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1화 (261/293)

261.

콜린은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러셨군요.’라고 말했다. 그냥 안 믿는다고 말을 해라.

미셸에게도 내겐 야심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사실 잠깐은 믿었던 것 같은데 그 뒤에 후계자 시험이니 뭐니 해서 다 없던 일이 됐다.

말로 하는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난 콜린이 왜 저렇게 나를 경계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미셸이야 단순해서, ‘내게 감히 승리를 양보하다니 라이벌로 인정하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난 성으로 돌아가 왕에게 알현 신청을 넣었다.

답은 금방 돌아왔다. 왕의 시종이 나를 사실로 안내했다.

내 첫 경기에 소란을 피운 건 일행들만이 아니었다.

셔벗왕은 모리스 상송을 통해 온갖 진귀한 약재와 주치의를 보냈다.

주치의가 내 상처를 살피고 ‘별것 아닌 생채기’라고 보증한 뒤에야 그는 선물 세례를 멈췄다.

모리스는 내가 진료받는 걸 감시하고 있다가, 주치의가 나간 뒤에 한마디 했다.

‘몸을 보중하십시오. 공주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뭘 안다고?

그러나 그가 슬퍼하고 있어서 화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마마마를 알고 있나?’

‘그분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프리를 자꾸 챙겨 줬던 건가. 그에게 난 제자의 자식이었던 셈이다.

셔벗은 내게 좋지 않았다.

난 이곳에서 왕비님의 자식이었다. 비스코티의 왕자였지만, 그보다 왕비님의 자식이라는 신분이 더 앞섰다.

셔벗 왕이 나를 후계자 시험에 끌어들일 수 있는 이유도, 귀족들이 반대하지 않는 이유도 같았다.

역시 이곳에 오래 머물러선 안 될 것 같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사실로 들어갔다. 왕비님을 닮지 않은 셔벗 왕이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조프리 왕자. 괜찮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다행이야.”

“폐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무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래, 내게 청할 게 있다고?”

그는 기뻐 보였다.

내 곤란을 기뻐하는 건 아닐 테니 내가 그에게 부탁하러 온 상황을 기뻐하는 듯했다. 이상한 사람이다.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왜 그에게 좋은 일이 되지?

“폐하께선 제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죠.”

“물론이란다. 호위가 필요하니? 기사단을 내어줄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니, 기사단까지는 필요 없고…….

진짜 요청하면 내줄 건가? 내가 뭘 하려는 줄 알고? 의문이 들었지만, 난 원래 하려던 말을 마쳤다.

“두 번째 시험 내용에 조금 손을 써 주셨으면 해요.”

그레이는 귀족원에 다른 두 공작의 힘이 닿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셔벗 왕의 힘도 미칠 거라는 뜻이다.

대단한 도움까진 필요 없었다. 내 제의는 다른 두 공작도 딱히 거절할 만한 게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콜린 쪽은 좋아할 것이다.

“시험 내용?”

“예. 후보자들이 정견을 발표할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시험의 본 내용이 아니어도 좋아요. 공개적인 자리를 만들어 주시면…….”

“그거면 되겠니?”

셔벗 왕은 선뜻 수락했다.

이유는 안 물어보는 건가?

“어렵지 않구나. 더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셔벗 왕은 아쉬워하며 나를 보냈다.

내가 뭘 더 바라길 원하는 걸까? 금은보화?

아무튼 두 번째 시험도 수월하게 끝날 듯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느꼈지만, 이 시험이란 게 변수가 많았다.

확실하게 탈락하려면 출제되는 문제를 고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 나오도록.

시험은 해결한 것 같은데…….

그레이는 비서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셨어요?”

“알겠대.”

“몽블랑 상단에 사람을 보낼게요. 시험 주제가 나오기 전까지 전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두라고요.”

짧은 대화만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 공기를 나만 느끼는 걸까?

이델라가 밖으로 나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웃으며 “물 좀 마시고 올게요.” 하고 말했다.

물 책상 위에 있는데?

둘러보니 책상이 하나 비어 있었다.

“로웰은 어디 갔어?”

“데이트요.”

공녀를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

“로웰 일도 해결해야 하는데.”

“글쎄요. 자업자득이죠. 오히려 몽블랑이 공녀를 질리게 만드는 데 실패해서 미움이라도 사게 된다면 그게 더 곤란할걸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앞치마를 입은 알렉스가 차와 과자를 내오다 말고 물었다.

그는 최근 도트에게 과자 굽는 법도 배우고 있었는데,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과자가 전혀 안 달긴 했지만.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쿠키에 든 설탕이 몸을 둔하게 한다는 모양이었다.

내가 설탕을 먹어서 미셸에게 깔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었지만, 난 군말 없이 달지 않은 과자를 먹었다. 여기서 운동량을 더 늘리긴 싫었다.

“글쎄요. 몽블랑을 괴롭히려고 전하께 청혼할 정도니까요.”

