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53화 (253/293)

253.

난 공작이 가자마자 로웰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어요?”

“읽어 봐.”

로웰은 웃으며 편지를 받았다.

“설마 전하께 들어온 연애편지를 제게 읽히시는 건 아니죠? 저 사서 고통받는 취미는 없는데요.”

그러면서 그는 편지를 읽어 나갔다. 아무 말이나 하던 입이 멈추더니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파래지기를 반복했다. 역시 뭔가 아는 게 있다.

스프라우트 공작은 나를 적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무례한 태도였다. 내가 그에게 치욕이라도 줬다는 투였다.

‘제 딸아이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해서 난 상식적으로 대답해 봤다.

‘난 그대의 딸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데.’

공작은 책상을 내리쳤다.

‘돌려 말하지 마십시오. 이미 다 아실 거 아닙니까?’

난 그가 분노에 눈이 돌아 주변을 못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알렉스가 검을 뽑고 있는 게 안 보일 리 없는데?

‘내가 뭘 안다는 거지?’

‘로웰 몽블랑을 데려오셨지 않습니까! 제 딸아이에게 흠결이 있지만, 그걸로 저를 협박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먼저 전하를 찾아왔으니 이걸로 만족해 주십시오. 제게 치욕을 주셔서 전하께 좋을 일이 없을 겁니다!’

로웰 몽블랑? 딸아이에게 흠결?

식은땀이 다 흘렀다. 저렇게 말하면 이상한 생각밖에 안 들잖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로웰, 스프라우트 영애와 아는 사이야?”

“전하. 제가 다 설명드릴 수 있어요.”

로웰이 입술을 축였다.

“응. 설명해 봐.”

“그게요, 그러니까요.”

그만큼이나 나도 떨고 있었다. 로웰은 바람둥이인 것과 별개로 인성이 바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바람둥이가 인성이 바를 수가 없다.

“제가 에브니아를 만난 건 2년 전인가 그랬을 텐데요. 그때 셔벗에서는 유행하는 놀이가 있어서요. 남의 집 담을 넘어서 저택에 침입하는 건데요, 이상한 건 아니고요!”

남의 집 담을 넘는 게 안 이상하다고?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공략 캐릭터였던 로웰 몽블랑이 범죄자일 수 있나? 말이 안 되잖아.

아니, 공략 캐릭터가 아닌 로웰 몽블랑이라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웰이 보였다. 그는 평소의 여유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태도로 변명하고 있었다.

“그때 에브니아를 만났어요.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어서…….”

“오해?”

“……그녀가 사교계에 발표했어요. 우리가 약혼했다고.”

어?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약혼?”

“셔벗을 떠날 때만 해도 그녀가 칩거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2년이나 아예 사교계 출입을 안 할 줄은. 그게 저 때문이라고 소문날 줄 알았으면,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거예요!”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다야?”

“예?”

“아니,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나…….”

“이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제가 비스코티로 끌려가게 된 건데요?”

경매장에서 만난 로웰이 떠올랐다.

로웰 몽블랑이 몽블랑 경매장에 있다니, 있을 만한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는 셔벗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내가 쓰레기인가? 혼자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기야 내가 아는 로웰은 좋은 사람이었다. 연애할 때 세 다리를 걸치긴 하지만 신의 있고 성격도 좋다.

스프라우트 공작의 무남독녀가 약혼을 했고 그 상대가 로웰이었던 모양이다. 몽블랑 상단이 부유해도 상단주는 본래 평민이었다. 성을 사서 남작이 되긴 했지만.

반면에 공녀는 셔벗 왕족의 피를 이었다. 둘이 결혼하면 로웰은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이루는 셈이다. 충분히 말이 나올 만한 일이긴 하지만…….

이게 로웰 잘못도 아니잖아.

몽블랑 상단주는 이 약혼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스프라우트 공작이 싫어하는 티를 냈거나.

“그럼 공작을 모욕했단 건 뭐야?”

설마 로웰 쪽에서 파혼했다고 그걸 모욕이라고 간주한 건 아니겠지. 귀족들의 사고방식이라면 가능성 있었다.

로웰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가 떠나기 전에 친구들에게 말했거든요. 전 공녀와 약혼 같은 거 한 적 없다고. 그녀의 망상이라고요.”

“뭐?”

원한을 살 만한데?

“전하, 제가 다른 사람과 결혼 약속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요.”

약혼을 하면 사교계에 소문이 난다.

미혼인 로웰 몽블랑은 그렇다 치고, 귀족들은 약혼자가 있는 로웰 몽블랑과 연애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설득력이 있다.

그럼 정말 공녀의 망상이라고?

로웰은 내 손을 가져가서 자신의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진실성을 보여 주려는 것 같은데 상대방은 싱숭생숭해지는 행동이었다.

공녀와 로웰 사이에 오해가 있을 것 같긴 했다.

어떤 종류의 오해인지는 만나 보면 알 것이다.

