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8화 (258/293)
  • 258.

    우리가 궁에 도착한 시간은 밤에 가까웠다. 외국의 사신을 배려하기 위해 셔벗 왕은 우리에게 한 구역을 배정했다. 그 위치에 따르면 비서실은 내 숙소보다 더 외부와 가까웠다.

    숙소로 향하는데 비서실 불이 켜진 게 보였다. 그레이나 이델라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쉬라고 해 뒀는데.

    결과를 말해 두는 게 좋겠지. 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그레이가 밖으로 나왔다.

    “오셨어요?”

    그는 우연이라는 듯 말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아직까지 안 잤어?”

    “전하께서도 일하고 계시는데요. 제가 먼저 잘 수 없죠.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일단 공작의 개입은 막았어. 그보다 로웰이 문젠데.”

    “로웰 몽블랑이요? 무슨 사고 쳤나요?”

    로웰이 사고 칠 사람인가?

    사고라면 사고긴 했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이해했지만.

    아무튼 긴 얘기였다.

    “일이 있긴 했지. 늦었으니까 이 얘긴 나중에 하는 게 낫겠어.”

    “그래요…….”

    그레이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멈춰 서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주무세요. 피곤하시겠네요.”

    그레이가 말했다. 그는 비서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문틈으로 방 안의 불빛이 새어 나와서 그레이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췄다. 그는 목각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붙잡아 주길 바라는 건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둘 중 하나만 했으면 했다. 신경 쓰이게 굴지 말든가 아니면 말을 하든가. 난 짐작해서 행동하는 게 싫었다.

    “그레이,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이요?”

    “나 기다렸잖아.”

    그레이가 말한 ‘가셨던 일’이란 건 공녀와의 혼인 문제를 뜻할 것이다.

    난 분명히 대답하지 않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대답해야 할까?

    그레이가 부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세요?’라거나 뭐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문을 잡은 채 나를 돌아봤다.

    “이미 아시면서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제 입으로 다시 듣길 바라세요?”

    화난 말투가 아니었다. 평소의 예민한 태도도 아닌, 조금은 억눌린 목소리였다.

    “신경 쓰여서 기다렸어요. 전하, 공녀와의 결혼은 어떻게 되셨어요? 로웰 몽블랑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그게 궁금해서, 늦은 밤까지 아무래도 좋은 서류를 처리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가 말했다.

    난 얼이 빠졌다.

    “결혼은……. 안 해.”

    로웰의 사고라는 게 바로 그 공녀와 결혼 약속을 한 거라고……. 덧붙일 수도 있었지만.

    내 입에선 그 말만 나갔다.

    “그렇군요. 쉬세요.”

    그레이가 문을 닫았다.

    어두운 복도에 남겨지기 전, 난 그레이의 어깨 너머로 벌떡 일어서 있는 이델라를 발견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동그란 눈이 크게 떠져서,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휙 아래로 숨었다.

    난 그녀의 얼굴에서 ‘이거 봐도 되는 일인가?’ 하는 표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 심장도 뛰고 있었다.

    그레이는 내 대답을 듣고 조금 웃었다. 마치 안도한 것처럼.

    내 눈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랬다.

    * * *

    얼떨떨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내가 로웰을 잘 모른다고 했던가?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지 생각해 보면, 이렇게 낯선 기분이 드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게 말이 되나?

    난 걔가 누굴 인간적으로라도 좋아하는 모습을 별로 본 일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상대는 에드워드나 파이 공작 정도일까. 그냥 뛰어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당연히 난 기준 안에 못 들었다.

    스프라우트 공작을 만난 목적은 절반밖에 못 이뤘다. 결혼은 막았지만 그는 나를 놓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건 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파티에서 난 인기가 많았다. 왕자로 상당한 시간을 보낸 덕에, 상대가 내게 호감을 사려고 하는 행동은 그럭저럭 꿰고 있었다.

    셔벗 귀족들은 조프리의 호감을 사고 싶어 했다. 아마 그 파티에 참석한 일부만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대체 왜?

    사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내가 뒷배도 없는 주제에 첫 번째 시험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탈락도 방법이 있었다.

    그렇게 탈락하면 안 됐던 건데.

    그런데 그건 내가 원한 탈락 방식도 아니었다.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를 내가 어떻게 막아?

    그냥 깔린 거라고 사실을 말해 줘도 귀족들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귀족들이 ‘기사다운 행동’ 운운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기가 차고 미셸에 대한 원한이 절로 자라났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난 운이 없다.

