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7화 (257/293)
  • 257.

    공작은 인상을 쓴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알렉스도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었으나, 공작은 그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는 듯했다.

    “그게 누구입니까?”

    “그대에게 말해도 좋을 사람은 아니군.”

    “남자입니까?”

    공작은 날카롭게 물었다. 난 반응하지 않았다. 놀라서였지만, 생각해 보니 공작이 뭘 알 리가 없었다.

    미셸이 뭐라고 떠들고 다닌 거지?

    “차라리 다행입니다. 남자라면 애가 생기지도 않겠군요.”

    공작은 납득했다. 난 아니었지만.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그대에게 이런 말까지 하는 이유를 알 텐데. 이 시험은 승산이 없어. 애초에 폐하의 요청으로 후보자가 된 것뿐이니까 말이야.”

    난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여선 안 된다. 셔벗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자신 없어 보이는 건 다른 얘기였다.

    공작들은 좋아할걸.

    “진심이십니까?”

    “내가 경기의 첫 탈락자가 아니었나?”

    그런 사람에게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스프라우트 공작은 굳은 표정이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래도 이 시험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전하이십니다. 모르실 리 없을 텐데요.”

    모르겠는데.

    공작은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의 청으로 후보자가 되셨다고요. 다른 두 후보는 폐하의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전하께선 폐하의 기준을 넘었다는 거겠지요.”

    무슨 기준?

    오는 길에 왕이 물어본 건 내 아카데미 생활이 어땠는지 정도였다.

    “해석이 과하군.”

    “셔벗의 귀족들은 필리프 폐하가 어떤 분인지 압니다. 그분이 어째서 이날까지 후계자를 고르지 않으셨겠습니까? 전하께서 오신 뒤에야 시험이라니……. 폐하께서도 짓궂은 분이십니다.”

    공작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더 놔두었다간 이야기가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도착할 듯했다.

    “폐하께서 나를 높게 보아 주셨다니 기쁜 일이군. 하지만 나는 내 역량을 알아. 타고나길 그릇이 작아 큰일은 해내지 못하지.”

    난 아무 말이나 해서 발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공작이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죄송합니다. 놀란 나머지……. 폐하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가 표정 관리를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정말 뭘 말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대의 호의는 고맙지만 필요 없다는 거야.”

    “자신만만하시군요.”

    내 말 들은 건가?

    공작은 나를 뜯어보는 듯했다.

    “성급히 거절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하께선 스스로의 힘을 믿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신중히 임하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공작이 경솔해서 다른 귀족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닙니다.”

    “충고 고맙군.”

    난 그렇게 대답하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혼담은 거절했지만, 말은 전혀 안 통한 것 같은데.

    * * *

    공작과의 대화를 끝낸 뒤에도 공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하인에게 로웰을 찾아 달라고 말했다.

    로웰은 파티가 열리던 정원이 아닌 본채 뒤편에서 나타났다. 손님이 출입할 장소는 아니었다. 옷도 좀 흐트러진 것 같다.

    “무슨 짓을 하다 온 거지?”

    알렉스가 물었다.

    “잠깐 아는 사람을 만나서.”

    로웰은 대충 대꾸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는 할 수 없는 얘기란 소리다.

    공녀를 만났나?

    우리는 공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난 커튼을 쳤다.

    “어떻게 됐어? 오해는 풀었어?”

    “아니요. 공녀를 만나긴 했는데요. 오히려 강화한 게 아닐까…….”

    로웰은 애매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싸웠어?”

    “그럴 리가요. 일단 청혼을 받긴 했어요.”

    난 의심스러워졌다.

    “방금 만나고 온 사람이 공녀 맞지?”

    “예. 에브니아가 자신의 의지로 전하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분간은요.”

    공녀를 이름으로 부른다. 둘이 원수졌다고 하지 않았나?

    너 뭘 하고 온 거야?

    로웰은 갑자기 손목에 감겨 있던 손수건을 풀더니 자기 가슴팍에 넣었다. 손수건은 여성용으로 흰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로웰이 저런 걸 장식하고 파티에 참석했던가? 아닌 것 같은데.

    “그거 네 거야?”

    “설마요. 공녀에게 받았어요. 애정의…… 증표로?”

