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9화 (259/293)
  • 259.

    알렉스가 미셸의 시야에서 나를 가로막았다.

    “저자가 아직도 전하께 흉측한 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콜린이 아니라? 적의를 돌려놓은 줄 알았는데.

    나야 미셸이 누굴 봤는지 확인도 못 했지만, 알렉스의 시력이라면 다를 거였다.

    기분이 착잡해졌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분이 에이드 경을 낙마시킨…….’

    ‘하지만 부상자를 상대하는 건 명예롭지 못하다며 승리를 양보하셨다지요.’

    ‘그렇다면 방금 에이드 경이 하신 말씀은…….’

    ‘전하께서 결승에 올라오셔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

    소문이 실시간으로 각색되고 있었다.

    이거 뭐야. 분위기가 왜 이렇지?

    경기가 시작되니 관객들이 조용해지긴 했다.

    결승전은 치열하진 않았다. 원래 마창 경기가 이런 모양인지, 둘 다 경기장을 빙글빙글 돌다가 한순간 격돌했다.

    내 정수리가 볕에 녹아내리기 전에 승자는 결정됐다.

    “토너먼트의 승리자는……. 미셸 에이드!”

    놀랍지 않은 결과였다. 좋은 결과이기도 했다.

    누군가 승자가 될 거라면, 후보 중 하나인 편이 당연히 좋다.

    투구를 벗는 모습이 꽤 멋있어서 주변에서 환성이 들렸다. 지지층이 확실히 있다. 미셸이 경쟁에서 앞서가는 건가.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응?”

    생각에 빠져 있느라 난 잠시 주변의 이상 기류를 놓쳤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묘했다. 다들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그 이유가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조프리 전하!”

    미셸 에이드가 경기장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엔 이론의 여지도 없이 전하를 이겨 보일 것입니다! 제 정당한 대적자는 전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뭐라는 거야?

    “에이드! 에이드! 에이드!”

    “조프리 전하! 조프리 전하! 조프리 전하!”

    관객들은 승자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난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미셸은 우승했지만 첫 시합에서 원래 탈락할 뻔했다. 그걸 찜찜해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미셸은 말 몇 마디로 자신을 정정당당한 기사로 만든 것이다.

    똑똑하다.

    문제는 나였다.

    ‘정당한 대적자’ 같은 소리를 하면 내가 네 라이벌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관객들은 깜빡 넘어가서 내 이름까지 연호하고 있었다.

    난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았다!

    왕이 일어나자 소동은 가라앉았다. 경기장은 조용해졌는데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위기 상황이다.

    “참가자들 모두 훌륭한 경기를 보여 주었네! 특히 미셸 에이드의 무예는 당해 낼 자가 없더군. 그럼에도 스스로를 드높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네. 이 마음 변치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미셸이 힘차게 대답했다. 관객들은 다시 환호했다.

    “에이드! 에이드! 에이드!”

    “조프리 전하! 조프리 전하! 조프리 전하!”

    경기 시작 전 미셸의 발언은 못 들었나?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신경 쓰지 않았고, 또 내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절로 나는 상황이었다. 난 눈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은 분위기에 휩쓸린 평민들이었다. 귀족석에 앉은 관객들은 예의상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오히려 몇몇은 평민들을 불쾌한 듯 보고 있었다.

    셔벗은 부유한 나라다. 그 말은 셔벗 사람들이 대체로 부유하다는 뜻이다.

    일부 귀족들의 재산만 따지면 비스코티도 부유했다. 하지만 셔벗은 평민들 중에서도 월등히 부유한 계층이 있었다.

    ‘셔벗은 비스코티에 비해 작위를 사기 어려워요.’

    로웰이 한 얘기가 떠올랐다.

    셔벗의 부유한 평민들이 귀족 계층에 합류하지 못한 이유다.

    그러니까 셔벗엔 부르주아 계층이 있는 셈이다.

    이 경기장의 관객들도 대다수가 부유한 평민이었다. 남들이 일할 시간에 유희를 즐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셔벗 귀족원의 귀족들은 이들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경기가 끝나자 그 점이 보였다. 이 경기장은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하. 이곳에서 뵙는군요. 안 그래도 초대장을 직접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때마침 콜린 코크가 다가왔다. 그는 초대장을 들고 있었다. 예의 독서 모임 초대였다.

    난 반갑게 그를 맞았다.

    “아. 기대하고 있었어. 초대 고맙군.”

    “예……. 감사합니다?”

    콜린이 더듬거렸다.

    “모임은 이틀 뒤입니다. 가벼운 모임이니, 참모…… 아니, 전하의 비서들은 제외하고 혼자 와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야.”

    “자신이 있으시군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자신까지 필요할 일인가?

    콜린은 스프라우트 공작처럼 말하더니 굳은 얼굴로 사라졌다. 왜 저러는 걸까?