* * *

편지의 발신인은 에브니아 스프라우트였다. 그녀는 나를 정원 파티에 초대하는 동시에 사신단을 대접하길 원했다.

그녀가 양국 관계에 관심이 있어서 사신단을 초대했을까?

난 아닐 것 같았다. 사신단에 속한 로웰을 만나고 싶다는 거겠지. 로웰도 동의했다.

“파티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녀를 만나긴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아니. 다 같이 가.”

“예?”

“나랑 사신단을 초대한다잖아. 너 혼자 보내기도 그렇고.”

안 그래도 사교 모임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도대체 조프리가 어디서 점수를 얻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로웰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정말 감사하지만요, 전하. 저랑 같이 그 파티에 가시면 곤란하실 텐데요? 스프라우트 공작이 절 정말 싫어해서요.”

“그러니까.”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난 이 어이없는 청혼을 공식적으로 무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스프라우트 공작은 자신이 나를 찾아오는 게 양보라는 듯 말했다. 그 말은 우리 중 누가 먼저 상대를 찾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애초에 우리의 만남을 모든 사람이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전하께서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난 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가 말한 것과 정반대의 도움이라면 필요했지만.

* * *

“스프라우트 공작의 파티에 참석할 거야. 규모가 작은 파티니까, 적당히 준비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군요.”

그레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궤짝 안의 청혼서를 훑어보느라 바쁜 듯했다.

거기서 뭐 볼 게 있나? 내가 저 궤짝을 보고 알 수 있는 건 세상에 도박꾼들이 많다는 사실뿐이었지만, 그레이라면 뭐 다른 걸 알아낼지도 모른다.

그레이가 편지를 휙휙 뒤집으며 말했다.

“이 가문은 후계 경쟁을 지원할 재산이 없을 텐데요. 파산할 생각인가? 이 집안 딸은 얼마 전에 이혼해서 자식이 셋이고요. 이 백작 영애는 올해 일곱 살이던가요? 이게 정말 본인이 쓴 편지라면 놀랍겠네요.”

그는 문장만 보고 그 집안 사정을 꿰고 있었다. 뭐지?

시선을 느낀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몽블랑 분점에서 셔벗 귀족 명부를 받았어요. 시간이 좀 남길래 외웠거든요.”

“대단한데.”

내가 감탄하자 그레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숨긴 그가 말을 이었다.

“단순 암기일 뿐인데요. 아무튼 이 중에서 결혼한다면 스프라우트 공녀가 가장 좋은 선택지긴 하겠네요.”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너 내가 결혼하면 좋겠어?”

“당연히! ……아니지만요. 여기 남는 게 전하께 나쁜 선택지는 아니잖아요.”

그레이는 욱하더니 다시 시선을 피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며칠 이상하더라니, 저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나?

난 그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멈췄다. 그레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신단에 합류했다. 일종의 비스코티 귀족 대표인 셈이었다.

“나를 셔벗에 두고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어?”

비스코티의 귀족 입장에서. 그는 에드워드에게 충성하는 왕당파라 할 수 있었다.

조프리가 비스코티에 있으면 분란만 생기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레이에게까지 분란의 씨앗 취급 당하는 건 충격이었다.

이게 충격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레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난 울컥하는 것 같은데.

“비스코티로 돌아가시면 전하께선 계속 견제받으실 거예요. 양국의 평화를 가져온 사신으로서 귀국한다고 쳐요. 전하의 뛰어남을 증명했으니, 또 전하를 충동질하려는 자들이 나타나겠죠. 전하께선 그런 걸 싫어하는 분이시잖아요. 비스코티에선 전하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도 못해요.”

내게 펼칠 능력 따위는 없고, 난 귀국하면 낙향한 사람처럼 살 생각이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조프리는 이름값이 너무 높다는 거지. 어떻게 해도 에드워드의 대항마가 된다는 거잖아.

“셔벗 왕이 전하를 후계자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려 한다면, 전하께는 기회잖아요. 사신단의 다른 사람들은 전하의 뜻을 따르죠. 셔벗에 전하를 빼앗기고 싶지 않을 테니 좋다고 따르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제가 그러면…….”

그의 눈이 떨렸다. 난 말을 잘랐다.

“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귀국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거지. 나를 셔벗에 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게도 그게 좋을 거라는 소리잖아. 그리고 이곳에 남으려면, 공녀와 결혼하는 게 최선이라고. 다 알아들었어.”

난 그레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조프리 같은 건 몇 번이나 버릴 사람이었다.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다.

난 셔벗과의 갈등만 봉합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더 멀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등을 봉합한 사신단과 내가 또 비스코티에서 어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지.

머리가 아파 왔다.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레이가 말했다.

“결혼하지 마세요.”

뭐?

난 머리를 짚은 손을 내렸다. 그레이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혼하지 마세요.”

어?

“죄송해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가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난 타인의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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