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7화 (247/293)
  • 247.

    왕비는 두 공작이 초조해하는 이유도 알 듯했다. 조프리 왕자의 셔벗행이 알려짐과 동시에, 수도에는 비스코티의 신문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비스코티에서는 이런 물건이 읽히는군요.’

    ‘이 기자라는 자가 어떻게 살아 있을까? 비스코티의 귀족들은 권위가 약한 모양이에요. 이런 모욕적인 기사를 쓴 평민을 살려 두다니.’

    로잘린 왕비의 시녀들도 흉을 보며 즐겁게 읽고 있었다.

    왕은 수도를 떠나 있었으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은밀한 취미 생활이 그간 수도에 퍼졌다는 걸.

    왕비는 신문이 왜 유행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외국의 소식을 알기란 쉽지 않다. 그곳에서 지내다 온 귀족이 사교장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소문으로밖에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온 수도의 귀족이 조프리 왕자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문을 찾아 읽었고, 왕자에게 굉장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왕비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왕성으로 돌아온 남편이 ‘조프리 왕자는 왕위에 뜻이 없다’고 알리기 전까지.

    “조프리를 귀국시킬 때까진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왕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대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폐하?”

    “두 공작이 그 애를 공격하더군요. 협상을 파투 내려 하는데도 조프리는 의연하게 대처했어요. 그 애는 정말 영리하고 용기 있는 아이예요. 그래서 공작들이 더 조급해진 거겠지만.”

    왕은 들뜬 듯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로잘린 왕비는 왕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듯했다.

    “조프리까지 세 명의 후보를 후계자 시험에 올리겠다고 했어요. 귀족들을 평가원으로 세워 뒀으니 공작들도 조프리에 대한 적개심을 낮추겠지요. 그 아이는 비스코티를 사랑하고 또 평화를 바라요. 무사히 비스코티로 돌려보내 주어야지 않겠어요? 삼촌이 되어서 그것조차 못 들어주면 안 되잖아요.”

    “조프리 전하께서는 권력보다 자유를 사랑하는 분이군요. 당신처럼.”

    왕비가 웃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쉬워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왕에게 몸을 기댔다. 왕도 동의했다.

    “정말이에요.”

    “왕자로서가 아닌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이미 신문에서 많은 이야기를 읽었으나 그녀는 부러 물었다. 왕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수도로 오는 마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아쉬웠다.

    조프리 왕자가 왕성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부부가 찾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왕자가 우리의 아이가 되어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 * *

    필리프 왕을 만나러 국경에 다녀온 일로 미셸 에이드는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다. 에이드 공작은 자중하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국왕이 후계자 시험을 보겠다고 공개하자 다시 그를 달랬다.

    “그래. 네가 왕을 염탐하고 돌아와서 내가 대응 방안을 짤 수 있었구나. 그건 잘했다고 해야겠다.”

    공작으로서는 시험을 앞둔 아들이 너무 주눅 들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그 효과가 과하게 좋아서 미셸은 기고만장해졌다.

    “네가 보기에 조프리 왕자는 어떤 사람이더냐?”

    “편지로 말씀드린 대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명예를 모르고 수치도 모른다고 할까요. 기사도를 가진 자는 아닙니다.”

    “얕보지 마라! 적은 왕자만이 아니야. 필리프 왕이 무슨 속셈인지 늘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왕이 악수를 두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군.”

    에이드 공작은 코웃음을 치더니 미셸에게 코크 저택을 다녀오라고 명령했다.

    “코크 공작과 손을 잡기로 했다. 적어도 조프리 왕자를 떨어뜨리는 데까진 협력해야 하겠지. 너도 콜린과 손발을 맞춰 둬라.”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조프리 왕자는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녀오기나 해!”

    미셸은 방문 약속을 잡았다. 방문일이 다가오기 전날, 필리프 왕은 첫 번째 시험 주제를 발표했다.

    “후보가 셋이니 총 세 번의 시험을 치르는 것이 공정하겠군. 마침 세 후보는 짐이 높게 평가하는 왕의 자질을 각기 지니고 있으니 이를 시험대에 올리겠네. 첫 번째로는, 그래……. 기사도가 좋겠군.”

