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6화 (246/293)
  • 246.

    셔벗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곳의 왕은 오래도록 후계자가 없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는 두 공작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서 나라는 평화롭게 굴러갔다.

    그런데 왕은 도무지 후계자를 고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두 공작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두 공작은 역심을 품게 되었다. 왕이 후계자를 고르지 않는다면 그들이 직접 왕위를 가져오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왕의 조카인 조프리가 사신으로 왔다.

    두 공작은 다른 후계자감을 원치 않았고, 어떻게든 조프리를 제거하기로 한다.

    비스코티의 국내 사정은 엉망이다. 셔벗에 감히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권력을 잡은 에드워드 왕자도 자신의 경쟁자가 외국에서 죽었다고 하면 내심 기뻐하겠지.

    뭐 이런 생각이었을까?

    그런데 왕은 몸소 조프리를 호위해서 수도까지 데려왔다. 두 공작은 조프리를 제거할 수 없었으나 왕을 욕할 명분이 생겼다.

    밀라네 공주의 아들이라고 해도, 조프리는 평생을 비스코티에서 산 사람이 아닌가? 셔벗이 아니라 비스코티를 위한 통치를 하려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조프리는 불경한 일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자신의 부왕을 해하려 하다니, 이와 같은 자를 어찌 후계자로 삼을 수 있는가.

    코크 공작은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자 했다. 그가 대전에서 귀족들을 상대로 연설한 까닭이 그것이다.

    그러나 왕은 세 후보를 놓고 경쟁을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평가 권리를 왕이 아닌 귀족들의 손에 쥐여 줬다.

    이제 두 공작이 상대해야 하는 건 자신의 영향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다. 이 귀족들은 위험하게 반란 같은 일에 참여하기는 싫을 것이다.

    그들이 지지한 후보가 왕이 되면 손쉽게 공신이 될 텐데, 누가 목숨을 걸고 반역을 일으키고 싶을까?

    더 좋은 점은, 귀족들의 지지가 단순한 지지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수의 귀족이 ‘뛰어나다’고 평가한 후보가 후계자가 된다지 않는가?

    그들이 왕을 세우는 것이다. 후계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사야 할 것이다.

    귀족들은 이 제안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다.

    두 공작에게도 이는 좋은 제안이었다. 귀족들을 포섭하기만 하면 그들의 자식이 왕이 된다지 않는가?

    조프리 왕자는 셔벗에 아무런 기반이 없다.

    후계자가 되는 건 그들의 아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시험은 조프리에게도 좋은 방안이 된다.

    두 공작의 경계심은 서로를 향할 것이고, 그들의 관심은 귀족들을 향할 것이다.

    조프리는 몸을 사리고 있다가 시험에서 탈락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셔벗 왕과 새로 정해질 후계자에게 비스코티와의 평화 협정을 다시 제안하면 되는 것이다.

    완벽한 계책이 아닌가?

    셔벗 왕의 주장은 그랬다.

    그레이는 어이없어했다.

    “그래서 그 말을 믿으셨어요?”

    “아니.”

    그레이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이었다.

    “믿든 말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 말이 그럴듯하다는 거니까.”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셔벗 왕의 말은 항상 그럴듯했다. 왕비님 이야기도 그랬으니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그를 믿는 게 정말 중요한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난 시험에서 탈락하면 돼. 애초에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잖아.”

    이 나라도 막장인 건 알겠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지금 셔벗이 타국과 전쟁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 * *

    그레이는 조프리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지금 셔벗이 타국과 전쟁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은 그레이에게 에드워드의 발언을 상기시켰다.

    셔벗 왕의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위협했을 때. 에드워드가 뭐라고 했던가?

    셔벗의 내부 정황상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단순한 위협일 뿐이라고.

    그 말대로라면 조프리는 셔벗에 올 필요 없었다.

    그러나 조프리는 셔벗행을 결정했다. 평화 협정을 위해서였다.

    셔벗의 행동이 위협일 뿐이라도, 현재 비스코티에는 큰 해가 되기 때문이겠지. 비스코티의 어리석은 귀족들은 나라의 우환을 기회라 여길 뿐이다. 왕권 교체기의 크고 작은 반란들이 그래서 생기는 게 아닌가?

    조프리는 고귀한 동기로 행동했다. 그가 할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는 왜 그랬단 말인가?

