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60화 (260/293)

260.

“현명하신 폐하의 치세하에 셔벗의 문화는 융성해졌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이겠지요. 귀족들은 꿀로 목욕하고 보석을 갈아 피부에 바르는데, 나라 한편에선 끼니를 해결할 돈도 없어서 스스로를 노예로 파는 이들이 있다니 마음이 찢어질 듯합니다.”

콜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몹시 훌륭한 말이라 난 당황했다.

내가 하려던 말이었는데?

물론 저렇게 구체적인 얘기까진 아니었다. 난 이곳에서 ‘평민 편을 드는 후보’가 될 생각이었다.

평민들이 잘 사는 나라가 정말 좋은 나라다,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민에게 행사하는 권한을 줄이자, 뭐 이렇게 주장하면 귀족들이 퍽도 좋아할 것이다.

시험에 관여하는 건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거들떠도 안 보게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작이 말했다.

“이 나라 귀족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셔벗에선 매일 밤 파티가 열린답니다. 여기 들어가는 재물이 누구에게서 나왔겠습니까?”

“일부 귀족들은 더욱더 부유해지고, 노예는 점점 더 늘어가는 이 구조는 개개인의 귀족을 설득해선 바꿀 수가 없습니다.”

“말이 통할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착취하지 않았겠지!”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더니 대화가 열을 띠었다. 나는 내팽개쳐 두고 알아서 떠들고 있다.

기숙사장이 떠올랐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콜린을 쳐다봤다.

이 사람 계략가 아니었나?

미셸은 잘도 낙마시켜 놓고 스스로 무슨 삽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왕이 되기 싫은가? 사실 나처럼 내심 떨어지길 염원하고 있나?

콜린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너무 열 올리지 마세요. 전하를 모신 이유를 말씀드려야지요.”

반쯤 일어나서 떠들고 있던 귀족들이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남작이 흥분한 듯 말했다.

“예, 전하! 저희가 이렇게 전하를 모신 건, 전하께서 폐하께 직접적으로 청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귀족들의 방종은 개개인의 도덕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법적으로 강제하지 않고서야…….”

“저 끔찍한 지대와 고리 사채부터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치를 통제하고, 억울하게 노예가 된 이들을 풀어 주도록 해야…….”

“폐하께서는 어째서 가장 힘든 이들을 굽어봐 주시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한탄했다.

콜린이 재빨리 나섰다.

“죄송합니다. 저 사람은 감정이 격해져서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다른 불경한 뜻은 없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도 내가 어쩔 순 없지만, 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보다 콜린의 수작이 훌륭해서 감탄이 나왔다.

이게 노림수였나?

이런 귀족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듯했다. 대화 수위는 오히려 기숙사장 모임보다 낮았다.

기숙사장 모임이 발각되면 끌려갈 수준이라면, 이쪽은 의심의 눈초리만 받을 수준일까. 신분이 훌륭하다면 그마저도 안 받을 수 있다.

대단한데.

이들을 내게 떠넘겼다는 점이 가장 훌륭했다.

“부탁드립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비스코티에서도 이미 현 세태의 문제점을 깨닫고 개혁에 나선 분이 아니십니까?”

“전하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굽어보시는 분임을 압니다.”

“폐하께 말씀을 올려 주십시오!”

기대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전하께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실 겁니다. 너무 부담드리지 마세요.”

콜린이 생각해 주는 척 말했다. 귀족들은 들은 척도 않고 내게 매달렸다. 알렉스가 아니면 내 옷자락이라도 잡을 태세였다.

“셔벗의 백성들이 이렇게 고통받는 줄 미처 몰랐는데. 다들 부유한 게 아니었나?”

“겉으로 보이는 일부분일 뿐입니다. 일부의 사치를 위해 다수의 백성이 희생해야만 한다면, 폐해가 너무 짙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작이 절절하게 말했다.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어쩔 수 없군. 말씀드려 보겠네.”

“역시 전하께서도……. 예?”

콜린이 당황했다.

원한 바가 아니었나?

“폐하께 개인적으로 말씀 올리고 그대들에게 연락하면 될까?”

“그래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봐, 전하께서는 들어주실 거라고 했잖아!”

“정말 감사합니다!”

귀족들이 기뻐했다. 사실 내가 고마워할 일이었다.

내가 약속을 이행하도록 압박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귀족 사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소문을 흘릴 거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관계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모임은 파했다. 콜린만이 유일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찜찜해하는 듯했다. 원래 계략이 너무 잘 통해도 책략가는 찜찜해지는 법이다. 나도 몇 번 겪어 봐서 알고 있었다. 내 경우 안 좋은 예감은 늘 현실이 됐지만.

