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4화 (254/293)
  • 254.

    그렇게 나간 그레이는 한 시간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가 명단을 내밀었다.

    “파티 참석 명단은 그럼 이렇게 확정할게요.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답신하면 될까요?”

    “어, 그래…….”

    난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는 내 시선을 못 느끼는 듯했다.

    “로웰 몽블랑이 상단을 최대한 동원해 누가 파티에 참석하는지 알아본다는데요. 일단 저도 공식적으로 공작 측에 요청해 두긴 할게요. 전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만큼, 해가 될 인물은 초대하지 않았겠지만요.”

    “응.”

    “그래서……. 결정하셨어요?”

    그레이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뭘?”

    “공작의 제의에 뭐라고 답변하실지 알려 주셔야 저희도 대비하죠.”

    아까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레이가 모를 리 없다.

    너 왜 또 확인하려고 해?

    “거절해야지.”

    “예. 그럼 비서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둘게요.”

    그레이가 나갔다.

    끝이야?

    뭔가 더 할 말 없어? 얘기를 시작했으면 끝을 내든가.

    내가 과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레이가 너무 멀쩡하게 굴어서 헷갈렸다.

    아까 그건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상 너머에 서 있던 그레이의 심장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릴 리가…….

    도트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물었다.

    “왕자님, 크래커 공작과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계단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던데요. 왕자님께 꾸중이라도 들었나 했어요.”

    “내가 그레이를?”

    난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나와 그레이 중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꾸중을 듣는다면 그 사람은 나였다.

    세어 본 적 없지만, 일 년에 백 번은 듣고 있지 않나?

    도트가 눈을 굴렸다.

    “앗, 다시 생각해 보니 크래커 공작과 닮은 사람인가 봐요. 착각했어요! 하긴, 계단이 워낙 어두워서요.”

    난 머리가 아팠다.

    그레이를 닮은 사람이 흔할 리 없다. 그렇다기보다, 세상에 또 존재할 것 같지 않다. 그레이가 두 명이나 존재하는 세상이라니 그건 그것대로 신기하겠지만.

    도트가 말하는 계단은 궁인들이 사용하는 통로였다.

    내 앞에서 멀쩡하게 나가 놓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걘 궁인들 입이 가장 무섭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셔벗 궁인들이라고 남달리 입이 무거울 리 없었다.

    사신단의 크래커 공작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머리도 좋은 애가 왜 그 생각을 못 하지?

    아니, 이게 아니라…….

    이게 말이 되나?

    그때 문이 쿵쿵 울렸다. 병사들이 말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프리 전하. 에이드의 장남 미셸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으니 문을 열어 주십시오!”

    이 성은 도무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미셸 에이드, 제 발로 찾아왔군! 전하.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알렉스가 검자루에 손을 올리더니 나를 돌아봤다.

    아니, 처치하면 안 되지. 지금 처치하면 범행 장소와 범인이 바로 특정된다.

    “열어 줘. 뭐라 하는지나 듣자.”

    원한 바는 아니지만 난 미셸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됐다. 은인에게 시비를 걸어 봐야 명예 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

    미셸이 내게 감사를 표하려고 찾아왔을까?

    놀랍게도 그렇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태도가 빚쟁이를 찾아온 채권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에이드 경,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예, 정말로 이러시면…….”

    조금도 도움 안 되는 병사들이 미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미셸은 그들을 떨쳐 내고 안으로 들어왔다.

    “조프리 전하.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미셸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드냐?

    나도 미셸이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 때문에 첫 시험부터 꼬여 버렸다. 청혼 공세에 아무래도 미셸의 영향이 있을 듯한데,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알렉스는 내 앞을 든든하게 막고 있었다. 내가 미셸에게 무슨 소릴 해도 얻어맞진 않을 것 같다.

    “전하께서 저를 구하신 게 아닙니다.”

    뭐 어쩌라는 거지?

    내 입으로 미셸을 구했다고 말한 적 없다. 설마 구해 줬다고 생색내지 말란 소릴 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전하께서 그러지 않으셨어도 전 알아서 착지했을 겁니다. 말 안 듣는 말을 버리고 전하와 정정당당하게 창술을 겨뤄 볼 수 있었겠죠. 전하께서 양보하지 않으셨어도 제가 다음 경기에 올라갔을 겁니다.”

    너 잘났다.

    “말은 조사해 봤나?”

    “예?”

    “그대의 말. 문제가 있어 보이던데.”

    “감히 주인을 떨어뜨린 말을 제가 가만두었겠습니까? 경기가 끝나자마자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에이드 공작 가문은 대대로 훌륭한 기사를 배출해 온 명가. 말은 기사의 가장 충실한 동료여야 합니다. 주인을 훌륭히 모셔 온 말들은 죽은 뒤 에이드 성에 함께 매장했으나, 이놈은 그런 영광은 누리지 못할 겁니다.”

    에이드는 치욕스럽다는 듯 말했다.

    한마디로 조사를 안 했다는 소리다.

    “에이드 가문은 후계자에게 병든 말을 동료로 붙여 주는 모양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이드는 불쾌해했다.

