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1화 (241/293)

241.

콜린 코크는 자신에게 온 편지를 확인했다. 모리스 상송의 아들 파벨레가 보낸 것이었다.

콜린과 파벨 사이엔 친분이랄 게 없었다. 콜린은 소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연회는 필요한 것이지만, 파벨처럼 망둥이인 양 돌아다니는 건 스스로의 평판을 깎아먹을 뿐이다.

평소라면 그는 파벨의 편지 따위를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겉봉을 뜯었다. 최근 온 수도를 들썩이게 한 소식 때문이다.

비스코티에 사신으로 간 모리스 상송이 드디어 조프리 왕자를 데려온 것이다. 필리프 왕이 왕자를 데려오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콜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신을 두 차례나 비스코티에 보낸 것도 모자라 몸소 왕자를 환영하러 내려가기까지 했다.

귀족들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필리프 왕은 이제껏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두 공자를 재어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조프리 왕자를 만나겠다고 스스로 움직이기까지 한 것이다.

후계 구도가 바뀌는 건가? 온 나라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조프리 왕자는 대단한 환대를 받으며 수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와중에 모리스 상송의 아들이 콜린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필리프 왕이 조프리 왕자를 마음에 쏙 들어 하며, 조프리 왕자 자신도 비스코티에서부터 야심을 품고 넘어온 듯하다는 것이다.

콜린은 전자는 믿지 않았다. 파벨 따위가 필리프 왕의 심중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그러나 조프리 왕자……. 이자가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손을 뻗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훌륭했다.

“집사. 에브니아에게선 아직도 답장이 없나?”

“예. 여전히 두문불출하시는 듯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깟 일로 아직도 틀어박혀 있는 게 말이 되나? 내게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니…….”

콜린은 답답했다. 동시에 화가 났다.

에브니아 스프라우트는 그깟 풋사랑에 얼마나 얽매여 있을 생각이란 말인가?

그의 계획에 따르면 이미 에브니아는 그와 물밑에서 접촉해 있어야 했다. 약혼을 하면 가장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동맹을 맺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후계자의 자리는 콜린의 차지였다.

어리석은 미셸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왕이 무엇으로 그들을 시험하고 있는지.

콜린은 기사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키가 작고 몸집도 왜소해서, 신체 조건부터 좋지 않았다. 미셸은 그에게 남의 위에 설 위엄이 없다고 비웃었다.

미셸은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다. 그가 왕실 토너먼트에서 재능을 뽐내는 동안 콜린은 위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단한 문장을 짓지도 못했고, 성격이 재치 있는 편도 아니어서 연회장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도 못했다.

자연히 그는 구석에서 남들의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해졌다. 콜린 코크만 한 신분의 귀족이 이토록 눈치가 빠르기도 힘들 것이다.

그 기민한 눈치로, 그는 필리프 왕이 미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왕은 두 공자를 종종 함께 불러 대화를 나눴는데, 미셸의 대답은 누가 지어 준 게 뻔해서 왕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필리프 왕은 오히려 콜린에게 좀 더 시간을 썼다. 한번은 콜린이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왕이 뛰어난 기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필리프 폐하께서는 셔벗의 평화를 이룩해 내셨습니다. 이를 지킬 왕은 분쟁보다는 화합을, 전쟁보다는 대화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비웃는 미셸에게 복수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필리프 왕의 반응이 전에 없이 좋았다.

콜린은 왕이 어떤 후계자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후계자에 가까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미셸에게 비웃음당하는, 소심하고 조용한 자신이 필리프 왕의 후계자에 가장 걸맞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말로 끝나서는 안 됐다. 미셸도 말은 번지르르했다.

필리프 왕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셔벗의 화합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네 말이 틀림없구나!’

콜린의 말에 코크 공작도 동의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스프라우트 공작의 딸 에브니아에게 연락을 취하는 데 몰두했다.

셔벗의 세 공작 중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스프라우트 공작뿐이었다. 그에게는 딸밖에 없었던 것이다.

코크 공작은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진 않았다. 왕의 속내를 알아차린 사람은 지금으로선 콜린밖에 없었다.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힌트를 줄 필요는 없다. 그가 깨닫는다면, 코크와 에이드를 재어 볼 게 뻔하지 않은가? 그에게 다음 대 왕권의 열쇠를 쥐여 주는 셈이다.

