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8화 (248/293)
  • 248.

    셔벗 왕의 일 처리는 사사건건 수상쩍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조프리는 비스코티에서 확고한 왕위 계승권자였다. 그곳에서 조프리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는 정말 힘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하는 일마다 안 풀리는 운수의 소유자이기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조프리가 왕비님의 아들이라는 게 컸다.

    에드워드의 출신 성분은 큰 약점이었다. 왕비님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조프리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백성들은 어쨌든 왕비님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게 옳지 않겠냐고 생각하기 쉬웠고,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셔벗은 다르다.

    셔벗에서 조프리는 밀라네 공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비스코티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던 처지와 달리 이곳에서 조프리는 낯선 존재일 뿐이다.

    낯설다는 것 때문에 흥미는 불러일으키는지 몰라도 후계자는 어림없었다. 대전에서 확인했다. 셔벗 귀족들은 비스코티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스코티로 치면 갑자기 미셸 에이드 같은 사람이 사신으로 와서 ‘이 나라 후계자가 아직 안 정해졌다는 모양이군요. 이 몸도 후보로 자원하겠습니다.’ 하는 느낌 아닐까?

    반감이 드는 것과 별개로 흥미진진하긴 하겠다.

    덕분에 초대장이 밀려들고 있었다. 셔벗 귀족들은 열정적이어서, 초대장만 보내는 게 아니라 무작정 찾아와 약속을 잡으려 들기도 했다. 로웰과 이델라는 막무가내로 구는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왕자님. 조지 백작의 초청도 거절할까요? 이 사람 ‘100인 도감’에도 실린 제독인데…….”

    “당연하지.”

    “셔벗 삼 공작 중 하나인 스프라우트 공작의 초청도…….”

    “그럼. 모두 거절해.”

    도트는 괴로워하며 초대장에 대한 거절 답장을 작성했다. 내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느라 앓아누웠다는 내용이다. 병이 너무 심해 파티는 참석 못 하겠다, 미안하다, 뭐 그런 내용을 패턴만 바꿔서 쓰고 있었다.

    “비스코티가 그리우십니까?”

    알렉스가 편지를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설마. 떠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비스코티는 엄연히 말해 내 고향도 아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러려니 하고 차를 내왔다.

    난 소파에 기댄 채 김이 오르는 차를 마셨다. 도트에게 시중드는 법을 열심히 배우더니 맛이 훨씬 나아졌다.

    “많이 늘었는데.”

    내가 칭찬하자 알렉스는 기뻐했다.

    시중드는 기술을 배워서 어디에 쓰려는지 모르겠지만.

    비스코티에서 온 왕자가 향수병까지 걸렸다는 소문은 얼마 만에 퍼질까?

    셔벗 귀족들은 역시 외국 출신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숙소에 틀어박혀서 병자 행세 하기를 며칠, 시험 주제가 발표됐다.

    셔벗 왕이 친필로 썼다는 제시어가 내게도 전달됐다.

    -기사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셔벗 왕이 뭔가 수작을 부렸을까 했지만, 이건 명백하게 조프리에게 불리한 시험이었다.

    모리스 상송이 물었다.

    “숙지하셨습니까?”

    “그런 것 같아.”

    “해당 덕목을 평가하는 세부 종목은 회의를 통해 공정하게 결정될 것입니다.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드릴 터이니 잘 대비하셔서 좋은 결과를 내시길 바랍니다. 폐하께서는 후보들에게 각자 기량을 마음껏 펼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감사의 뜻을 전해 드리게.”

    “예, 전하.”

    모리스는 제시어가 쓰인 비단을 둘둘 말아서 팔에 끼더니, 뒤따르던 하인에게서 큰 단지 같은 것을 받아서 내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난 단지를 열었다. 이것도 시험 내용인가?

    색색의 반짝이는 포장지로 싸인 사탕이 단지 가득 들어 있었다.

    셔벗 왕도 알기 힘든 사람이지만, 이상하기로는 저 사람이 더했다.

    독 넣은 건 아니겠지.

    난 방에 들어가서 알렸다.

    “주제가 기사도래.”

    “기사도?”

    그레이가 반응했다.

    “응. 나 가만히 있어도 탈락할 수 있겠는데.”

    “전하께서요? 기사도 시험에서?”

    “그렇지?”

    그레이는 할 말이 많은 듯했으나 “그러시면 좋겠네요.” 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들이 전부 왕성으로 모였다. 세간에선 왕위 계승 시험의 시험관이 되기 위해 모인 이 귀족들을 다른 귀족과 구별해서 귀족원이라고 부른다는 모양이었다.

    귀족원은 일주일 꼬박 회의를 진행한 끝에 첫 번째 시험 종목을 결정했다.

