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9화 (239/293)
  • 239.

    미셸 에이드는 편한 차림이었다. 나나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수련하는 사람처럼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누가 보면 우리가 일행인 줄 알았을 것이다.

    “에이드 경. 이 새벽에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이곳을 찾으신 것과 같은 이유 아니겠습니까?”

    그는 개인 수련을 하러 왔다는 투였는데, 그랬다면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주가 사신단을 위해 내어준 숙소는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었다. 숙소에 가까운 공터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프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문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필리프 왕이 에이드를 붙잡고 ‘조프리는 네 경쟁자가 아니다’라고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에이드의 표정을 보아하니 필리프 왕이 말한다고 통할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미셸 에이드는 처음부터 내게 반감을 품고 있었고, 연회장에서의 일로 그 반감이 더 커진 듯했다.

    좋으나 싫으나 그와는 계속 마주쳐야 했다. 에이드만 한 귀족이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을 리 없다.

    셔벗 수도에서도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내가 곤란해질 것이다.

    오해를 풀고 가는 게 좋겠지.

    “그런가? 과연 훌륭한 기사로군. 어느 때에도 단련을 놓지 않아.”

    내가 띄워 주자 에이드는 멈칫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더니, 인상을 썼다.

    “이곳에서까지 본색을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와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알렉스의 존재는 무시하는 건가?

    귀족들은 다른 사람을 공기 취급하는 능력이 있었다. 고위 귀족일수록 더 그런 듯했다.

    “전 전하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겁니다.”

    “속 깊은 이야기?”

    에이드도 나와 대화할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난 듣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연회장에서야 전하께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빠져나가셨지만, 앞으로도 그러진 못하실 겁니다. 후계자를 두지 못하는 왕이 어떻게 왕 노릇을 하겠습니까?”

    난 어이가 없었다.

    남색과 엮어서 나를 공격하고 싶은 것 같은데, 저 말은 나보다 필리프 왕에게 더 해당되는 말 아닌가?

    “지금 필리프 폐하를 부정하는 건가?”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에이드는 코웃음을 치다가 깜짝 놀라 부인했다. 이곳이 공터가 아니라 연회장이었다면 곤욕을 치렀을 만한 발언이다. 본인도 그렇게 느꼈는지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이런 함정을 파다니. 역시 예상한 대로 교활하고 야심만만한 분이군요. 비겁한 짓은 그만합시다.”

    에이드는 정색하더니 허리춤의 검을 툭 쳤다.

    “좋은 검 두고 말로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들었습니다. 이 성에 온 뒤로도 매일 검을 수련하고 계신다고요. 전하께서도 틀림없이 훌륭한 기사시겠죠. 기사라면 검으로 말해야 하는 법.”

    “내 명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빈말이었던 모양이다. 날 안다면 내가 기사와는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이란 것도 알 텐데.

    “외부의 명성과는 관계없습니다. 전하께선 셔벗에 온 지 얼마 안 되셔서 필리프 폐하가 어떤 분인지 모르시겠죠. 그분 명령하에 수도의 모든 귀족 앞에서 망신당하기 전에 제가 전하의 역량을 보아 드리겠다는 겁니다.”

    “필리프 폐하께서 나를 왜 망신시키신다는 거지? 외국의 사신을 모욕할 분인가?”

    맥락을 알 수 없어서 물었는데, 에이드는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

    “나를 무시하는가! 더 이상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외국의 왕자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가 화를 내며 장갑을 던졌다. 알렉스가 막아 줘서 장갑은 내게 닿지 않았다. 발치에 나뒹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림 같은 결투 신청이긴 했다. 신청받은 이상, 명예를 아는 귀족이라면 결투에 응해야 한다.

    미셸 에이드는 애초에 나와 대화할 계획이 없었다. 방금 대화로 모욕당했다고 느끼진 않았을 테고, 앙심을 오래 품고 있는 성격인 모양이다.

    근데 연회장에선 에이드가 먼저 시비 걸었다.

    난 에이드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공터는 텅 비었고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대도 새벽이었다. 어지간히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면 소란을 듣지 못할 것이다.

    에이드는 내가 바로 받아들이지 않자 미소 지었다. 장신에 짐승 같은 인상이라 보기에 위협적이었다. 셔벗 왕실 토너먼트에서 3년 연속 우승한 자라고.

    내가 어떻게 이겨?

    같은 생각을 알렉스도 한 모양이다.

    “전하. 제게 전하의 명예를 수호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자에게 겸손과 존중을 알려 주고 오겠습니다.”