또 비슷한 일을 벌일 거라는 뜻인가?

그렇다고 로웰을 결혼시킬 순 없잖아.

알렉스가 멍하니 서 있어서 난 대신 쟁반을 받으려고 했다. 요즘 자주 넋을 잃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쟁반이 구겨져 있었다.

왕성에서 사용하는 쟁반이라 겉은 도금된 물건이었다. 금 쟁반을 구겼어?

“알렉, 뭐 해?”

“죄, 죄송합니다. 잠시 상상하느라…….”

무슨 상상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는데?

“전하와 그 부인을 모시는 상상을……. 죄송합니다.”

그게 그렇게 싫었어?

아니, 내 부인을 너한테 모시라고 한 적도 없고…….

애초에 부인이 생길지도 모르겠고…….

“공녀와 결혼 안 한다니까?”

“예……. 그분은 별로 좋은 분 같지 않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나도 알아.

좋지 않은 사람은 모시기 싫은 건가? 그 점은 백작을 꼭 닮았다. 알렉스가 강직한 기사로 자란 건 백작의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란을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가자, 에드워드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사신단을 통해 보고가 들어갈 텐데도, 그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대하기 어색한 사신단의 누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난 다른 얘기를 썼다.

-셔벗 왕이 너무 잘해 줘.

매는 달지 않은 과자를 얻어먹고 다시 힘을 얻어 날아갔다.

그리고 반나절 만에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서 흔들렸어?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거 물어보려고 매를 혹사시켰나?

-뭘 흔들려? 잘해 준다고 여기 남아?

날 뭐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매에게 먹이도 주고 하룻밤 쉬게 한 뒤 떠나보냈다.

매는 다시 반나절 만에 돌아왔다.

-네가 그곳에 남을지도 모른다고 매일 생각해. 그럼 네가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져.

글을 읽을 뿐인데 손끝부터 얼굴까지 열기가 올라왔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얘는 이런 말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나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러 가진 않을게.’라고 에드워드는 썼다.

당연히 오면 안 되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 주위를 돌다가 의자에 앉았다.

-착하다. 금방 갈게.

역시 빨리 돌아가야겠다.

* * *

셔벗왕은 약속을 지켰다.

두 번째 시험 주제인 ‘지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귀족원은 머리를 맞대다가, 며칠의 토론 끝에 결론을 내렸다. 후보들은 ‘셔벗의 시급한 문제와 그 해결 방안’에 대해 논하게 되었다.

장소는 귀족원의 회의 건물이었다.

이거 대선 주자 공개 토론 아닌가?

두 공작이 시험 주제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몽블랑 상단에선 열심히 소문에 부채질했다.

내가 셔벗 왕에게 대귀족들의 권리 제한에 대한 말을 올렸다는 소문이었다.

나야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지만, 바깥에선 상당한 논란이 된 모양이었다.

“에브니아가 그러던데요. 스프라우트 공작이 펄쩍 뛰었다고. 전하께서 진심이시냐고 걱정이기에 일단 설마 그러시겠냐고 달래 놨어요.”

로웰이 말했다.

공녀는 저택에 스스로를 감금한 처지였다. 그런 것치고 로웰과는 밀회를 너무 잘 즐기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조차 알 정도면 귀족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정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바라지 않던 지원군까지 합류했다.

“전하! 두 번째 시험에 임하는 각오는 어떠십니까?”

기숙사장이 물었다. 한쪽 귀에는 펜을 꼽고 한 손에는 수첩을 든 모습이었다.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며칠을 밤새운 거지?

그는 이제 귀족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를 취재하러 국경까지 넘었다는 듯했다.

“어……. 잘해 보겠다?”

“과연!”

기숙사장은 감탄하며 수첩에 뭐라고 적었다. 난 한 마디 했는데 왜 펜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몽블랑 상단 마차에 끼어서 왔습니다, 전하. 비스코티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전하의 안위를 궁금해하는데, 기자가 되어서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전하를 셔벗에 빼앗기게 되었다는 기사를 쓰게 되어 마음은 아픕니다만…….”

아, 그래.

며칠 뒤면 그 고통 사라질걸.

마침 잘된 것 같아서 기숙사장에게 기사를 하나 부탁했다. 귀족들이 자주 다니는 카페 같은 데 유인물을 놓아둘 생각이었다.

-조프리 왕자의 반귀족 정책…… ‘충격’!

뭐 이런 제목으로 정책 홍보를 하면 두 공자도 금방 깨달을 것이다. 날 뭘로 공격해야 하는지.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하자고 하면 귀족원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야유나 퍼붓지 않으면 다행이다.

스프라우트 공작도 나를 영 못 써먹겠다는 판단이 서겠지.

귀족들이 전부 등을 돌리면, 내게 유리한 점수 조작이 일어날 가능성도 사라진다.

세 번째 시험까지 갈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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