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40화 (240/293)
  • 240.

    난 먼저 알렉스를 치하했다.

    “내 기사가 내 명예를 지켜 주었군.”

    웃으며 말하자, 알렉스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네 검을 조사해 봐야겠다! 검이 무거웠어. 비스코티의 장인들은 솜씨가 좋군!”

    에이드는 승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가 꺾인 게 분명했다.

    난 그에게 말했다.

    “됐고, 그대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요청하지 않을 테니 내 말을 들어. 난 이 나라의 계승 다툼에 관심 없어.”

    에이드는 반발하려다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뜻입니까?”

    “결투의 결과도 남들에게 알릴 필요 없어. 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그러니 그만 귀찮게 굴어.”

    “귀찮…….”

    에이드는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다. 띄워 주는 게 낫겠지.

    “결투를 보아하니 그대는 대단한 기사로군. 틀림없이 필리프 폐하께서도 그대의 진가를 알아보셨겠지. 그렇다면 후계자 경쟁에서 가장 앞장서 있는 사람은 그대인데, 왜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시간이 지나면 그대에게 받아 마땅한 자리가 주어질 텐데.”

    “필리프 폐하께서는 기사를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비스코티야 하루 종일 분쟁이 이니 모르시겠죠. 이 나라는 평화로워서 기사가 무용을 뽐낼 기회조차 없습니다.”

    에이드의 적의가 누그러졌다. 조프리에게 과하게 적대적이더라니 그에게도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신경 써 주고 싶진 않지만.

    필리프 왕은 에이드를 좋게 보지 않는 듯했다. 에이드는 그 원인이 셔벗의 평화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과연 그럴까?

    “그러나 기사의 덕목은 어느 귀족 사회에서나 높게 평가하지. 그대의 호탕한 성격, 당당한 자태는 또 얼마나 귀중한 덕목인가? 이리 떼 같은 귀족들을 통치하려면 그대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대에게만 하는 말이지만, 나는 늘 에드워드 왕자의 기사다운 모습을 부러워했네. 비스코티의 귀족들도 에드워드를 더 높게 평가했지. 그대의 경쟁자들도 그럴 거야.”

    에드워드가 기사의 덕목에 관심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에이드는 우쭐해졌다.

    “콜린 같은 겁쟁이야 제게 비할 바가 아니죠.”

    콜린?

    셔벗 코크 공작의 아들을 말하는 듯했다. 난 두 사람의 경쟁 관계엔 관심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대가 나를 경계하니 오히려 내게 귀족들의 관심이 쏠리는군. 왜 스스로 경쟁자에게 힘을 실어 주지?”

    “이것도 폐하의 시험이었군!”

    갑자기 에이드가 외쳤다. 그는 혼자 깨닫더니 내게 물었다.

    “제가 전하를 경계하는 모습이 폐하께 좋게 비치지 않겠군요.”

    “귀족들도 그대에게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혹여 폐하께서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독대했을 때의 얘기를 묻는 것이다.

    에이드는 초조해 보였다. 필리프 왕이 보기보다 엄격한 사람인가?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대가 훌륭한 기사이며 내게 악의는 없었을 거라고 했지.”

    “……하하! 물론입니다. 사신으로 온 분께 제가 무슨 악의를 갖고 행동했겠습니까.”

    에이드가 수습을 시도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난 믿는 척했다.

    “잘 알고 있네. 그대도 이해했겠지. 내가 원하는 건 양국의 평화뿐이야. 셔벗에 분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

    “전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십니까?”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에이드는 나를 빤히 보더니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는 호탕한 분이시군요!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제 행동이 양국의 우애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이해하네. 기사다운 혈기에서 나온 행동이었겠지.”

    “감사합니다.”

    된 건가?

    우리는 첫 만남과 달리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에이드는 내게 자신을 미셸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난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줬다.

    이걸로 미셸이 나에 대한 경계를 거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문제를 봉합해 뒀을 뿐이다.

    여전히 소문은 돌겠지만, 후계자 후보가 나를 직접 적대하지 않으면 금방 가라앉을 것이다.

    난 곧 셔벗을 떠날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만 화약이 터지지 않으면 된다.

    셔벗도 비스코티만큼이나 정치 상황이 복잡한 것 같은데, 이런 구렁텅이에 말려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미셸 에이드는 굳은 얼굴로 공터를 빠져나갔다. 그는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왕자가 왜 저렇게 익숙하게 느껴질까?

    조프리 왕자는 딱 봤을 때 필리프 왕을 연상시키는 인물은 아니었다.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도 왕자의 외모는 언급하지 않았다. 몇 사람이 밀라네 공주와 닮았다고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미셸 에이드는 필리프 왕을 정기적으로 만나 왔다. 왕의 시험에 응하기 위해 왕성을 드나들면서, 왕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말하는 방식이 닮았어.’

    미셸은 깨달았다.