    로웰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의 태도만 봐서는 손수건이 이상한 거라도 되는 듯했다.

    난 공작과 오랜 시간 앉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파티가 무르익기도 전에 빠져나왔다.

    연인이 오해를 풀기도 짧은 시간이다. 사랑을 확인하기엔 무리일 것 같은데.

    로웰의 태도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온 사람 같진 않았다.

    “일단 공녀에겐 저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 뒀어요.”

    “뭐?”

    “전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방법은 아니겠지만요. 제가 거절하면 바로 전하와 결혼하겠다고 했을걸요.”

    로웰은 비웃듯 말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로웰은 공녀와 재회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호감 있는 상대를 ‘망상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공녀는 널 사랑하는 건가?”

    알렉스가 물었다.

    로웰은 드물게 예민했다.

    “넌 또 왜 헛소리야? 그게 사랑이겠어?”

    “사랑해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그따위 사랑 누가 바란대? 그 여자는 상대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아. 자기 손아귀 안에 들어오면 된다는 식이지. 사랑하는 사람을…….”

    로웰은 문득 나를 쳐다봤다. 그는 다시 알렉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키지는 못할망정, 멋대로 하는 게. 그따위를 사랑이라고 하면 안 되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치곤 건실한 말이었다. 그의 사랑관이 몹시 훌륭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건 다 믿어도 연애 면에선 불성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알렉스도 마찬가지인지 놀란 얼굴이었다.

    “그럼 사랑이 뭐지?”

    “너 지금 나한테 그걸 물어보는 거야?”

    “그렇군. 네게 할 질문은 아니었군.”

    “장난해?”

    로웰과 알렉스는 늘 하던 대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나 아직 얘기 다 못 들었는데.

    로웰은 공녀가 자신에게 원한이 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 들어 보니 그건 원한이 아니라 애증이었던 모양이다.

    로웰이야 저러다 누구한테 칼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연애를 해 오긴 했다. 공녀는 칼 대신 청혼서를 내밀기로 한 것 같지만.

    정말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공녀를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

    내가 공녀라면 자기 싫다고 도망간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사실 그녀의 선택은 아무래도 좋았다.

    로웰은 어쩌려는 걸까?

    “결혼하려고?”

    “예?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설마요.”

    로웰이 정색했다.

    알렉스가 그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로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도 원하지 않게 될걸요.”

    “무슨 말이야?”

    “그녀가 환상에 빠져 있다는 뜻이에요. 보통 그렇죠. 사랑에 빠질 땐 누구나 환상에 젖으니까요. 첫사랑은 더 그렇죠.”

    방금 전까지 성실하게 사랑론을 설파하던 사람과 동일인 같지 않았다.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네가 공녀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버려지겠죠? 전하께서 필요로 하실 때까진 버텨 보려고 하는데요.”

    로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얘가 어떻게 아직까지 칼을 안 맞고 살아 있지? 난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좋은 사람인 것과 별개로 하는 연애마다 엄청나긴 했다.

    너 그래도 괜찮겠어?

    “공녀가 환상에서 깨지 않으면?”

    널 정말 사랑하는 거면?

    난 로웰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그가 말한 사랑관에 놀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가볍지만, 속으론 진실한 사랑을 믿고 있는 바람둥이 같은 건가. 있을 법한 일이다.

    사실 그와 이델라를 함께 사신단에 넣으면서, 난 둘 사이에 무슨 감정이 싹트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가 아니라 걱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신단엔 그레이도 있었지만, 그가 누굴 좋아하는 장면은 내 빈약한 상상력으론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레이는…….

    ‘결혼하지 마세요.’

    뭐……. 아무튼.

    어쨌든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알고 보니, 로웰은 놀랍도록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로웰은 연애 경험이 풍부하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아무 문제도 없었다면,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할 만도 했다.

    공녀에 대해서도 그래서 단언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경우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로웰이 활짝 웃었다.

    정말 다른 경우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모양이다.

    웃을 일이 아닌데.

    “어쩌려고 그래? ‘진심인 줄 몰랐어요.’ 하고 끝날 일이 아니잖아.”

    나만 걱정인가? 로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별수 없네요. 결혼해야죠.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그러면서 그가 나를 빤히 봤다.

    “그렇게까지……. 인생을 바쳐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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