    화난 모양이다. 목소리가 에이드에게까지 들렸다. 그가 비웃었다.

    “조프리 전하. 또 남자 뒤에 숨으십니까?”

    미셸 에이드가 ‘적당히’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일까? 내가 사신으로 온 외국의 왕자니 살살 다루겠다든가 하는 생각을 과연 할까?

    아닐 것 같은데.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시비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그만 나오십시오. 왕이 되려는 건 본인이잖습니까! 남자가 스스로의 기량으로 맞붙지도 못합니까?”

    “닥쳐라!”

    알렉스의 손이 대번에 검으로 향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에이드는 능숙한 사람은 아니라 속내가 뻔히 보였다. 여기서 지면 내가 흠씬 두들겨 맞는 결론이 날 뿐만 아니라 소문까지 날 모양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미셸 에이드에 비해 한참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뭐 그런.

    알렉스를 대신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 소문은 나겠지. ‘조프리는 스스로 나설 줄 모르고 남 뒤에 숨을 줄만 안다’ 정도인가.

    그런데 그 소문은 아무 타격도 없었다.

    필리프 왕이 평화 협정을 약속했다. 조프리 개인의 명예에 흠집 좀 난다고 협정이 파투 날 리 없다. 내가 왕위 경쟁에 뛰어들 생각이 있었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득 아닌가?

    난 알렉스를 붙잡고 쓰러졌다.

    “아, 다리의 멍이 도져서…….”

    “…….”

    “저, 전하. 괜찮으십니까?”

    알렉스마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상관없지만.

    난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에이드에게 말했다.

    “그대처럼 명성 높은 기사가 병자와 싸우려 들진 않겠지. 내가 가장 믿는 기사가 그대를 대신 상대할 거야.”

    “당신이 정말 명예로운 조프리 왕자입니까?”

    에이드는 기가 찬 듯했다. 셔벗에 내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조프리는 맞았다.

    “하…….”

    에이드는 한번 비웃고 검을 뽑았다.

    “와라. 내가 네 주인께 명예가 뭔지 알려 드려야겠다!”

    알렉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를 상대했다.

    결투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알렉스가 질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셔벗 토너먼트 우승자라면 셔벗 최고의 기사 중 하나라는 소리다. 하지만 난 게임 속에서 미셸 에이드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게임 속’이라는 생각은 더 안 하기로 했지만.

    당연히 게임 속에 남자 주인공 후보보다 더 능력치가 뛰어난 인물이 있을 리 없다. 그 인물이 젊은 남자라면 가능성이 0에 수렴했다.

    과연 알렉스는 미셸 에이드를 단번에 꺾어 냈다.

    챙!

    검날이 부딪히고 에이드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포물선을 그린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

    미셸 에이드는 표정을 바꾸더니 알렉스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알렉스 바움쿠헨.”

    둘은 아직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다. 에이드가 안 물어봐서였지만.

    “바움쿠헨! 비스코티의 국경 전쟁에서 활약했다는 그 소년 기사? 왜 먼저 말하지 않았지?”

    “…….”

    “방심을 유도했군. 그 주인에 그 기사다!”

    에이드가 멋대로 떠들었다.

    “말이 많군. 다시 덤비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기다려! 검을 다시 가져오겠다.”

    노리던 바가 그것이었는지 그는 부정하지도 않고 검을 주우러 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붙었다. 에이드가 경계하며 바로 덤벼들지 않아서, 두 번째 결투는 시간이 더 걸렸다.

    에이드는 노련한 기사였다. 그는 힘으로는 알렉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먼저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짠 듯했다.

    그러나 에이드와 알렉스의 결투에서 능력이 더 떨어지는 쪽은 에이드였다. 그가 수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자기 전략을 끌어가긴 힘들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는 에이드를 갖고 놀았다. 에이드는 강제로 상대로 존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에드워드와 내 대련이 저런 모양이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이건 내 실력을 높게 평가한 거였다. 난 에이드처럼 맞받아치지도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실력 차이가 너무 나지 않나? 셔벗도 비스코티만큼이나 접대 문화가 뿌리 깊은 모양이다. 토너먼트에서도 공작 아들이니까 상대가 그냥 져 줬을지도.

    에이드는 넋이 나갔다.

    “이럴 리 없어.”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조프리도 게임만 하면 시종들이 져 줬다. 이기는 데 익숙하면 패배가 뼈에 시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원래 조프리도 더 힘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다가가자, 에이드는 움찔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아까보다 더 경계하는 듯했다.

    이렇게 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제 좀 대화할 분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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