    상관은 없었다.

    콜린 코크는 저 미셸에게도 수작을 부린 사람이었다. 내가 뭐 예쁘다고 천국 같은 곳에 초대할 리 없다.

    내게 의구심을 갖거나 혹은 적대적인 귀족들이 모임에 나오겠지. 그들은 내 작은 흠은 더 부풀리고, 어떻게 해서든 내 결격 사유를 찾으려 할 것이다.

    사신단 명예에 해도 안 가면서, 셔벗 귀족들이 나를 ‘결격 사유 보유자’로 찍을 만한 일.

    내가 찾은 것 같은데.

    * * *

    콜린의 독서 모임이라는 건 이름대로 학구적인 모임인 모양이었다. 독서 모임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안경을 끼고 있었다.

    시작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의외일 건 없었다. 콜린도 내게 적개심을 드러내려고는 안 했으니까.

    “얼마 전 토론 주제가 전하께서 비스코티에서 행하신 정책이었습니다.”

    “나라에서 돈을 풀어 평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건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셔벗에서 펼칠 순 없겠더군요.”

    “셔벗은 나라가 넓고 백성이 많아 그 많은 이들을 나라에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에 비하면 비스코티는 정책을 시험하기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모릅니다.”

    물론 화기애애한 건 표정뿐이었고 내용은 어처구니없었다. 비스코티가 소국이란 소리잖아?

    맞는 말이지만.

    “그런 말은 조심하는 게 좋겠군. 필리프 폐하께서 이 나라를 책임지지도 못할 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나를 좋게 보아 주려는 건 고맙지만 찬사가 너무 과해.”

    난 못 알아들은 척 무슨 남작이라는 젊은 귀족에게 충고했다.

    나라에서 백성들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건 왕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도 된다.

    논리로 상대해 봐야 내가 이 귀족들을 이길 리 없었다. 그래도 말싸움은 내가 더 잘할걸.

    원래 말꼬투리 잡고 우기는 건 신분이 높은 사람이 할수록 효과가 좋다.

    “죄송합니다. 비스코티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스코티는 정말 좋은 나라가 아닙니까? 몇 년 사이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남작이 변명했다. 그는 정말 당황한 듯했다.

    저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셔벗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지만, 난 왕에게 저 귀족이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이를 정도의 친분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해를 유지하게 둘까.

    그런데 다른 귀족들도 당황해서 남작의 변명을 도왔다.

    “정말입니다, 전하. 저희는 이미 전부터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연구해 왔습니다. 비스코티는 이웃 국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셔벗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

    “처음에는 그랬습니다만. 전하께서 어떤 연유로 경제 부흥책을 펴시는지, 저희가 셔벗에서 가장 먼저 파악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들은 열심히 말했다. 난 기가 질렸다.

    날 연구해 왔다고?

    연구할 게 뭐가 있는데?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팔자? 그런 거라면 나도 연구하고 싶었다.

    “아……. 그래. 언제부터?”

    “모임에서 전하를 연구하기 시작한 건 이 년 전입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운 분이시지 않았습니까? 뿌리를 연구하는 것 역시 놓칠 수 없기에, 전하의 과거도 아울러서…….”

    “예! 전하의 자비로운 심성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또한 중점으로 두고…….”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있어?”

    “맞아. 우리가 전하의 사생활이나 궁금해하는 사교계의 멍청이들처럼 보일 거 아냐!”

    얘네 뭐야?

    난 뜨악해서 콜린을 돌아봤다. 그는 귀족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마, 맞습니다. 우리는 진짜 귀족들이 아닙니까? 저 향락에 물든 이들과 다릅니다. 조프리 전하께 실망을 끼치지 말고 우리 모임을 재개해 나갑시다.”

    그는 주눅 든 듯한 태도였으나, 이 모임에서 영향력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조용해졌다.

    그런데 콜린이 나를 힐끔 봤다.

    원망스러운 눈빛이었다.

    얜 또 뭐지?

    이후 대화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심지어 주제는 딱 알맞게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평민의 자매 문제였다.

    빚을 진 평민들이 자신을 매매해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난 비스코티 같은 나라에서만 활발한 일인 줄 알았는데 셔벗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그냥 이 세계가 문제 아닌가?

    이 독서 모임은 모일 때마다 돌아가며 주제 하나씩을 선택해서 토론한다고 했다. 대체로 정책에 관한 주제였고, 그 외에는 왕족이나 다른 귀족들의 사생활을 욕하며 보내는 듯했다.

    “이 나라의 귀족들은 썩었습니다! 그리고 그 향락을 방조하는 분위기는 정말이지…….”

    남작이 분개했다.

    그는 ‘분위기’라고 말했으나 귀족의 향락을 방조할 수 있는 건 왕밖에 없었다.

    이거 그냥 기숙사장 모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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