물러도 될 것 같은데…….”

도트가 주는 대로 차를 마시고, 알렉스에게 주물러져서 긴장도 풀었다.

왕은 후보자들을 위해 호위가 포함된 육인승 마차를 내어줬다. 비서들이 전부 앉아도 자리가 남는 마차였다.

말 여섯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주변에는 왕의 병사들까지 끌고 가려니 이목이 안 모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몰려들어서 행렬을 구경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이델라가 창문 커튼을 걷더니 감탄했다.

“와, 전하. 제 눈이 이상한가 봐요. 비스코티에서 많이 보던 사람들이 보여요.”

“뭔데?”

그녀가 자리를 비켰다. 창밖으로 수첩과 펜을 든 후줄근한 사람들이 보였다. 병사들 일부가 그들을 막느라 대열을 이탈해 있었다.

“우우! 횡포다! 언론의 자유를 막다니!”

그 한가운데서 기숙사장이 큰소리로 항의하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었다.

“…….”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외국까지 와서 잡혀가고 싶나?

이델라가 커튼을 닫으며 말했다.

“와, 각하. 저분이 저희 일행이 아니라고 셔벗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연락해 두는 게 좋겠군요.”

그레이는 병사를 불러 조치했다. 기숙사장은 끌려가면서도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외에 소란은 없었다.

나는 보온병을 든 채 후보 대기실로 들어갔다. 긴장해서 파랗게 질린 콜린과 구릿빛으로 그을린 미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셸은 나를 보자마자 반겼다.

“마침 잘 오셨군! 조프리 전하, 전하께선 속으셨습니다!”

이게 환영인가?

“아, 아니라니까!”

콜린이 외쳤다. 겉으로 보기엔 미셸이 콜린이 괴롭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난 콜린의 성질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은 사이가 나쁜 듯했다.

그야 사이좋은 사람을 낙마시키려고 말에 수작을 부리진 않을 것이다. 미셸이 어깨에 팔을 두르자, 콜린은 거의 경기를 일으킬 듯 반응했다.

대기실을 지키던 기사가 미셸을 막았다.

“접촉하지 마십시오. 다른 후보에게 위협이 될 만한 행위를 하신다면, 감점이 있을 겁니다.”

감점을 감수하면 위협을 해도 되는 건가?

같은 생각을 콜린도 한 듯했다. 그는 창백해졌으나, 미셸은 혀를 차며 콜린을 놓아줬다. 의외로 규칙에는 잘 응한다.

“전하께선 콜린 같은 놈에게 왜 속으셨습니까? 이놈 얼굴로는 전하를 홀릴 재주도 없었을 텐데요! 아무튼 전하, 준비해 온 전략은 지금 폐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다 이놈 수작이니까요.”

“너……. 수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전하께 제가 무슨 말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까? 그 모임만 해도, 전하를 흠모하는 지인들이 전하를 뵙고 싶어 해 소개했을 뿐입니다. 제가 모임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 그 모임이란 게 문제의 근원이었군?”

미셸이 비웃었다.

“비겁한 놈! 기사들이 너를 무시하는 이유가 네가 비쩍 마르고 말을 더듬어서겠냐? 아무것도 모르는 전하께 ‘셔벗의 문제는 이것’이라고 속닥거려 놓고, 두 번째 시험 주제를 ‘셔벗의 문제 제시’ 따위로 정해?”

“아니야!”

이렇게 들으니 콜린이 굉장히 비겁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시험 주제는 미셸 측 귀족들도 합의한 바일 텐데?

미셸은 콜린을 밀치고 다가오더니, 내 양어깨를 잡고 씩 웃었다.

“이걸로 빚은 갚았습니다, 전하. 이제 와서 주제를 바꾸려니 힘드시겠지만, 뭐 힘내십시오!”

이게 응원인가? 악의는 없어 보였다.

빚 갚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참견하고 있다.

아무튼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해 줬으니 캐릭터를 밀고 나가 보기로 했다.

“주제를 왜 바꾸지?”

