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스프라우트 공작의 정원 파티는 저택의 후원에서 이루어졌다. 참가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대개가 공작의 입김이 닿는 명망 있는 귀족들이었다.
그레이는 그들이 귀족원에서도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전하께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 주려는 거겠죠.”
스프라우트 공작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손을 잡으면 조프리는 단번에 가망성 있는 후보가 된다.
나로서는 이 혼담을 파탄 내야 할 이유가 늘어날 뿐이지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레이는 보고서를 정리하며 말했다.
“넌 안 가?”
“예. 공작 측에 전달한 명단에도 제 이름은 넣지 않았는데요. 확인 안 하셨어요?”
갑자기 결정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 안 가냐고 묻기는 그랬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모르겠어서.
모든 사람이 갈 필요는 없겠지.
난 고민하다가 이델라도 참석자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녀는 괜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나와 알렉스, 로웰을 태운 마차는 거리를 통과해 스프라우트 저택으로 들어갔다.
공작 부부는 몸소 사신단을 환영했다.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도 잠시 멈춘 채 우리를 소개해서,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공작이 가장 기다리던 손님임을 알 만했다.
“전하. 이렇게 뵙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경기를 보았습니다! 사고만 아니었어도 우승자는 전하이셨을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귀족원의 멍청이들처럼 셔벗에 안목 없는 자들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럼요. 저만 해도 전하께 깊은 흠모의 마음을 품게 되었답니다. 제 딸은 매일 전하를 뵙고 싶다고 어찌나 성화였는지 모릅니다. 얘, 메일리. 와서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전하.”
난 대충 인사를 받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린아이가 낼 법한 혀 짧은 소리가 들렸다. 메일리라고 불린 작은 여자애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살이나 됐을까? 저녁 파티에 데려와도 되는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제 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아이이지요. 크면 절세미인이 될 거랍니다.”
백작이 딸을 자랑했다.
딸이 귀여운 건 알겠는데……. 어린애 데리고 뭐 하는 짓이야?
공작은 이 백작이 자기 경쟁자인 건 알고 초대했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해서 내 주위는 소란스러워졌다. 난 아이를 안아 들고 달랬다.
덕분에 내게 인사하려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났다. 아이의 부모인 백작은 아이를 말릴지 아이가 내게 안겨 있도록 둘지 고민하느라 바쁜 듯했다.
그 틈을 타서 난 주위를 둘러봤다.
소문의 공녀는 보이지 않았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스프라우트 공녀는 셔벗에서 유명인이었다. 로웰과 불같은 연애 끝에 약혼했고, 로웰이 본국으로 떠나자 다시는 사교계에 나오지 않겠다며 저택에 틀어박혔다. 그녀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스프라우트 공작이 거의 매일 저택의 정원에서 파티를 연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공녀의 행동 때문에 로웰 몽블랑은 셔벗에서 전설적인 바람둥이로 자리매김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매력적이면 공녀가 상사병을 앓겠느냐는 것이다.
“에브니아는요?”
“하녀를 보내도 소식이 없어요. 또 변덕인가 봐요.”
“그 애는 대체…….”
혼란을 틈타 공작도 공작 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공작은 입을 닫았다.
알렉스가 청했다.
“전하, 제가 안겠습니다.”
“이런! 메일리!”
내 주위에서 소란이 일어서 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돌아보니 아이가 내 얼굴을 만지려 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그 손을 또 굳이 막고 있어서 아이의 아버지까지 야단이었다. 난 그냥 아이에게 얼굴을 내줬다.
공녀도 계획에 동참하는 줄 알았는데. 그 편지는 공녀가 자의로 보낸 게 아니었나?
이곳에 오기 전 난 스프라우트 공작이 조프리를 단념할 만한 방법을 고민해 봤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게 약혼자가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조프리가 셔벗에서 약혼했다더라’하는 소문이 비스코티에 안 흘러 들어갈 리 없으니까.
기자들은 왕족의 사생활을 정말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 같았다.
약혼 소문 정도가 아닐 것이다. 아예 기사가 나겠지.
에드워드가 텅 빈 왕좌에서 그런 거나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런 장면이 상상되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은 공녀를 설득해서 결혼을 막는 거였다. 하지만 정작 공녀를 만날 수 없어서야 불가능했다.
공작이 다가왔다.
“전하.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난 알렉스를 대동한 채 그를 따라갔다.
