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4화 (244/293)

244.

그레이의 대본에 따르면 조프리가 그 절묘한 시기에 누명을 쓰게 된 이유는, 그 범인들이 심신이 미약한 왕을 곁에서 농락하던 간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손발처럼 일했기 때문에 왕비님의 사고 소식도 빨리 전해 들을 수 있었고, 그걸 이용할 계획도 짤 수 있었다고.

그들은 영특한 조프리 왕자가 방해가 되어 왕성에서 영원히 쫓아 버리려고 했다는 모양이다.

‘내가 왜 방해가 되는데?’

‘전하께서 폐하께 늘 충언을 올려 간신들을 내치라 하셨기 때문이죠.’

그레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난 왕과 하루에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지만, 그런 걸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은 에드워드 전하께서 공개 처형 하셨죠. 셔벗이 모를 리 없으니 비스코티에서 그 죄인들을 얼마나 철저히 벌했는지 언급하세요.’

‘그 일로 에드워드 폭군 소리 들었잖아.’

‘무슨 상관이에요?’

‘…….’

‘에드워드 전하께선 또 조프리 전하를 보호하셨죠. 셔벗에서 그게 보호가 아니라 구금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봐?’

‘……에드워드 전하께서 이후 조프리 전하 피습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말씀해 주셔야죠.’

‘다 손 놓고 방관했잖아.’

‘왕도의 경비병을 전부 전하 손아귀에 쥐여 주셨잖아요!’

그레이의 신경질을 받아 주며 짠 대본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예외 사항은 없었다. 조프리를 얼간이 취급하다니 에이드 공작은 영리했다. 나야 그렇다 치고, 그레이는 왜 상대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 못 했을까?

아무튼 예상 답안은 없었고, 필리프 왕의 도움도 없었다. 나 스스로 대응해야 했다.

난 그냥 공작을 마주 봤다.

“그렇군요. 그런 가능성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내가 감탄했다는 듯 말하자, 공작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수작이냐는 표정이다.

“하나 저도 의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를 사신으로 지목하신 분은 현명한 필리프 폐하이시지 않습니까. 저는 저의 명예와 양심에 따라 폐하께 아는 바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필리프 왕에게 따지라는 말이다.

공작은 대꾸하려 했으나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이 경우 내가 어리석은 자라고 우겨도 상관없었다. 그런 사람을 사신으로 지목한 필리프 왕을 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실례합니다. 전하께서는 듣던 대로 현명하신 분이군요! 저도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코크 공작.”

필리프 왕이 승낙했다. 이 사람도 공작이었다.

키가 작은 코크 공작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전하. 전하께서 비스코티에서의 기반을 잃은 지금, 필리프 폐하의 곁에 찾아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물론 전하께서는 사신으로 찾아오셨으나, 왕이 사신을 맞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 왕과 같은 마차에 사신이 오르는 경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의문의 답을 전하께선 아실 듯합니다.”

코크 공작은 공손하게 말했으나 내용이 불온했다.

대전이 얼어붙은 게 느껴졌다. 에이드 공작은 필리프 왕의 권위를 존중해 입을 닫았으나, 코크 공작은 오히려 선을 넘었다.

난 다시 필리프 왕을 돌아봤다. 왕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조프리 왕자를 향하는 것이 아닌 듯한데.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공작?”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 보게.”

코크 공작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었다.

“폐하께서 후계자 자리를 비워 두신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간 저희들은 폐하께서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갑작스레 외국의 왕자를 총애하시니, 저희는 혼란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조프리 왕자는 비스코티에서 이미 반역으로 쫓긴 적이 있는 몸. 폐하께서 어떤 혜안을 가지고 계시는지 어리석은 저로서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대전이 조용해졌다.

