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문제가 생길 만한 부분이 또 어디 있을까.
나를 견제하던 미셸도 물리쳤고 셔벗에서 비스코티의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필리프 왕은 조프리에게 호의적이고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응할 것 같았다.
다른 귀족들이 비스코티와 갈등을 빚고 싶어 해도, 지금까지 분위기라면 필리프 왕이 막을 듯했다. 누굴 의지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에드워드가 이야기한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걔가 그렇게까지 생각한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위험하지도, 이곳에 영원히 억류될 것 같지도 않았다.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알아서 해결했다.
사신단은 환대받고 있었다. 한때라고는 해도 왕이 사용하던 거처를 사신에게 내어주다니 대단한 호의였다.
그 말은 필리프 왕이 조프리를 비스코티의 사신이라기보다 조카로 대한다는 의미였고…….
‘사실 전하께 다른 궁을 준비해 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 궁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을 수 없게 되어서, 폐하의 명으로 장소를 바꿨답니다.’
어?
난 도트에게 명령했다.
“내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궁인들한테 뭐 하나만 물어봐 줄래?”
“예, 전하.”
필리프 왕은 조프리가 걱정돼서 사신을 보낸 거라고 말했다. 비스코티가 조프리에게 너무 위험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가 셔벗이 좋은 나라라고 계속 어필한 이유는 조프리가 이곳에 머물렀으면 해서라고.
조카를 생각하는 삼촌 같은 말이었다. 외국에서 지내자는 말은 로웰이나 다른 사람들도 했다.
필리프 왕이 말한 이유대로라면, 그가 조프리를 부르려고 했던 시점은 왕비님의 사고 이후다.
하지만 로잘린 왕비는 밀라네 공주의 궁을 처음에 숙소로 준비했다. 그 시점에 왕비님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숙소를 준비하는 사람은 드물다.
앞뒤가 안 맞지 않나?
* * *
사신 접견은 낮에 이루어졌다. 난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대전으로 들어섰다. 바닥의 깔개를 밟고 걷자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셔벗의 대전은 무섭도록 천장이 높았다. 하지만 난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일어나는 일엔 관심 없었다.
잘되든 아니든 불안해하는 게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예전엔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조프리가 되고서부터는 계속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했다. 안 좋은 습관은 빨리 드는 법이다.
불안을 곁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사신단이 내 뒤를 따라 입장했다.
왕좌에 앉은 필리프 왕에게 예를 표하자, 그는 웃으며 우리를 환영했다. 그의 표정에서 다른 감정을 눈치챌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온화해 보일 뿐이었다.
“조프리 왕자. 여독은 풀었나?”
그는 접견장에서까지 편한 말투를 쓰진 않았다.
“회복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의 은혜 덕분에 건강한 모습으로 이곳을 찾아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안전히 왕성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감사할 따름입니다.”
“큰일을 겪은 그대가 양국을 위해 먼 길을 찾아왔는데 짐이 마중조차 못 가겠나.”
난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정말 그렇습니다. 셔벗과 비스코티는 서로에게 줄곧 형제 같은 이웃이었으니까요. 양국 간에 불행한 일이 있었음은 모두 아실 겁니다. 비스코티에서는……. 내부의 혼란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필리프 폐하와 셔벗의 슬픔을 위로하지 못했고, 양국에 큰 오해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레이가 써 준 대사를 겸손한 어조로 읽었다. 그러면서 필리프 왕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나를 대견한 아이처럼 보고 있었다.
난 다음 대사를 잊을 뻔했다.
“그러나 이는 셔벗만의 슬픔이 아닙니다. 저 개인에게도, 비스코티에도 너무도 큰 슬픔이어서 저희는 어찌 다루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고를 샅샅이 조사하면서도 셔벗에 알릴 생각을 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겠지요. 이러한 변명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제 역할이 가장 중요할 때, 저는 제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늦게나마 사죄드립니다. 비스코티의 왕자로서, 폐하와 셔벗의 왕국민들께 드리는 사죄입니다.”
난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이 부분을 빼자고 했으나 왕자가 사죄하는 것만큼 분명한 의사 표현도 없었다.