마지막 방법을 공작을 상대하는 거였다. 그는 이 결혼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내겐 아니었고, 공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후계자가 아닌 조프리는 그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
공녀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공작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복도를 통과할수록 굳어지더니, 방에 들어온 뒤에는 완전히 딱딱해졌다.
“딸의 건강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했다.
건강 문제 같진 않던데.
“아니. 꼭 그녀를 만나서 해야 할 얘기는 아니니까.”
“이해해 주시는군요. 결혼은 가문의 중대사이니까요. 그 애도 그 사실을 이해한다면 좋았을 텐데요. 지금은 어린애처럼 굴고 있지만……. 결혼하면 달라질 겁니다.”
공작과 나 사이엔 중대한 오해가 있었다.
“아니. 내 말은 그녀 앞에서 이 결혼을 못 하겠다고 말하긴 힘들단 뜻이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겐 내밀한 연인이 있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결혼은 도저히 못 하겠군.”
“예?”
“이곳엔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그대가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그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이야.”
“예?”
* * *
로웰은 연회장에 한발 늦게 입장했다.
파티장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왕자는 로웰에게 말했다.
‘내가 입장한 뒤에 입장하는 게 나을 거야.’
‘저만 따로 입장하라고요? 외로운데요. 제가 부끄러우세요?’
로웰이 웃으며 말하자 왕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너를 싫어한다며. 공작을 붙잡고 있을 테니까 넌 공녀를 찾아서 대화해 봐. 오해는 풀어야 하잖아.’
글쎄. 과연 오해일까.
왕자는 로웰과 공녀 사이에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확히는 공녀가 로웰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녀가 로웰을 좋아한다면, 대화가 될 거라고.
둘 사이의 약속이 오해였다면 그걸 대화로 풀 수 있을 거라고.
로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만나긴 해야 했다. 왕자에게 오는 초대는 로웰과 이델라가 상대하고 있었다. 초대장 답장을 보내는 건 왕자의 시종이었으나 그걸 분류하는 건 두 사람인 셈이었다.
비서인 그들이 숨기고자 한다면, 왕자는 어떤 종류의 편지는 전혀 받아 볼 수 없다.
로웰은 공녀가 보내온 수많은 편지를 떠올렸다.
-날 찾아와.
-내가 네 주인이 되어서 명령하기 전에. 너도 그런 걸 원하진 않잖아.
내 주인이 된다고?
로웰의 주인은 왕자였다. 그 외의 주인을 모신 기억은 없다. 그녀가 말하는 건 안주인이겠지. 왕자와 결혼해 그에게 명령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면 내가 찾아가야지.
로웰은 왕자의 명령대로 조용히 입장했다. 정원 파티는 연회장에서 열리는 것과는 성격이 달라서, 하인이 참석자의 이름을 부르는 요식 행위는 이뤄지지 않았다. 참가자는 원한다면 얼마든 구석에 숨어들 수 있었다.
로웰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공녀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눈에 띄었고, 그의 옛 친구들은 미인이라면 놓치는 법이 없었다.
“이게 누구야, 로웰 몽블랑 아니야!”
“비스코티에서 잘 지낸다며? 너 출세했더라.”
로웰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꼼짝없이 붙들렸다.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띤 그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요새 좀 어때?”
“‘요새 좀 어때?’ 와, 그게 할 말이야? 너 수도에 온 지 얼마나 됐냐? 한번 연락이 없더니!”
“그렇게 보고 싶으면 왕성으로 찾아오지 그랬어.”
“왕성이 밤에도 열려 있으면 그랬을 텐데 말이야.”
친구들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로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밤마다 파티장을 쏘다니느라 해 뜨는 시간에 활동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밤이면 파티장에 있느라 못 찾아왔을 거잖아?”
“물론 그렇지. 그리고 그곳엔 너도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왕자의 비서로 일하는 로웰 몽블랑이라니!”
자리가 금방 떠들썩해졌다. 로웰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끼었다. 누군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로웰은 단번에 무리의 중심에 섰다.
“이 년 만인가? 얼굴은 하나도 안 변했다?”
“그때 네가 나한테 나 나중에 왕자의 비서관이 된다고 했으면 안 믿었을 텐데 말이야.”
“내기를 걸어도 졌을걸!”
“사실 비서 아니지? 애인이지? 소문이 어디까지 사실이야?”
“조프리 전하,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하고 밤엔 장난 아니라던데…….”
웃으며 듣고 있던 로웰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혔다.
“입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