이상한 일이지만, 난 왕위 다툼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급되는 걸 처음 봤다. 그게 날 공격하며 시작됐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비스코티에서 왕위 다툼은 일상이었다. 에드워드와 나는 열한 살에도 열일곱 살에도 왕위를 두고 다투는 형제였다. 우리가 사이가 좋든 나쁘든 관계없이. 당연한 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왕이 누구를 총애하는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가 어렸을 때 왕은 자신의 총애를 숨기려 했으나, 로제 부인 사후에는 태도를 바꿔 자신의 총애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장성한 뒤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필리프 왕은 조프리를 이용하기 위해 부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군. 마침 이 자리에는 왕위 계승 서열 상위인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군. 나도 나이가 들었고……. 슬슬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했네.”

모든 귀족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코크 공작이 물었다.

“혹시 이미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으시다는…….”

필리프 왕은 턱을 만졌다. 그는 난처해 보였다.

“그게 말일세, 그대도 알겠지만 후보들이 모두 훌륭해. 미셸은 용맹하고 콜린은 영리하며 조프리 왕자는 자애롭지 않은가?”

뭐?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끼워 넣은 필리프 왕이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오랜 기간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더군. 모든 후보가 훌륭하니 누구를 선택하든 나는 후회할 듯해. 그래서 생각해 봤네. 누가 왕이 될 자질을 지녔는지, 셔벗의 현명한 귀족들은 알고 있지 않겠나?”

“예?”

이해 못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코크 공작도 에이드 공작도 멍하니 필리프 왕을 쳐다봤다.

“후계자 시험을 치르잔 말일세. 그대들을 시험관 삼아.”

필리프 왕이 미소 지었다. 자애로운 미소였다…….

* * *

“제가 뭐랬어요!”

“미쳤나 봐!”

“의심스럽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거짓말이야?”

그레이와 나는 각자 떠들었다. 어처구니가 없고 열도 받아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레이는 이미 이마까지 벌겠다.

필리프 왕이 내게 무슨 말을 떠들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날 잠깐 속이기 위해 그런 얘기를…….

아니…….

도트가 들어왔다.

“앗. 두 분 논의 중이세요?”

“아니. 조사해 왔어?”

“예. 지금 말씀드릴까요?”

그레이가 끼어들었다.

“무슨 조사를 하셨는데요?”

난 손을 휘저었다. 말하기도 싫었다. 그레이가 들어도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왕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전 왕비님의 궁을 정리한 건 한참 전이라나 봐요. 궁인들이 안 가던 장소를 드나들어야 해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궁을 왜 정리하는지 아는 사람 있었어?”

“아니요. 그것까진…….”

기대도 안 했다. 궁인들은 명령을 받으면 따르는 사람이지 질문하는 사람은 아니다.

로잘린 왕비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셔벗의 궁인들은 왕비님의 궁을 실제로 정리했다. 누군가를 위해서인지,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로잘린 왕비가 조프리를 이 궁에 머물게 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필리프 왕이 조프리의 숙소를 이곳으로 정했다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내겐 죄책감이 어떻다고 말해 놓고, 조프리를 이용할 계획을 이미 짜 둔 셈이다.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게 내 전문인 줄 알았는데, 이건 짐작을 해도 배신감이 든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난 그레이에게 추측한 내용을 말해 줬다. 그레이는 얄밉게 굴었다.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셨어야죠!”

“내가 행동만 봤으면 넌 이미 왕족 모욕죄로 처벌받았어!”

“제가 전하를 모욕했다고요?”

“아니, 왕족 무례죄?”

“그게 뭔데요! 그런 법 없거든요?”

아무 쓸모 없는 말다툼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기운만 빠지고 성질은 여전히 뻗쳤다. 난 머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도트가 달려와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알렉스가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어이없는 모양이다…….

“전하, 필리프 왕의 시종이라는데요.”

도트가 알렸다.

난 대번에 삐딱해졌다.

“동행하겠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독대를 원하시기 때문에…….”

“문 앞까지 동행하는 건 괜찮지?”

난 시종의 말을 자르고 나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날 부르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의 말이 옳았다. 난 사신으로 와서 셔벗 후계자 분쟁에 꼼짝없이 휘말렸다. 에드워드가 또 뭐라고 했더라?

‘거기서 못 돌아올 텐데.’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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