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9화 (249/293)

249.

알렉스가 갑자기 연무장을 가 보고 싶대서 보내 줬다. 거의 이 주를 나랑 같이 방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신 모양이다. 몸을 풀고 싶겠지. 방 안에서도 할 건 다 했지만.

난 계속 방에 있을 예정이라 호위도 필요 없었다. 알렉스가 몇 시간을 수련하고 와도 괜찮았다.

이 생각을 철회한 건 그로부터 십 분 뒤였다.

“왕비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새로 좋은 차가 들어왔는데 조프리 전하께 대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로잘린 왕비의 시녀였다.

향수병을 이유로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것과 왕비의 독대 요청을 거부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비스코티의 역심 가득한 귀족들조차 왕실을 무시하진 않았다. 셔벗이라고 다를 리 없다. 내가 왕비와 차도 못 마시겠다고 하면 셔벗 귀족들에게 사신단이 잘도 곱게 보이겠다.

“잠시만.”

난 바움쿠헨 백작에게 사람을 보냈다. 호위할 기사를 보내 달랬더니 본인이 왔다.

“전하, 찾으셨습니까?”

개인 경호를 맡기기엔 너무 거물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왕비의 초대야.”

“호위하겠습니다.”

백작은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내 뒤에 따라붙었다.

조프리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는 상대.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 * *

조프리의 어머니인 왕비님은 너무 젊어서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왕이 너무 빨리 늙어 버려서 그와 대비되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왕비님’이라고 하면 그 왕비님밖에 떠올릴 수 없게 되었지만. 처음엔 그랬다.

로잘린 왕비는 내가 예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왕비의 이미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맞았다.

“조프리 전하. 이쪽으로 앉으세요. 우리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죠?”

그녀가 손을 내밀어서, 난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인사가 끝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나를 자리로 이끌었다.

우리가 자리한 곳은 정원에 있는 둥근 티 테이블이었다. 연못까지 있는 본격적인 정원이라, 못 한가운데 떠 있는 연꽃이나 그 아래를 지나다니는 잉어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조프리의 정원에서 왕비님과 가끔 걷던 것이 떠올랐다.

로잘린 왕비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이 마음에 드나요? 꽃을 좀 드릴까요. 화병에 꽂아 놓으면 기분도 좋아질 거예요.”

“괜찮아요.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왕비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미소 지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건 저의 의무인걸요. 저를 너무 불편해하지 마세요, 전하. 전하께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계시니,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폐하께 아무 말씀도 듣지 못하셨나요?”

필리프 왕이 생각이 있다면 왕비와도 말을 맞춰 뒀을 텐데.

그랬다면 내게 뭘 약속했는지 들었을 것이다. 시험에 떨어져야 하는 사람에게 뭘 도와주겠다는 거지?

“물론 들었답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단순하니까요.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걸 제일로 아는 자들이죠. 전하가 가져온 화평의 기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전하께도 틀림없이 해코지를 하려 들 거예요.”

왕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때 좋은 말과 마구를 가지고 있다면 대처가 수월하시겠죠. 부디 받아 주세요. 전하께서 부상이라도 입게 된다면, 양국의 관계에도 좋은 영향이 가지 않을 거예요.”

그건 옳은 말이었다.

“다른 후보들도 이런 도움을 받고 있나요?”

“물론이에요. 콜린 코크와 다른 기사들도 왕실 마구간에서 혈통 좋은 말들을 받아 갔답니다.”

왕비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역시 안 받는 게 좋겠는데.

“감사합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모든 참가자에게 제공되는 지원인걸요.”

“말씀하신 대로 양국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남들과 같은 것을 받아도 사람들은 제가 특혜를 받았다고 의심할 거예요. 그건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실 텐데요.”

재차 설득하려는 로잘린 왕비를 막았다.

셔벗 왕이 왜 날 끌어들여서 후계자 시험 따위를 열었을까?

나야 그 속내를 다는 모르지만, 이유 하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반란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는 내전을 원치 않는다.

“필리프 폐하께선 셔벗 귀족들의 갈등을 피하고 분열을 봉합하고 싶어 하는 분이니까요. 귀족들이 폐하를 공격할 빌미를 내어줄 필요는 없겠죠.”

“다른 귀족들이 전하처럼 폐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좋을 텐데요!”

문득 로잘린 왕비가 탄식했다.