이 일은 비스코티의 잘못일 수밖에 없었다. 비스코티가 셔벗의 공주를 지키지 못했고, 소식을 늦게 전했으며,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한 죄를 저지른 것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다른 부분은 죄를 물을 수 없다. 왕자가 고개를 숙였는데, 그것이 정말 사고였는지를 추궁하는 건 몹시 무례한 일이다.
왕비님의 죽음은 타살이어선 안 됐다.
조프리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스코티의 왕자라면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죽었는데 정치적으로 이 일이 어떻게 이용될지나 생각하고 있다.
난 셔벗의 분노라는 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길 바랐다. 필리프 왕은 적어도 분노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조프리 왕자를 사고 이전에 부르려고 했다.
내 안에서 갈등이 일었다. 이게 정말 중요한 의문인가?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생각의 비약일 수도 있는데.
“어찌 그게 조프리 왕자의 잘못이겠나. 나 역시 외국의 왕비가 되었다는 이유로 밀라네 왕비와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네. 서로 간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아픈 몸을 끌고 이곳까지 와 주니 내 마음의 병이 다 낫는 것 같네.”
필리프 왕이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 아래로 내려왔다. 난 고개를 들 뻔했다.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은 나를 해치는 대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대응도 과했지. 이웃이 더없는 혼란을 겪는 것을 알면서도 내 마음이 급해 군대를 일으켰네. 비스코티에서 군사 행동을 참은 것이 설마 셔벗의 강병을 두려워해서겠나? 셔벗의 슬픔을 이해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
필리프 왕은 주변에 동의를 구했다. 여기저기서 동의의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비스코티는 겁먹어서 군사 대응을 안 한 거지만.
그레이의 대본에 따르면 필리프 왕은 적어도 한 번은 비스코티의 태도를 더 문제 삼아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진 않는 법이다.
필리프 왕이 너무도 다정히 굴어서 접견은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조프리가 누명 쓴 일에 대해서도 변명해야 하는데. 이거 안 해도 되나?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양국에 외교 관리를 상주시키고 더욱 가까운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말을 꺼내야 할까?
마무리 단계에서 꺼낼 말인데 지금이 그때인지 헷갈렸다.
진짜 뭐지?
내 수상한 의문은 갈 길을 잃었다. 그냥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로잘린 왕비의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을 수 있다. 불안해하고 싶어 하는 머리가 문제를 키운 건지도.
그때 귀족 중 한 명이 나섰다.
“폐하. 제가 조프리 전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에이드 공작.”
필리프 왕이 그를 불렀다.
셔벗의 세 공작 중 하나. 미셸 에이드의 부친은 아들과 꼭 닮은 인상이었다. 어딘가 불 같은 느낌이 있었다. 난 그가 앞으로 나설 때부터 불안해졌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알 수 없으니, 현명한 조프리 전하께서 이해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왕비님이 사고를 당하실 무렵 때마침 조프리 전하께서 누명을 썼다니, 우연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난 놀라지 않았다. 그레이의 대본에 딱 알맞은 변명이 있었다.
그러나 에이드 공작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물론 명성 높은 전하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 없습니다. 공주님의 일에 대해서도, 전하께서는 사고라고 믿으시니 저희에게 사죄하셨겠죠. 하지만 당시 누명을 쓰고 도주 중이던 전하께서 무슨 수로 사고 현장을 조사하셨겠습니까? 전하께 그 일이 사고였다고 보고한 자는 또 비스코티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마치 비스코티인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투로 말했다. 아들만큼이나 덩치도 목소리도 커서 성량이 대전 안을 꽉 채웠다.
“또 전하께서 누명 때문에 앓고 계신 동안, 비스코티의 후계자는 에드워드 왕자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자격 없는 형제에게 자리를 빼앗기고도 비스코티를 걱정해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일에 고개를 숙이시다니. 조프리 전하의 마음은 별처럼 아름다우나 저로서는 걱정될 따름입니다. 그 간악한 비스코티인들이 전하를 속였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주위가 웅성거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았다. 에이드 공작은 셔벗에서 잘도 먹힐 주장을 가져왔다.
저 논리대로라면 난 멍청이가 되고 비스코티인은 사악한 자들이 되며 셔벗은 그 악적을 토벌할 명분을 얻게 된다.
난 필리프 왕을 돌아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말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미셸 에이드 때와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말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