“예? 방금 뭘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그 모임의 참석자들은 진심이었어. 나는 셔벗처럼 부유한 나라에 그런 어둠이 있을 줄 몰랐네. 개인적으로 조금 알아보니, 충분히 논의할 만한 문제 같았어.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일이 아닌가.”

“전하의 그 생각이야말로 콜린이 의도한 바라지 않습니까?”

미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가? 그렇다면 코크 공자도 평소에 이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던 거겠지. 내가 고민하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해 주길 바랐던 게 아닌가.”

“아니, 말해서 전하께 득 될 게 없다니까요? 당장 폐하부터가 거느린 노예가 몇인지 아십니까?”

몇인데? 궁금해졌지만, 콜린이 말을 끊어서 내역은 들을 수 없었다.

“저, 저의 생각이 아닙니다. 전하.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그저 다른 이들의 생각을 들을 기회를 전하께 드린 것뿐입니다.”

알아들었다. 귀족들과 사이 나빠지기 싫다는 거지.

“그래.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그대와는 관련 없네.”

내가 확언하자 콜린은 표정이 더 나빠졌다.

“……입장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한 분씩 차례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기사가 말했다.

미셸이 가장 먼저 일어나서 통로로 빠져나갔고, 그 뒤로 콜린이 따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가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벽에 붙어 서 있던 기사가 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저 기사도 내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정말 귀족원에서 귀족들이 문제라고 말하려는 건가 궁금해하는 듯했다.

물론 난 그럴 생각이었다.

귀족원 건물은 원래 재판소로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했는데, 귀족원이라는 기구 자체가 시험 때문에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토의 장소는 내가 상상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왕을 위한 상석은 본래 재판장의 자리인 듯한 곳에 만들어져 있었고, 귀족들은 재판정 좌석에 앉아 있었다.

큰 재판소였던 모양인지 좌석은 2층에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관객이 빽빽이 들이찼다.

후보들은 왕 앞에 섰다. 높은 자리에 앉은 왕이 우리를 맞이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기사 정신을 시험했으니 두 번째 시험에선 그대들의 지혜를 보겠네. 왕국의 모든 귀족이 그대들의 말을 듣기 위해 이곳에 자리했군. 누가 먼저 셔벗을 위한 지모를 보이겠나?”

왕은 일부러 나를 보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하지 않아도,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나를 찌르고 있었다.

너무 주목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여론전은 이래서 문제였다. 방향을 설정하기도 어려운데 강도를 조절하기는 더 어렵다. 특별 기사는 내지 말라고 할걸.

“이 나라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지? 그대들의 의견을 들려주게. 젊고 영리한 그대들은 또 늙고 지혜롭다는 대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겠지.”

왕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몇몇 대신들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너무하십니다, 전하.” 하는 소리도 들렸다. 잠깐 관객석을 확인하니, 세 공작이 모두 와 있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가시자 주위는 깃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내게 모인 시선만 느껴졌다. 차라리 먼저 끝내 버릴까?

첫 순서는 좋지 않았다. 마지막 순서만큼이나 주목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 세 후보가 모두 겁쟁이처럼 보일 테니까.

겁쟁이처럼 보이는 건 나로 충분했다.

마음을 먹었다. 옆에서 콜린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떨고 있지만 않았다면 손을 들었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미셸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제가 먼저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오! 용감한 미셸. 역시 이럴 때도 가장 먼저 나서는군. 사람들은 그대가 용맹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저는 다른 후보들이 어째서 답을 겁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셔벗 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렇습니다. 폐하의 은덕에 온 셔벗이 평온합니다. 문제라니, 이 아름다운 왕국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난 어이가 없어서 미셸을 쳐다봤다.

진심인가?

그런데 셔벗 왕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하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설마 이게 통한다고?

아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왕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대신들도 입을 벙긋하지 않았다.

“미셸. 장난은 그만두고 네 식견을 보이래도? 후계자가 되면 주변에 아첨하는 신하만 남길 셈이냐!”

왕은 불같이 분노했다. 사람이 변한 듯했다.

그러나 놀라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에이드 공작은 눈을 감고 있었고 미셸은 굳었다. 그리고 콜린은…….

“허억…….”

가슴을 쥔 채 숨을 못 쉬고 있었다.

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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