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6화 (256/293)
  • 256.

    친구들은 당황해서 조용해졌다. 로웰 몽블랑은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아니다.

    “전하의 사생활은 나 따위가 입에 올릴 바가 아니지. 너희야 말할 것도 없고.”

    로웰은 야유하듯 말했다. 말끝에 입술을 올려 미소를 짓자 친구들에게서도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 낯설다.”

    “측근이라는 거지! 와, 귀하신 분 입에 안 올릴 테니까 진지하게 굴지 마!”

    순식간에 화제가 돌아갔다.

    이런 부류의 입에 왕자가 오르내리게 두고 싶지 않다. 로웰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하인을 불렀다.

    샴페인이라도 마시며 분위기에 묻어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걸어올 때도 어설프던 하인은 로웰의 옷에 샴페인을 쏟아 버렸다.

    “죄송합니다!”

    친구들이 젖은 로웰을 보며 낄낄댔다.

    “뭐야, 로웰. 진짜 웃겨!”

    공녀는 내려오지 않고 쓸데없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되는 일이 없다. 그때 하인이 로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됐어.”

    로웰은 사양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하인은 로웰을 작은 문으로 안내했다. 바깥으로 통하는 그 문은 하인들이 이용하는 통로로 보였다.

    그들은 파티가 열리는 정원에서 벗어나, 울타리와 덩굴, 나무로 감싸인 작은 후원에 도착했다. 저택 건물 밖을 빙 둘러가며 로웰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 당시 셔벗에는 유행하는 놀이가 있었다.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뭐 그가 할 만한 놀이였다.

    셔벗 사교계는 비스코티처럼 건전하지 않아서, 연애는 예사였고 위 세대가 알면 펄쩍 뛸 만한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곳에 자식을 보내고 싶지 않은 부모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스프라우트 공작의 극성은 유난했다. 저택을 방문한 손님조차도 공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미인이라는 소문이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소문은 났고, 로웰은 그녀를 보고 싶었다. 당시 유행하던 게 이런 ‘성 안에 갇힌 공주(혹은 왕자)’를 구출하는 놀이로…….

    다시 말해 저택에 무단 침입해 그곳에 사는 순진한 귀족 아가씨나 도련님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놀이였다.

    물론 로웰은 그게 나쁜 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성 안의 아가씨에게 자유를 좀 맛보여 주는 게 뭐가 나쁜 일이겠는가?

    로웰은 취해 있었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날은 운이 따라서 경비병에게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가볍게 담을 넘었고, 안을 순찰하는 경비병의 눈을 피해 정원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발코니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던 에브니아에게 들켰다. 그는 그녀가 소리 지르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너를 만나러 왔어.’

    ‘…….’

    ‘도망가자. 내가 네게 자유를 줄게.’

    에브니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문이 아주 헛소문은 아니어서, 에브니아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구불거리는 금발 때문에 그녀는 고전 소설 속의 공주 같았다.

    로웰은 그녀를 구하러 온 기사처럼 웃었다. 기사치고는 너무 취해있었지만.

    그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그녀가 그에게 한눈에 혹한 게 보였다.

    일상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사람은 새로운 것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로웰은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그렇지 않았지만.

    에브니아는 고전적인 금발을 늘어뜨린 채 발코니에 서 있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왕족의 비서라니, 네가 그런 게 되고 싶어 하는 줄 몰랐는데.”

    그녀가 말했다.

    존대를 해야 할까? 이곳이 공식적인 자리라면 그래야 했다.

    로웰은 고민했으나, 이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네가 상처받을 줄은 몰랐어.”

    “난 마음이 여려. 내가 기다리는 거 알았잖아.”

    “몰랐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로웰은 그녀가 자신을 기다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날 만나러 왔어야지.”

    에브니아가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원망하는 눈으로 로웰을 바라봤다.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젠 늦었어. 아버지가 조프리 왕자를 탐내거든. 왕자의 비서라고? 출세가 하고 싶었어? 그럼 나를 잡았어야지. 넌 스프라우트 영지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었어.”

    그녀가 비웃듯 말했다. 로웰은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에브니아와 결혼해서 평생을 감시 속에서 살라고?

    로웰은 그녀를 저택에서 데리고 나왔다. 경계하는 그녀를 사람 많은 거리로 데려가서 밤의 분수대와 시장을 보여 줬다.

