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2화 (242/293)
  • 242.

    난 필리프 왕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속내를 알고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외국의 사신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다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셔벗이 약소국이고 비스코티가 강대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통 외국 사신을 맞는 의전은 담당 관리나 영지에서 맡게 된다. 나는 어떻게 보면 왕에게 의전을 받는 셈이었다.

    필리프 왕은 그냥 조프리를 잘 대해 주고 싶을 뿐이겠지만.

    그가 나를 초대해서, 난 왕과 같은 마차를 타게 되었다. 마차에 오르는데 미셸의 눈길이 신경 쓰였다. 그는 사람을 잡아먹을 듯 보고 있었다. 맹세를 믿겠다더니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그러나 왕의 마차에 내가 다른 사람을 초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가는 동안 필리프 왕은 신변잡기식의 질문을 했다. 간만에 만난 친척 어른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할 만한 질문들이었다.

    “비스코티에서 생활은 어땠니?”

    “공부는 잘했고?”

    잘 대답하려고 해도 할 말 없는 질문들이었지만, 난 성심성의껏 답했다.

    그가 삼촌 노릇을 하고 싶다면 맞출 의향이 있었다. 내가 셔벗에 온 건 반은 조프리로서였다. 조프리는 필리프 왕의 조카였다.

    대전에서 모리스 상송이 했던 말은 얼추 맞았다. 그는 국경에서부터 필리프 왕의 정예군이 사신단을 호위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에드워드는 내 안전을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탄하고 안전한 여행이었다. 내가 신경 쓸 건 미셸의 눈초리나 필리프 왕의 말 상대 하기 정도밖에 없었다.

    왕의 행차다. 들르는 영지마다 환대받는 것도 당연해서, 꼭 비스코티의 사신단 자체가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왕을 환영하기 위해 나왔으나, 그 곁에 있는 사신단에게도 환호성을 보내야 했다.

    그건 좋은 일이었다. 누군가를 환대하다 보면 그 상대가 좋아지기 마련이었다. 행동은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스코티의 사신단을 환영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긴 여정 끝에 수도에 들어섰을 땐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느 영지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가 밖으로 나와 왕의 행차를 구경했다.

    잘 정돈된 대로와 광장이 보였다. 그곳을 사람들이 메우고 있었다. 비스코티도 수도는 몹시 번화했다. 그러나 화려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셔벗의 광장은 한여름 꽃으로 가득해서 하나의 거대한 꽃다발 같았다.

    “필리프 폐하!”

    “만세! 필리프 폐하, 만세!”

    “폐하!”

    사람들은 꽃을 흔들며 필리프 왕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 전쟁터에 다녀온 게 아닌데도 굉장한 열기였다. 필리프 왕의 인기를 알 만했다. 그는 존경받는 왕이다.

    내가 아는 다른 왕이 떠오르면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조프리 전하!”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조프리 전하!”

    “셔벗의 아들!”

    “…….”

    내 귀가 이상해진 건가?

    환호성에 귀가 따가워질 정도였다. 내가 뭘 들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우리는 셔벗 왕성에 도착했다. 백색의 아름다운 성벽을 통과해 내성 안으로 들어가자, 몇 명의 귀족이 우리를 맞이했다.

    한가운데는 키 큰 귀부인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필리프 왕이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잘린!”

    “폐하, 돌아오셨군요. 그렇게 외출하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셔벗의 로잘린 왕비가 왕을 타박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이 뺨에 입을 맞추자 찡그린 얼굴이 풀어졌다.

    로잘린 왕비와 눈이 마주쳤다.

    필리프 왕은 그가 여동생과 원수가 된 이유를 내게 들려줬다. 로잘린 왕비가 왕비님을 좋아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아들인 조프리를 싫어한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잘린 왕비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조프리 왕자 전하?”

    그녀가 물었다. 호감과 호기심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로잘린 왕비님.”

    난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프리 전하가 맞으시군요! 세상에, 공주님의 아들이 이렇게 장성해서!”

    그녀가 두 팔을 벌렸다.

    셔벗인들은 포옹을 유달리 좋아하는 걸까? 필리프 왕과 있었던 소동을 되풀이할 순 없었다. 난 그녀를 마주 안았다.

    로잘린 왕비의 키가 크다곤 해도 조프리에 비할 건 아니었다. 가느다란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내가 조프리 왕자를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대가 기뻐할 줄 알았다니까요.”

    필리프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요. 폐하께서 정답을 맞히셨어요. 제 생일 선물 대신이라고 하셔도 이해할게요.”