    필리프 왕은 온화하다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듣는 까닭은, 얼마든지 엄히 다스릴 수 있었던 일을 유하게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즉위 초의 반란부터, 소소하게는 왕의 행차를 가로막은 평민에게까지.

    반란이 일어나면 연관된 가문은 씨가 마르는 게 보통이었다. 귀족 가문과 그들을 모시던 가신들까지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은 불쌍하다는 이유로 직계를 제외한 사람들은 살렸다. 살린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왕의 사유지에서 노역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왕이 유약하다 평가했으나, 필리프 왕의 치세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처벌의 수위가 낮아진 건 분명했다.

    굶주림에 지쳐 도둑질한 평민은 손이 잘리는 대신 왕의 사유지에서 노역했다. 왕은 일 시키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런 도둑에게 삯을 주기까지 했다.

    미셸은 아버지의 강압하에 필리프 왕의 정책을 배워야 했다. 거기서 특별한 걸 눈치채진 못했다. 온화한 왕이 펼칠 만한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른 얘길 했다.

    ‘필리프 왕이 얼마나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지 아느냐? 그 노예들이 그의 치세 내에 몇 배나 불어났는지를 보란 말이다!’

    미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 자기 재산을 불리기 위한 계략이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백성을 위하는 척해서 인기를 얻을 수 있다니.

    필리프 왕은 교활한 사람이었다! 온화한 모습은 가면일 뿐이다.

    조프리 왕자도 겉으로는 몹시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가 곁에 둔 기사는 알렉스 바움쿠헨이었다.

    기사의 외모가 그럴듯해서 애인을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 바움쿠헨이라면 국경 전쟁의 영웅이 아닌가?

    누구에게 말은 안 했지만, 미셸은 실제 전쟁을 겪어 본 적 없다는 데 약간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전을 겪은 기사들은 미셸 같은 기사를 허수아비 취급했다. 토너먼트에서나 명성을 날리는 허울뿐인 기사라는 것이다. 미셸은 그런 취급을 견딜 수 없었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미셸과는 정반대였다. 바움쿠헨 백작의 양자로 들어가 본인의 실력으로 가문의 인정과 기사 작위를 쟁취해 낸 인물이었다.

    미셸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살에 붉게 피가 비쳤다. 미셸의 실력이 조금 더 떨어졌더라면 피를 보았을 것이다. 바움쿠헨의 힘을 받아 내느라 무리한 근육은 지금까지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저런 인물을 개인 호위로 데려왔다고? 그런데 야심이 없다고?

    분명 조프리 왕자도 온화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로 이름 높았다…….

    하지만 그 남색자는 왕위를 노리지 않는다고 제 입으로 맹세하지 않았는가?

    미셸은 머리가 아팠다. 그는 도무지 머리를 굴려 대는 일은 질색이었다. 이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하나?

    그때 파벨레 상송이 사색이 되어 찾아왔다.

    “에이드 경! 폐하께서는 정말로 조프리 왕자를 후계자로 삼을 속셈인가 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제 아버지가 폐하의 총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파벨이 침을 삼켰다.

    “아버지께서 저를 불러, 조프리 전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말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신단 의전 임무를 네가 맡게 되었단 소리냐?”

    미셸은 모리스가 아들 사랑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중대한 임무를 파벨레 상송 같은 놈에게 맡겨?

    “그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히 소리를 높여?”

    “그게, 그게 아니라…….”

    파벨은 울상이 됐다. 이 멍청한 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콜린 코크를 찾아갔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미셸에게 꿰인 몸이다.

    그는 미셸 같은 머저리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을 쉽게 설명했다.

    “조프리 왕자를 제가 앞으로도 모셔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왕자를 모신다면 그건 필리프 폐하의 뜻 아니겠습니까? 제가 생각해 보니, 왕자가 로웰 몽블랑을 데려온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래도 미셸은 못 알아들었다. 파벨은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었다.

    미셸 에이드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비장의 수였으나,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 자식은 지금이 위기 상황인 줄도 모를 것이다!

    “로웰 놈이 셔벗 사교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왔겠습니까? 스프라우트 공작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요! 그놈과 스프라우트 영애 사이의 일을 모르는 셔벗 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놈을 데려왔다면 분명…….”

    “설마?”

    미셸의 표정이 변했다.

    이제 알았냐?

    “틀림없이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선을 대려 할 겁니다! 삼 공작 중 한 명의 지지를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런 명예도 모르는!”

    미셸은 분노했다.

    “당장 펜을 가져와! 아버지께 알려야겠다!”

    이 멍청한 기사가 행동력이라도 빨라 다행이었다.

    파벨은 불안했다. 그가 제대로 된 동아줄을 잡은 건가? 미셸이 과연 조프리 왕자를 막을 수 있을까?

    역시 콜린 코크에게도 선을 대 놓는 게 좋겠다.

    그는 편지 쓰는 데 정신이 팔린 미셸을 두고 슬그머니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배정된 손님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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