“예. 폐하께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분이랍니다. 전쟁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일뿐더러 해롭기까지 하죠. 특히 내전은 더욱 그래요. 고통받는 건 결국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백성들이죠. 조프리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셔서 스스로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이 오해는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걸까? 소문에 날개라도 달린 모양이다.

어쨌든 알아서 높게 평가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다. 난 입 닫고 앉아 있었다.

비스코티에서 온 사신이 이렇게 뛰어나다. 그러니 쓸데없이 안 건드려 주면 고맙겠는데.

“전하의 의견을 따르겠어요. 저희 왕실은 외국에서 오신 전하께 부당하게도 최소한의 지원도 하지 않는 거군요. 두 공작이 좋아하겠어요.”

로잘린 왕비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셔벗의 상황을 답답해하는 듯했다.

“전하께서 저희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라 기뻐요. 셔벗 내부의 문제에 전하를 끌어들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희가 전하께 도움을 받았으니, 저희도 전하께 도움을 드려야겠죠.”

아까 필요 없다고 한 말은 못 들은 건가?

“양국의 우애를 위해 하는 일에 대가를 바라진 않아요.”

대가를 줄 거면 평화 협정으로 주면 좋겠다.

“제 개인이 전하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건 어떤가요? 이것도 물리진 않으시겠죠.”

로잘린 왕비는 다시 청했다. 간절한 태도가 셔벗 왕과 닮은 데가 있었다. 이 관계에서 마치 내가 우위에 있는 듯한 말투다.

난 거절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렇다면 어마마마의 추모식을 열어 주세요. 제가 귀국한 뒤에라도요.”

지금 상황에 셔벗 왕이 왕비님의 추모식을 열 수는 없다. 공작들부터 반발할 것이다. 조프리를 위해 정치 행사를 열어 주려는 거냐고.

공작들이 참석하지 않으면, 귀족들도 눈치를 보며 피하겠지.

그런 추모식을 열 순 없었다. 셔벗 왕도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셔벗 왕이 자신의 여동생을 사랑했든 아니든 이젠 상관없었다. 그러나 왕비님이 셔벗을 떠난 건 이 나라를 사랑해서였다.

적어도 셔벗은 왕비님을 추모해야 한다.

로잘린 왕비가 수락할까? 그녀는 왕비님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약속했다.

“꼭 그렇게 할게요.”

* * *

백작은 티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호위하고 있었다. 내가 정원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휘파람을 불었다.

“뜻밖이군요. 그분 표정 보셨습니까? 전하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던데요. 조카는 조카인가 봅니다.”

같은 대화를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 멀어서 안 들렸나?

“죄책감은 있을 수 있겠지.”

“왕비님의 추모식을 미루는 죄책감 말입니까?”

“어머니를 잃은 조카를 이용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겠지?”

로잘린 왕비와의 대화로 확신했다. 셔벗의 왕위 계승은 오래된 문제였을 것이다. 왕비님이 비스코티에 시집온 이유이기도 했을 정도니, 조프리의 나이보다도 오래된 문제인 셈이다.

마침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조프리에게서 찾았다면, 이용하려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찾으려고 했던 내가 제일 문제긴 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턱을 긁적였다.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요.”

셔벗 왕도 그렇게 안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 없었다.

“사신단 병사 개개인에게 시비가 걸려오는 일은 없던가?”

“문제가 안 생기게 최대한 대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신분을 밝히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는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느슨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도 백작은 자존심이 강했다. 난 그에게 신분을 숨기고 최대한 몸을 사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성질엔 안 맞을 것이다.

바움쿠헨 백작을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명성을 빌려 위험을 피할 예정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나도 몰랐다.

“그대 신분을 밝히면 당장 시비는 피할 수 있겠지. 하지만 두 공작은 우릴 잡아먹으려고 들걸. 그대만 한 거물이 왔는데 어떻게 경계를 안 하겠어?”

“그런 문제라면 전하께서 셔벗행을 결정하셨을 때 이미 글러먹지 않았습니까?”

조프리가 최근에 과장된 명성을 좀 얻었대도 백작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누굴 누구랑 비교하는 거지?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난 그를 달랬다.

“조금만 더 참아.”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모시는 주군이 너무 인기 많은 것도 문제로군요.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주인으로 모신 것을요.”

그러더니 백작은 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제 아들은 어디 두고 다니십니까? 아무리 찾는 곳이 많아도 곁에 있는 자들 먼저 아껴 주십시오.”

조금 받아 주면 꼭 사람을 놀리려 든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 난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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