    “토너먼트. 마창 경기입니다! 기사의 덕목인 용기, 명예, 강인함, 그리고 레이디에 대한 예의와 인기를 측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게다가 승패가 분명하니 평가에 이견이 갈리지 않겠지요. 폐하께서도 훌륭한 결정이라며 허락하셨습니다. 시험은 일주일 뒤 원형 경기장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조프리 전하께서도 준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의 시종이 알렸다.

    난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과 창은 각자 준비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무기와 말을 관리하는 것도 기사의 능력. 그러나 무기가 상했거나 말을 잃은 기사도 있을 터이니, 폐하께서는 혹여 요청하는 자에게 폐하의 마구간과 무기 창고를 개방하라 하셨습니다.”

    시종이 물었다.

    “이미 다른 분들은 안내를 받아 무기와 말을 보고 가셨습니다. 전하께서도 살펴보시겠습니까?”

    “괜찮을 것 같군. 나는 내 무기를 쓰겠네.”

    내 무기 같은 거 없지만. 아무한테나 빌리면 되겠지.

    시종은 세부 내역을 설명해 준 뒤 마지막으로 말했다.

    “참가자들을 위해 왕궁 연무장을 개방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이용해 주십시오.”

    “고맙군.”

    난 시종을 돌려보내고 문을 닫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셔벗 왕이 원했던 건 이 판을 만드는 것뿐이었던 모양이다. 나를 두 후보의 라이벌로 계속 띄워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난 말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승마가 내 특기였던 적은 없다.

    내 승마 스승의 아들이자 현재 내 트레이너를 하고 있는 알렉스는 그 사실을 대충 알고 있었다.

    “전하께선 마창 경기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 토너먼트 자체가 비스코티에선 인기 없잖아. 출세하고 싶은 기사라면 왕실 주최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마창술을 연습하려 하진 않을걸.”

    왕은 마창 대회엔 관심 없었다. 그런 걸 열 예산과 시간이 있으면 사냥을 갔겠지.

    “혹시 창을 들어 보신 경험은 있으십니까?”

    “성문 경비병들이 드는 거 같은 거?”

    “그런 게 아니라 기사들이 사용하는…….”

    “아, 모양이 달랐나?”

    그랬던 것도 같다. 내가 대충 답하자 알렉스를 곤란한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봤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난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난 경기 시작하자마자 기권할 거니까.”

    시작하자마자는 곤란하려나? 셔벗 귀족들의 반감을 사면 안 된다.

    내 임무는 후계자 시험에서 떨어지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셔벗과 우애를 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권 교체기에는 크고 작은 반란이 잦았다. 에드워드가 왕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인지 몰랐다. 비스코티를 안정시킨 뒤에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단순히 왕실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눈치를 보기 마련이었다. 왕실이 혼란스러운데 셔벗 같은 나라에서 비스코티를 적대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눈치를 보던 귀족들도 이때다 싶어 제 욕심을 채우려 들기 쉬웠다.

    셔벗이 거병하지 않더라도, 두 나라 사이에 평화 기류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전쟁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

    에드워드는 ‘불만을 품은 사람은 언제든 터질 테니 지금 죽여 놓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서야 폭군이었다.

    영원히 그 불만이 안 터지게 조치하는 게 맞지 않나?

    그리고 이 조치는 내 활약에 달려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토너먼트면 승자가 위로 올라가는 그런 방식입니까?”

    “응. 그렇겠지?”

    나도 잘 모르지만.

    “대진표는 이미 나왔습니까?”

    “아니. 당일 추첨으로 결정할 거래. 미리 알면 조작할까 봐 그러나 본데.”

    세 명만 참가하는 토너먼트는 없다. 셔벗에서 이름난 기사들이 시험을 돕기 위해 참가했다.

    물론 후보들과 아무 관계 없는 기사들을 선별했으나, 이 기사들이 모시는 귀족은 공작과 어떤 관계일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도 이 시험을 통해 긴밀해지고 싶어 하는 귀족도 나올 법했다.

    “그렇다면 첫 대진에서 누굴 만날지도 알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왜?”

    “미셸 에이드는……. 저열한 자입니다. 아마 전하를 만나게 되면 비겁한 수를 쓸 겁니다.”

    얼굴이 심각하더라니 귀여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사실을 알려 줬다.

    “알렉, 미셸이 비열한 수를 안 쓰면 날 못 이길 것 같아?”

    “…….”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차마 부정은 못 하겠는 모양이다.

    그리고 난 항복할 거라니까. 좀 버티는 척하다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창을 떨구면 되려나.

    그 초반 버티기가 문제이긴 했다.

    “서로 이름도 튼 사인데 살살 해 주겠지. 만약 만나게 되면 잘 말해 놔야겠네.”

    난 항복할 테니까, 그때까지 살살 상대해 달라고.

    아부도 하면서 비위를 맞춰 주면 내 의도에 따라 줄 만한 상대였다.

    “대신 참가는…….”

    “당연히 안 되겠지?”

    “제가 전하의 오른팔임을 증명하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알렉스는 낙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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