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5화 (245/293)
  • 245.

    왕의 시종을 앞세우고 복도를 걷는데 궁인들이 나를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나를 외국 사신 취급했다면 이젠 다른 종류의 관심이 느껴졌다.

    익숙한 관심이라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어딜 가나 왕위를 노리는 야심가가 되는 건 조프리의 팔자인 모양이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화가 가라앉자, 다시금 상황이 의아해졌다.

    내가 셔벗 왕을 믿은 건 그가 왕비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까지 해서 속일 필요가 없다. 셔벗 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기 여동생 얘기까지 들먹이며 조프리를 속인다고?

    시종이 내 도착을 알렸다. 문이 열리자 시종은 알렉스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까지입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괜찮아. 다 들어오라고 해.”

    문을 연 사람은 셔벗 왕이었다. 그는 몸소 문을 붙잡은 채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나와 알렉스가 방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난 방에 다른 호위 기사가 있을 줄 알았지만, 보이는 사람은 셔벗 왕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외국 왕자와 그 호위 기사를 방에 들인 셔벗 왕이 대뜸 말했다.

    “궁을 바꿔야 할 것 같구나. 이대로라면 귀족들의 오해를 살 것 같아.”

    오해 사라고 배정한 숙소 아니었나?

    “어디로요?”

    “손님을 머물게 하는 서궁에서 묵어야 할 것 같구나. 번거롭겠지만 지금 짐을 옮기겠니?”

    애초에 사신단을 서궁에 머물게 했으면 오해 살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궁을 옮기라는 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밀라네 공주 궁이 아니라요?”

    “그곳에 머물고 싶니?”

    셔벗 왕은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에는 절 그곳에 머물게 하려고 하셨잖아요. 어마마마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왜 나를 불렀지? 여동생이 죽고 홀로 남은 조카가 걱정돼서 불렀다는 헛소리는 그만두고 그가 털어놨으면 했다.

    에드워드는 내가 셔벗에서 못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그가 한 예언이 하나둘 사실로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불길했다.

    그걸 예언인지 저주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진짜 이뤄지면 곤란한 정도가 아니다. 사신단은 나만 믿고 셔벗까지 따라왔다. 내겐 그들을 안전히 돌려보내 줄 의무가 있다.

    에드워드에게도, 난 돌아가겠다고 자신했다.

    “어떻게 알았니?”

    셔벗 왕이 부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놀라기만 했다. 그 정도가 아니다. 그는 기뻐하는 듯했다. 영특한 조카를 칭찬하는 듯한…….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처음엔 그랬단다. 널 후계자로 삼으면 어떨까 했어. 하지만 네가 싫다고 했잖니?”

    “그런데요?”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시켜서 뭐 하겠니?”

    옳은 말이다. 그래서 이상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멀쩡한 소리만 하지?

    “제가 싫어한다는 걸 아시면서……. 왜 저를 후계자 시험에 집어넣으셨는데요?”

    “그래. 그것 말이다. 나도 코크 공작이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단다. 하지만 공작이 조급했어. 그렇지 않니?”

    “네?”

    “공작의 눈에 네가 너무 괜찮은 후계자감으로 보인 모양이구나. 물론 누구 눈에도 그렇게 보이겠지. 대전에서 네 대처는 훌륭했어. 사실 네가 돌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기도 하고…… 그게…… 부끄러운 얘기지 않니.”

    셔벗 왕은 곤란해했다.

    곤란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신데요?”

    “왕이 되어서 공작들이 역심을 품게 만들다니…….”

    “…….”

    역모?

    이거 내가 들어도 되는 얘긴가?

    * * *

    숙소로 돌아가자 그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셔벗 왕이 뭐라던가요?”

    그의 질문에 대답하려다 시선을 탁자로 향했다. 내 눈을 사로잡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흰 편지 봉투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에드워드의 답장이다.

    “잠시만.”

    난 편지를 펼쳤다. 필리프 왕과의 대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여기 해답이 좀 있을까?

    -조프리에게.

    당신이 제게 먼저 편지하리라고는 감히 기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먼 곳에서 이런 선물을 보내 주시니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됩니다.

    지난 편지의 답장으로 존댓말은 그만두라고 말해 뒀는데, 그 편지는 받지 못한 모양이다.

    안부 인사는 빠르게 읽고 지나쳤다.

    이 와중에도 문장 하나가 걸렸다.

    요새도 에드워드는 의욕 없이 멍한 걸까?