    그녀는 순진한 아가씨였고, 그녀에게 세상 물정을 소개해 주는 건 그럭저럭 보람 있는 일이었다.

    로웰은 그녀와 며칠간 어울렸다. 당시 만나던 부인에게 걸리지 않았다면 더 만났을 것이다.

    ‘요새 뭐 하느라 바빠?’

    ‘친구에게 수도 구경을 시켜 주느라고요. 하지만 이젠 친구도 길을 익혔을 거예요.’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지 하자.

    로웰은 결정했고, 이후 공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끌려가고 싶진 않았다.

    그게 로웰이 기억하는 공녀와의 추억 전부였다.

    하지만 공녀는 아니었던 듯했다.

    일주일 뒤, 사교계는 그와 공녀의 약혼 소식으로 끓어올랐다.

    처음 로웰은 공녀가 공작에게 무단 외출을 들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문을 흘린 사람은 공녀 자신이었다.

    “어떻게 할까? 난 절대로 왕자와 결혼할 수 없다고, 그럴 바엔 죽어 버리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릴까? 그건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거야. 네 주인이 너를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다. 그걸로는 마음에 안 차. 왕자와 결혼을 할까? 그리고 왕자에게 네가 날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말하는 거야.”

    “…….”

    에브니아 스프라우트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든다.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기도 어려울 텐데.

    자신의 약혼 소식을 남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로웰은 웃겨서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공녀도 꽤 하지 않나. ‘날 구해 줄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태도였으면서 정신 나간 일을 벌인다.

    ‘로웰, 아버지는 나를 평생 가둬 둘 생각인가 봐.’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하더니.

    공작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치고는 굉장했으나, 로웰은 그런 것도 좋아했다.

    그러나 에브니아는 진심으로 약혼을 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로웰은 아버지의 손에 순순히 끌려 비스코티로 돌아갔다.

    그녀는 건드려선 안 될 부류의 사람이었다. 로웰은 잘못 건드렸던 셈이다. 뭐,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대로 그녀도 로웰을 잊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저택에 칩거했고, 로웰의 이름이 셔벗 사교계에 오르내리도록 만들었다.

    몽블랑 상단주가 셔벗에서 세를 확장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로웰은 꼼짝없이 스프라우트 공작 앞으로 끌려가야 했을 것이다.

    로웰은 에브니아가 머리 좋은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공작 때문에 그녀는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로 사람들을 피하는 것처럼 말해서 로웰을 효과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로웰은 셔벗에서 놀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고, 비스코티에도 파티는 많았다. 로웰은 비스코티에서 조프리 왕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화났는지 깨달았다.

    “내가 보고 싶었어?”

    로웰이 문득 물었다.

    에브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보고 싶었는데.”

    “거짓말.”

    “네가 그리웠어. 다들 날 놀이 상대로 가볍게 취급하잖아. 날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너뿐이었어.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

    “거짓말.”

    에브니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때 못되게 말한 것도 사과할게. 진심이 아니었어. 네가 나를 멋대로 휘두른다고 생각했어. 네 진심을 믿지 못했어.”

    로웰은 에브니아를 망상병자로 몰았던 일을 사과했다. 약혼은 그녀의 망상이 맞았고, 사과할 사람은 에브니아였지만.

    “……내가 너를 약혼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넌 나랑 연인도 될 수 없었을 거야.”

    에브니아가 입을 열었다. 로웰은 고개를 숙인 채 “응” 하고 대답했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우리가 잘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응. 그래.”

    “나를 맞으려고 온 거야? 왕자의 비서가 된 것도, 내게 어울리는 지위를 갖고 싶어서 그런 거야?”

    에브니아는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생각하고 거기에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춘다.

    로웰 자신이 그녀의 체스 말일 때는 웃겼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입에 올리는 사람은 왕자였다.

    이따위 일에 왕자를 휘두른다고. 저런 사람이 왕자의 반려가 된다고.

    왕자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저따위 게 사랑이라고.

    로웰은 웃기지도 않았다. 다른 조건 때문이 아니라도, 왕자를 저런 사람과 결혼시킬 수는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결혼하지 마, 에브니아. 네가 왕자와 결혼하면 난 견딜 수 없을 거야.”

    “오, 로웰.”

    에브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로웰은 낮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그녀를 두 팔 벌려 받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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