    로잘린 왕비는 나를 꽉 끌어안고 놓았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따듯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불편한 일은 없었나요?”

    “로잘린, 내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요?”

    “폐하. 그만하세요. 저는 손님을 맞이하는 안주인의 자세로 묻는 거예요. 조프리 왕자?”

    “예. 폐하께서 신경 써 주셔서…….”

    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로잘린 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조프리 전하께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정말 반가워요.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모두 그랬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녀가 곁을 돌아봤다. 덩치 큰 남자가 인사했다.

    “조프리 전하. 셔벗에 도착하신 걸 환영합니다. 요프셔 백작 안젤로입니다.”

    그는 셔벗의 재상이었다.

    “에번리트 백작 카를입니다, 전하.”

    “셰우셔의 롤랑입니다, 전하.”

    뒤를 이어 외무대신과 재무대신 등이 인사했다. 다들 이름이 귀에 익었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셔벗의 대신들이었다. 셔벗으로 오기 전 속성으로 받은 과외에서 이름과 약력을 익힌 주요 인물들.

    조프리가 뭐 좋은 일로 왔다고 이런 사람들이 맞으러 나왔을까? 의문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필리프 왕은 조프리에게 일단 뭐든 베풀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신들 뒤에는 수많은 궁인들이 서 있었다. 로잘린 왕비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조프리 왕자, 피곤하겠지요. 궁을 안내하겠어요. 오늘은 푹 쉬도록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궁인들이 사신단의 짐을 가지고 우리의 뒤를 따랐다.

    로잘린 왕비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본궁에서 가까운 데다 아름다운 거처였다.

    사신단 숙소라기엔 왕의 거처와 거리가 가까웠다. 셔벗은 비스코티와 문화가 다른 걸까? 왕과 가까운 자리에 외인을 데려다 놓다니.

    내가 궁을 올려다보고 있자 로잘린 왕비가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전하께서 오신다기에 모두 기뻐하며 궁을 꾸몄답니다. 필리프 폐하께서 어린 시절에 잠시 사용하셨던 궁이랍니다. 한참 비워져 있었어요.”

    그런 궁을 왜 나한테? 당황스러웠다.

    “제가 머물기엔 너무 의미 있는 장소 같은데요.”

    “사실 전하께 다른 궁을 준비해 드리려고 했어요.”

    로잘린 왕비는 난처한 듯했다.

    “하지만 그 궁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을 수 없게 되어서, 폐하의 명으로 장소를 바꿨답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머물렀던 기간은 아주 짧으니 걱정하실 것 없어요. 얼마 없는 나이 든 궁인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인걸요. 폐하께선 전하께 좋은 거처를 내어 드리고 싶을 뿐이니까요. 이곳이 폐하께서 기억하는 가장 좋은 침소 중 하나일 거예요.”

    부담스러웠다. 필리프 왕의 호의는 과한 데가 있었다. 난 돌려서 물었다.

    “원래 준비된 숙소가 어디였는데요?”

    “밀라네 공주님의 궁이에요.”

    난 지금 준비된 거처를 쓰겠다고 대답했다.

    환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신단은 충분한 휴식 시간을 부여받고, 그동안 산해진미를 대접받았다. 셔벗의 모든 사람이 비스코티와 셔벗의 관계가 몹시 우호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만했다.

    “필리프 왕이 어린 시절에 쓰던 궁이요?”

    그레이가 몹시 싫어한 것만 제외하면, 사신단의 모든 사람도 양국이 평화 조약이라도 맺으리라 믿게 됐다.

    얼마 후 사신 접견 날짜가 잡혔다. 왕의 시종이 와서 셔벗의 대신들과 자격 있는 귀족들이 참석할 거라고 알렸다.

    필리프 왕은 좋은 결과를 약속했으나,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스코티에서는 평범한 파티도 피해 다녔다. 귀족들 앞에 나서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디서 연설 특강이라도 받았을 텐데.

    도트는 궁인들의 수다를 엿듣고 와서 내 자신감을 북돋아 주려 했다.

    “왕자님이 국경에서 필리프 왕의 진노를 누그러뜨렸다는 소문인 모양이에요. 왕자님이 대단한 협상가이기도 하다는 걸 셔벗인들도 알아차렸나 봐요!”

    사실무근이었고, 내게 힘이 되는 얘기도 아니었다.

    “그거 나쁜 거 아냐? 내가 뛰어난 협상가라고 생각하면 더 대단한 협상가를 불러서 나를 제압하려고 할 텐데.”

    “헉?”

    괜히 도트를 괴롭히며 긴장을 풀었다.

    난 왜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면 불안할까? 그레이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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