    -아무 위험 없이 국경에 도착했다니 다행이지만, 경계를 풀지 마세요. 셔벗 내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셔벗의 귀족들이 근래 군수품을 모으고 말먹이를 구하는 정황이 있습니다. 이들이 키우는 군대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화적이나 해적을 물리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한 셔벗 왕은 비스코티를 명분 삼아 군대를 크게 일으켰는데, 이 병사들은 비스코티 국경으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얼마 전 알게 된 정보입니다. 파이 공작은 제게 셔벗 귀족 모리스 상송을 억류한 적이 있다고 밝혔는데, 상송은 알다시피 셔벗의 사신으로 비스코티를 찾은 인물입니다.

    그가 처음 비스코티를 찾았을 때, 그는 왕성의 궁인들에게 조프리 왕자의 평판을 묻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를 공작들이 알고 있었다면, 불충한 마음이 왕에게 향한 것도 당연하겠지요.

    상송이 정예군의 호위를 약속한 건 호의에서가 아닙니다. 그대를 살려 후계자로 만드는 것이 셔벗 왕의 뜻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셔벗에 솜씨 좋은 스파이라도 심어 놓은 걸까? 같은 정보를 얻어도 난 에드워드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지 못했겠지만.

    셔벗 왕의 호위가 아니었다면 난 본래 공작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던 모양이다.

    에드워드가 한 말은 방금 전 내가 셔벗 왕에게 듣고 온 말과 거의 흡사했다.

    숨이 막혔다.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지만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이게 뭐가 후계자 분쟁이야?

    가면 내전에 휘말릴 거라고 말해 줬어야지, 에드워드.

    불평할 순 없었다. 위험할 걸 모르고 온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에 걸릴 뿐이다.

    내가 끌고 온 사신단 인원이 총 몇 명이더라?

    한숨이 나왔다.

    편지를 내려놓으려는데, 다음 장이 손에 잡혔다.

    -당신이 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무리하지 마세요.

    -당신의 에드워드.

    이상하게 조금 숨통이 트였다.

    “에드워드 전하께 온 편지죠? 읽어 봐도 되나요?”

    그레이가 손을 내밀었다. 난 그에게 첫 장만 넘기고 두 번째 장은 접어서 품에 넣었다.

    그레이는 위에서 아래로 훑는 속도로 내용을 읽더니 편지를 내려놓았다.

    “전쟁은 명분 없이 일어나지 않아요.”

    “알아.”

    “셔벗 왕은 현군이죠. 공작들이 역심을 품었대도, 반란은 일으킬 수 없어요. 명분이 없다면. 전하께서 그들의 명분이 된 거군요.”

    대전에서 코크 공작이 큰소리친 대로다.

    난 한번 반역죄로 쫓긴 몸이다. 누명이라고 판결 나긴 했지만,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을 것이다.

    상대는 셔벗 공작이다. 셔벗 내에서 조프리를 악당으로 만드는 건 쉽겠지.

    그런데 생각할수록 의문이 들었다.

    “셔벗 왕이 조프리를 후계자 삼아서 좋을 게 뭐지?”

    외국에서 평생 산 애다. 셔벗 문화도 익숙하지 않고, 나라에 애정도 없을 텐데.

    나라면 이런 애 후계자로 안 삼는다.

    에드워드의 편지를 뒤집어 봐도 그 부분은 설명이 없었다.

    “예? 당연하잖아요. 셔벗 왕 입장에서 전하만큼 매력적인 후계자가 어디 있어요?”

    “아, 그래?”

    조프리에게 나도 모르는 매력이 있었다고?

    “뭘 모르는 척이세요. 전하께서는 셔벗에 기반이 없잖아요.”

    그게 왜?

    그레이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셔벗 왕이 왜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겠어요? 후계자를 고르는 순간, 그자의 출신 가문에 권력이 넘어갈 테니까요. 전하는 그럴 걱정이 없잖아요.”

    그럴듯하다.

    난 공작들이 왜 그렇게 조프리를 경계하나 싶었는데, 경계할 만했다.

    조프리는 왜 쓸데없이 조건이 좋을까?

    “전하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전하의 뒷배는 셔벗 왕 그 자체가 되죠. 충성스러운 가문의 여식을 전하의 짝으로 맺어 준다면 외척도 경계할 필요 없어요. 셔벗 왕은 전하께서 비스코티 왕위 다툼에 탈락한 걸 내심 좋아했을지도 모르죠.”

    “그건 아닐걸.”

    그레이는 당황한 듯했다.

    “죄송해요. 그분이 왕비님의 비극을 기뻐했을 거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네 말대로라면 셔벗 왕은 반드시 나를 후계자로 삼아야 하잖아.”

    “그러려고 하고 있잖아요?”

    “아니라던데.”

    “예?”

    그레이가 인상을 구겼다. 또 무슨 소리를 듣고 왔냐는 표정이다.

    “나보고 시험에서 떨어지라던데. 공식적으로 후계 자격을 잃으면, 난 안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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