    “조사도 없이 베어 버릴 정도니, 그대의 말이 평소에도 그렇게 날뛰었다는 뜻이 아니었나? 난 그 말이 그날 갑자기 이상 행동을 일으킨 줄 알았는데.”

    에이드의 눈이 커졌다.

    말이 이상한 줄도 몰랐나? 자기 말도 직접 안 돌보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문제를 일으켰다고 바로 처분할 생각이 드는 거겠지만.

    말은 원래 겁 많은 생물이다. 그런 생물이 천성을 거스르고 전쟁터에 서게 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미셸의 말은 큰 소리에도 겁을 먹지 않고, 어느 순간이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르도록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런 말이 참지 못하고 몸부림칠 정도였다.

    누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건 나도 모르지만, 누가 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콜린 코크! 그 겁쟁이가?”

    미셸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그만 시비 걸고 둘이 싸워라.

    “너무 정정당당한 것도 문제로군요. 이런 비열한 수작이 들어올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를 상대해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말에게 수작을……. 전하, 감사합니다! 역시 제가 다음 경기에 올라가는 건 정당한 일이었군요! 전하께서 기사를 보내 저를 겁박한 일은 이걸로 잊어 드리겠습니다.”

    에이드는 혼자 납득하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전에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어서 알렉스를 화나게 만들기까지 했다.

    “전하.”

    “하지 마.”

    난 미셸을 따라가려는 알렉스를 막았다. 모처럼 미셸과 다른 후보를 싸움 붙였는데 내게 불똥이 튀면 곤란하다.

    두 번째 후계자 후보는 코크 공작의 아들 콜린이었다. 로웰의 표현에 의하면 사교계에서 보기 힘든 사람이라고 했다.

    ‘독특한 성격이야?’

    ‘그게 아니라, 정말 사교계에서 보이질 않았어요. 그만한 신분이면 주변에 추종자가 몰려들 만도 한데 말이에요. 오히려 수줍은 성격에 가깝지 않을까요?’

    정말로 콜린 코크가 수작을 부린 걸까?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미셸이 내게서 신경을 꺼 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다고 콜린 코크가 내게 신경 써 주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전하. 꼭 한번 직접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콜린이 긴장한 듯 인사했다.

    그가 수줍은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바로 이해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걸 어려워한다.

    어려운 사람을 굳이 찾은 이유가 뭘까?

    미셸이 벌써 찾아가서 난동을 피웠나? 그때 내 이름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데 콜린은 부드럽게 말했다.

    “전하께서 충분히 회복하신 듯하니 다행입니다. 제가 참석하는 모임에서도 많은 이들이 전하의 상태를 걱정했습니다.”

    “병자는 오히려 그대 같은데. 괜찮은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의 영광스러운 부상에 비하면…….”

    콜린은 재빨리 팔을 등 뒤로 숨겼다. 붕대를 감고 부목까지 댄 걸 보니 상당한 부상 같았다.

    어쩌다 팔이 부러졌지? 경기를 보지 않아서 상상이 안 됐다. 저 모임 사람들이 걱정해야 할 건 콜린 같은데.

    “전하의 인품에 대해서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직접 뵙고 보니 정말 자애로운 분이시군요. 경쟁자인 저까지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다니.”

    콜린은 감동한 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어색했다. 내 비위를 맞추고는 싶은데 아부에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과한 칭찬이군. 걱정이 많은 성격일 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대 같은 환자를 오래 앉혀 두는 것도 걱정이 되는군. 무슨 일로 찾아왔지?”

    “예. 전하를 저희 모임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전하께선 먼 나라에서 오셔서 셔벗에 익숙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제가 하고 있는 조그마한 독서 모임이 사교계 적응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다들 전하를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왕으로 모셔야 될지도 모를 분의 얼굴도 모르는 셈 아닙니까?”

    “얼굴을 모르는 주인은 모실 수 없나?”

    언제부터 귀족들이 왕을 대면하려 했지? 그런 영광을 누리는 귀족은 극소수였다.

    “하, 하지만 나라를 어찌 이끌어 가려는지도 모를 주인을 모시려면 그들도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콜린은 말해 놓고 표정이 굳었다.

    현실이야 어찌 됐든 귀족은 왕의 신하다. 그들은 왕의 정책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난 그의 말을 왕에게 전달할 수도 있었다.

    “응. 그렇겠지. 호의에 감사해. 모임이 언제지?”

    난 그럴 뜻이 없다는 의사를 보였다.

    “다음 주입니다, 전하. 첫 번째 시험이 끝나고 귀족원이 평가 회의를 하는 기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때 보겠네.”

    콜린은 연신 인사하더니 나갔다. 소심해 보이는 사람이다. 표정도 몸도 굳어 있어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은 교활하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미셸보다 나를 더 경계하는 사람은 콜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이해가 안 됐다. 그의 말대로 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지지도는 셋 중 가장 떨어지고 첫 번째 시험도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왜 경계하는 거지?

    콜린과 엮인 일이라 봐야…….

    미셸의 말?

    아무래도 그 사건은 정말 콜린의 짓인 모양이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지만, 난 콜린의 독서 모임에서 꼭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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