    에드워드도 이건 예측 못 했을걸.

    물론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었다.

    걘 왜 답장이 없을까? 올 때가 지났는데.

    의식을 따라 헤매며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푸드덕!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개 달린 생물이 깃털을 펄럭이고 있다.

    창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가 들릴 만도 했다.

    하지만 소리는 가까운 데서 들렸다. 외부가 아니다.

    난 눈을 번쩍 떴다. 책상 위에 동그란 형체가 보였다. 처음엔 작은 눈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여름이고, 눈사람은 저렇게 멋있는 눈매를 가지지 않았다.

    저거 매야?

    꿈인가 싶어 앉아 있는데 매가 고개를 좌우로 갸웃했다. 그러더니 내게로 다리를 쭉 내밀었다.

    다리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너 전서응이야?”

    매는 고개만 갸웃했다. 새가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전서응 같은 걸 기대했다는 사실은 한 사람만 알았다. 에드워드다.

    편지는 짧았다.

    -조에게.

    선물이야.

    주인에게 잘 도착했기를. 에디.

    여기선 왜 반말일까?

    할 말은 많았지만 매가 먼저 내 손을 부리로 살짝 쪼았다.

    “아야! 왜 그래?”

    매가 자기 머리를 내 손바닥 안에 들이댔다. 설마 쓰다듬어 달라는 건가? 난 의구심을 느끼며 매의 머리를 슬슬 매만졌다.

    매는 만족한 듯 얌전해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진짜 매다. 내가 기대했다고 해서 보낸 거야?

    잘 도착할지 불안했는지, ‘주인에게 잘 도착했기를’이라고 쓰여 있다.

    이름은 또 왜 줄인 걸까? 혹시 편지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

    왕족은 따로 애칭이 없다. 모시는 주인의 이름을 반토막 내서 부를 아랫사람은 없으니까. 게다가 왕실 가족은 보통 자기를 모시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낸다.

    왕비님도 조프리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일반적인 의미의 애칭이라면 아마 ‘왕자님’이었겠지만. 그 호칭은 거짓말이다.

    왕비님이 조프리를 일부러 왕자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게 사실이 아니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걸 애칭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뭐야, 에드워드. 제대로 된 선물도 할 줄 알잖아.

    평범하게 내 말을 기억해서, 내가 좋아할 만한 걸 보냈다.

    착하다.

    셔벗 상황은 찜찜하게 돌아가고 있다. 에드워드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난 그냥 ‘고마워.’라고 써서 보냈다.

    -귀엽다. 마음에 들어.

    매는 물과 과자를 조금 얻어먹더니 밤하늘을 휙 날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답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뭐 이렇게 빨라?

    -잘했으면 칭찬해 줘.

    “…….”

    매가 귀엽다는 칭찬은 이미 했다. 설마 네가 귀엽단 소리를 듣고 싶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제 성년이 지났을 뿐이다. 칭찬이 필요한 나이이긴 했다.

    -착해. 혼자 잘하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돌아갈게.

    에드워드의 답장은 이랬다.

    -나쁜 생각이 들 것 같아.

    심장이 덜컹했다.

    -무슨 나쁜 생각?

    -말 안 할래. 네가 알면 싫어할 테니까.

    뭐야? 궁금하잖아.

    -그럼 말을 꺼내지 말든지!

    전보라도 보내는 것 같다. 아니, 문자인가. 인편보다 훨씬 빠른데 쓸 수 있는 내용은 적어져서, 정말 시답잖은 얘기나 쓰게 됐다.

    “셔벗은 새가 많은가 봐요, 왕자님. 바닥에 왜 자꾸 깃털이 떨어져 있지?”

    “…….”

    그러는 사이 며칠이 훌쩍 지났다.

    * * *

    첫 번째 시험의 결승전이 열렸다. 중요한 경기라, 왕의 시종은 이미 떨어진 후보들도 와서 관객이 되어 주십사 청했다.

    나는 땡볕 아래 서서 미셸이 의기양양하게 창을 치켜드는 모습을 봤다.

    그는 과연 공작의 아들이었다. 새로 구한 말도 훌륭했다. 상대 기사가 외쳤다.

    “에이드 경! 토너먼트 3년 연속 우승 기록을 지금 이곳에서 깨 드리겠습니다!”

    “호기는 좋군! 그런 말은 나를 한 번이라도 낙마시킨 다음 해 보시지!”

    미셸은 그러더니 갑자기 관객석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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