    미셸은 긴장을 놓아 버렸다.

    이건 그를 위한 시험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콜린은 우물쭈물하며 미셸을 맞았다. 미셸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퍽퍽 쳤다.

    “언제 봐도 우중충한 꼴이로군? 근육과 원수졌냐? 뭐, 너도 소식은 들었겠지.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내 활약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멋대로 손대지 마.”

    콜린은 용기 내어 말했으나 미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친근하게 콜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기사의 팔뚝이 어깨에 얹히자, 콜린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야 걱정이 태산이신 분이라 나보고 너랑 손을 잡으라는 둥, 조프리 왕자를 견제하라는 둥 하시지만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하겠냐? 기사도를 견주는 일에! 그래도 뭐, 아버지가 지시가 있으니까. 네가 말에서 떨어져서 엉엉 울고 있으면 내가 주워는 주지.”

    미셸은 으스댄 뒤 저택을 떠났다.

    콜린은 가슴을 들썩이며 분을 참았다. 성마르고 오만한 놈!

    분통이 터지게도 이번만은 미셸의 말이 옳았다. 이 시험은 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기사도라니? 콜린도 귀족 자제로서의 소양은 익혔으나 무예에는 소질이 없었다. 미셸과 겨루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가 어째서 토너먼트 예선조차 참가하지 않았겠는가?

    조프리 왕자 역시 무예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이 시험은 미셸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콜린은 미셸처럼 조프리 왕자를 무시하진 않았다. 코크 공작과 콜린은 필리프 왕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왕자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귀족들에게 평가를 넘겨서는 안 됐다.

    왕은 무슨 속셈일까?

    겉으로는 명백히 두 공작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코크 공작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미셸 에이드보다 네가 낫지 않겠느냐?’

    오만한 미셸 에이드는 어떤 귀족들에게는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으나, 반대로 어떤 귀족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후자에는 콜린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공작은 손을 잡고 조프리 왕자를 탈락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각기 귀족들을 포섭하느라 열심이었다.

    필리프 왕은 시험 주제를 정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귀족들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라 전역의 귀족을 시험관으로 불러 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작위만 가지고 있다고 다 귀족은 아니지 않은가?

    왕은 셔벗 전역에 파발을 보내 각 지역을 대표할 귀족을 선별해 수도로 올리라고 명했다.

    이들이 왕성에 모이면 회의가 시작될 것이다.

    -기사도를 확인하려면 어떤 시험이 필요할 것인가?

    콜린도 코크 공작이 포섭한 귀족을 통해 시험 내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시험이어야 미셸을 고꾸라뜨릴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말에서 떨어져서 엉엉 울고 있으면…….’

    문득 콜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셸 에이드. 오만한 놈아. 네 발에 네가 걸려 넘어지게 해 주지.”

    * * *

    서궁은 왕성을 방문한 손님에게 배정되는 처소였다. 그곳으로 짐을 옮긴 나는 곧 방에서 나갈 수 없게 됐다.

    “밖은 어때?”

    도트는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염탐했다.

    “하인들이 서성이고 있어요, 왕자님.”

    “아직도? 몇 명이나?”

    “하나, 둘……. 열두 명은 되는 것 같아요, 왕자님!”

    보이는 복도에만 열 명이 넘는 하인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셔벗 왕은 공작들이 내게 관심을 접을 거라고 했지만 귀족들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 없었다.

    그야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외국에서 사신으로 온 왕자가 갑자기 후계자 시험을 본다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겠지.

    하지만 난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고,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서궁에 묵는 귀족들은 점점 늘어가기까지 했다. 창밖이 시끄럽기에 내려다봤다. 또 한 무리의 일행이 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이 전부 시험관이었다. 이들과 얼굴을 맞대서 좋을 일이 없다.

    셔벗 왕은 나를 특별 취급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사신단을 서궁으로 옮겼다. 하지만 난 의문이었다.

    시험관으로 올 귀족들이 서궁에 묵는다. 시험을 칠 나도 서궁에 묵는다…….

    이거 이상하지 않나?

    원래 시험관과 수험생은 분리하는 게 원칙 아니야?

    시험 기간엔 학생들의 교무실 출입도 막잖아. 난 시험관들과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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