한편으로 콜린은 싫어하던 귀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모임의 중심이 될 수는 없었지만, 친분을 쌓은 귀족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콜린은 그 안에서도 괜찮은 귀족을 열심히 골라냈다. 필리프 왕은 그가 얼마나 이 시험을 잘 통과하는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필리프 왕이 비스코티에 사람을 보내 조프리 왕자가 어떤 인물인지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소식을 접한 이후, 코크 공작은 군대를 키웠다. 은밀하게 군수품과 말먹이, 식량을 모으고 병사를 양성했다.

두 공작은 필리프 왕을 철석같이 믿었다. 셔벗의 모든 귀족이 그러지 않았던가? 두 공작의 자식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될 거라고.

필리프 왕의 행동은 배신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보다도 콜린이 가장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코앞에 왕좌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조프리 왕자에게 왕위를 빼앗긴다고?

물론 필리프 왕은 조프리 왕자도 시험할 것이다. 콜린은 왕자가 시험을 깨닫지 못하는 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파벨이 보낸 편지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왕자는 로웰 몽블랑을 대동했습니다. 스프라우트 영애를 통해 공작을 끌어들일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왕자는 무엇이 중요한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미셸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콜린 코크는 다시 집사를 재촉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하인을 보내 스프라우트 저택을 감시해.”

“예?”

“스프라우트 저택에 누가 드나드는지 감시하고, 내게 즉시 알리라고!”

* * *

스프라우트 저택은 활기가 돌았다. 저택의 잘 꾸며진 정원에선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셔벗에서 자주 있는 정원 파티였다. 보통 가문의 안주인이나 아가씨가 주최하지만, 이 정원에 주최자로 보이는 여성은 없었다.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스프라우트 저택에서 주인 없는 파티가 열린 게 이번 한 번은 아니다.

스프라우트 공작은 몇 년 전 사건 이후 집 안에 틀어박힌 딸을 위해 저택에서 파티를 열기 시작했다. 즐거운 분위기에 이끌려 딸이 바깥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스프라우트 영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주인 없는 파티만 매번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다.

저택의 장미 정원은 아름다웠고 다과는 맛있었으므로 시간 많은 귀족들은 기꺼이 파티에 참석해 먹고 마셨다.

오히려 주인이 없어서 더 편했다.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술과 분위기에 잔뜩 취해서 눈도 입도 풀린 귀족들은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댔다.

“정말이지 기대돼요. 셔벗 사교계는 그간 새로운 얼굴이 없었다고요.”

“조프리 전하의 측근들은 전부 미남이라는 게 사실일까요?”

“글쎄 말이에요, 그게 사실이래요. 제가 얼마 전에 사신단 일행의 초상화를 전부 구했거든요.”

“세상에. 그런 귀한 걸 어떻게 구하셨어요?”

“몽블랑 상단의 도움을 받았죠.”

“몽블랑을 위해 건배! 세상에, 로웰 몽블랑이 돌아온다니!”

누군가 기쁨에 겨워 외쳤다. 셔벗의 귀족들은 정말이지 지루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새로운 인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미남이라면 더욱 좋았고, 그 미남이 로웰 몽블랑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목소리를 낮춰요. 여기 아가씨가 듣겠어요.”

“뭐 어때요. 스프라우트 영애라면 저택 깊은 곳에 있을 텐데. 그보다, 어떻게 생각해요? 스프라우트 영애가 다시 사교계에 등장할까요?”

“로웰 몽블랑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 두근거려요…….”

상심한 아가씨가 칩거를 깨고 옛 연인을 만나기 위해 나올까? 그 만남은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조프리 왕자의 사신단은 개미 기어가는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귀족들에겐 거의 그렇게 느껴졌다. 그들은 왕자가 셔벗 사교계에 등장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조프리 전하는 정말 남색자이실까요?”

“바람둥이라던데요. 비스코티에서 그분과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그렇게까지? 설마.”

귀족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겠네요.”

한 귀족이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게 진담이란 건 누구나 알았다.

모인 귀족들은 “조프리 전하를 위해 건배! 미인을 위해 건배!” 하고는 다시 먹고 마시고 즐겼다.

그 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에브니아 스프라우트는 창틀에 괴고 있던 팔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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