    조프리는 셔벗으로 출발하기 전, 이미 에드워드에게 셔벗에 가면 후계자 다툼에 휘말릴 거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했다.

    에드워드는 이미 조프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 예상했다는 뜻이다.

    조프리는 상황을 단순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셔벗 왕에게 어떤 속내가 있든 자신은 시험에 탈락하리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레이가 셔벗 왕이라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프리가 시험을 통과하게 만들 터였다.

    셔벗 왕은 조프리에게 지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옆에서도 그게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어도, 조프리는 후계자로서 너무도 매력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이도 알 만한 일을 에드워드가 모를 리 없다.

    셔벗에 도착하면, 조프리는 왕의 후계자가 된다.

    에드워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조프리를 셔벗에 내어주지 않으려고 했을 때부터.

    그레이의 걸음이 멈췄다.

    ‘셔벗은 위험하니까.’

    에드워드는 그렇게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셔벗이 위험하긴 할 것이다. 셔벗의 두 공작이 가만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셔벗 왕이 그렇게까지 조프리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가 조프리를 보호할 것도 알았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조프리의 셔벗행을 막은 이유는…….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얼마나 좋아했고 또 미워했는지, 그레이는 알고 있었다.

    조프리가 사경을 헤맬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도.

    그레이는 기계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웰과 이델라가 장부를 맞춰 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레이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전하께서 셔벗 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게 사실이에요?”

    “전하께선 셔벗에 남으시는 건가요? 비스코티로 돌아가지 않으세요?”

    그레이는 이델라를 쳐다봤다.

    비스코티로 돌아가지 못하냐고?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 셔벗 왕의 후계자가 셔벗이 아닌 어디에 머무른단 말인가?

    이델라는 공식적으로 사신단 소속이었다. 임시직이지만 비스코티의 관리이니 사신단 업무를 마치면 귀국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조프리 왕자가 그렇게 두지 않겠지. 왕자의 측근들은 셔벗에 남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레이는 아니다. 그는 귀국해야 했다.

    “각하?”

    “후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시험을 보는 겁니다. 일은 안 하고 소문만 듣고 다니는 모양이군요. 시간이 많은 모양인데, 사신단 행동거지 단속 좀 하세요.”

    그레이는 싸늘하게 쏘아붙였으나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공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레이는 문득 에드워드의 이유가 이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어 떨쳐 냈다.

    두 사람은 형제이지 않은가?

    * * *

    로잘린 왕비는 정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비스코티에서 유행이라는 이 간행물은 몹시 흥미로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수십 개의 신문을 쌓아 두고 오래된 날짜에서 가까운 날짜순으로 읽어 가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가 반역죄로 쫓기고서부터 비스코티의 상황은 급변했다. 신문은 왕자를 지지하는 백성들과 왕자 자신의 행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궁인들에겐 방해하지 말라고 말해 두었으니, 정원에 들어설 사람은 필리프 왕밖에 없었다.

    왕은 그녀에게 곧장 다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여느 때처럼 다정했으나 한숨을 쉬는 것을 보니 걱정이 있는 듯했다.

    로잘린 왕비는 다정히 물었다.

    “만남은 어떠셨나요, 폐하?”

    “코크 공작이 초조해하고 있더군요. 두 공작이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이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들을 너무 자극한 모양이에요.”

    “협상이 잘 되지 않았군요.”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 애는 왕위에 욕심이 없다고 했는데 내가 그 애를 끌어들이고 말았어요. 두 공작은 추모식을 여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밀라네가 셔벗의 공주였던 시절을 잊은 것처럼.”

    “공주님의 추모식이 그분의 정치적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두 아들이 장성한 지 오래니, 공작들도 예민해져 있는 것이겠죠.”

    로잘린 왕비는 남편을 달랬다. 남편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옆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지친 남편의 어깨를 매만졌다. 그녀와 남편은 존경받는 왕실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는 평가였다. 왕실 안에 앉아 있어서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왕은 잠행을 즐겼는데, 덕분에 그녀도 조금 부유한 평민인 척하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했다. 백성들은 국왕 부부를 존경했다.

    신문을 읽어 보니 조프리 왕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전하의 취미는 잠행.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백성을 사랑하시어 거리에서 실생활을 알고자 하셨다.’ 그들 부부와 취미도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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