하지만 콜린의 사악한 음모는 잘 실현될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그가 걱정해야 할 상대는 미셸밖에 없었다.

* * *

콜린은 왕자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갔다.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그는 왕자가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왕자가 싫었다.

‘비겁한 콜린 코크! 네놈은 스스로 나설 줄을 모르지!’

얼마 전 미셸이 저택까지 찾아와 길길이 날뛰고 갔다. 사교계에선 콜린이 저지른 짓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멍청한 미셸이 콜린의 계략을 눈치챘을 리 없었다. 그는 ‘조프리 왕자에게 다 들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콜린이 어울리던 무리는 조프리 왕자의 등장으로 헛바람이 들었다.

콜린은 향락적이거나 사교적인 모임에는 끼어들지 못했다. 그는 노력해서 어떤 독서 모임의 일원이 됐다. 명문 귀족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조용한 모임이었다.

참여자들이 훌륭해서 코크 공작은 만족했다. 실제로 참여자들은 가문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학식이나 교양도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답게 혈기 왕성했고,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가 이미 왕국에서 실험한 바야. 평민과 귀족들의 금전 관계를 완화하는 것만으로도 착취의 고리를 끊을 수 있어.’

‘비스코티 같은 소국에서야 가능한 일이었겠지. 왕실에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순 없어.’

‘구제책을 펼치자는 게 아니야. 귀족들의 방종을 규제하자는 거지!’

‘결국 폐하께서 결단하실 일이군. 어떻게든 연명해서 뜻을 전해야…….’

그러면서 귀족들은 콜린을 돌아봤다. 그는 당황했다. 나보고 왕에게 ‘귀족들을 규제하라’고 청하라고? 미친 게 아니고서야. 대귀족들을 다 적대하라는 소린가?

‘조프리 전하를 모임에 초청할 생각이었어. 그분께 말씀드리고 폐하께 청을 올려 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

콜린이 말했다.

‘전하를 초청할 수 있어?’

‘대단하군! 그거 좋은 생각이야.’

콜린은 간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위기감이 목뒤까지 쭈뼛 올라왔다.

귀족들은 외국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왕자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콜린이나 미셸이 어떤 인간인지 수도의 귀족들은 잘 알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는 셔벗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유명세는 있었으나 한 번도 검증의 대상으로 서 본 적 없었다.

저 왕자가 각광받는 건 새로운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이 통할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후계자를 정한다는 규칙. 차기 왕을 그들이 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귀족들을 집어삼켰다.

그들이 왕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착각.

왕자가 거절하면, 모임 참석자들도 머리가 식을 것이다. 왕자에 대한 환상도 깨지겠지.

‘좋아. 말씀드려 보겠네.’

그러나 왕자는 허락했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마차에 오르기 전, 왕자는 잠시 멈춰서 호위 기사와 대화를 나눴다.

비스코티의 젊은 기사 알렉스 바움쿠헨은 그전에도 유명한 인물이었으나, 미셸의 말을 목 졸라 기절시킨 일로 사교계에 파란을 가져왔다.

다들 그와 왕자를 초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들은 콜린을 초청하기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았다.

바움쿠헨을 과시하듯 뒤에 세운 채 왕자는 여유롭게 다가왔다.

“초대해 줘서 고맙네. 좋은 시간을 보냈어.”

“정말 폐하께 말씀드릴 겁니까?”

콜린은 불쑥 물었다.

왕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지. 약속을 어길 수도 없으니까. 셔벗에는 나라를 생각하는 훌륭한 귀족이 많더군. 그런 이들의 지지를 받는 그대는 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겠어. 처음부터 내 기량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번에 폐하께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이미 내 나라에서도 능력이 부족해 왕이 되지 못했어. 폐하께서는 조카를 가엾게 여겨 내게도 기회를 주셨는지 모르지만, 애초에 내겐 왕위를 노릴 야심도 용기도 남지 않았어.”

왕자는 무장도 없이 콜린에게 다가와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표정이 진실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사실일 듯했다.

“그러셨군요.”

콜린은 대답했다.

미셸 그 얼간이도 이런 말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는데 왕위를 노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야심이 없는 사람이 저렇게 뛰어날 수 있다고?

참을 수 없는 기만이었다.

왕자를 떠나보낸 콜린은 건물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안에서 귀족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말았다.

“상송 백작의 말대로군. 셔벗의 두 공자와는 달라. 전하께선 말로만 왕족의 의무를 다하는 분이 아니었어.”

“역시 콜린 코크는 아니라고 했잖아.”

콜린은 입술을 깨문 채 복도에 남아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