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벌써 답장이 올 수가 있나? 나 몰래 매라도 훈련시켜서 편지 배달을 시킨 걸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레이가 조용했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필리프 왕을 믿으시는 거예요?”
“그래서가 뭔데?”
“저도 전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요. 전하께서 나가시고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그레이는 자연스럽게 내 질문을 넘겼다.
듣고 싶은 것만 듣냐?
“전하께 관심을 보이는 귀족이 많더군요. 사신단 인원이라면 대부분 전하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해요. 몽블랑이나 바움쿠헨에 대한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들이 왜 그런지는 아시겠죠.”
“왜?”
“자꾸 시험하지 마세요. 그 수준까지 머리가 굳진 않았어요.”
내가 뭘?
그레이는 자조하더니, 결국 다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모두 전하께서 셔벗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확신하게 됐으니까요.”
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따위 소동을 벌이고 나갔는데? 꼴사납지 않았어?”
나보다 에이드가 더 꼴사나웠겠지만.
원래 유치한 싸움은 당하는 쪽이든 시비 건 쪽이든 둘 다 유치해 보이기 마련이다. 어린애 둘이 진지하게 싸운다고 누가 더 잘했고 잘못했는지가 보이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요. 왜 먹이를 던져 주셨어요?”
“내 탓이라고?”
“아니요. 전하께선 잘하셨어요! 거기서 전하의 대응이 최선이었겠죠. 하지만 셔벗인들 특성 아시잖아요? 사랑 놀음과 싸움이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죠! 지금도 셔벗 전역으로 말이 달리고 있을걸요. 전하께서 얼마나 재치 있게 에이드 경을 망신 줬는지 소문내느라고요!”
난 발을 뺐다.
“망신은 로웰이 준 건데?”
“물론 그러시겠죠.”
씨알도 안 먹혔다.
“모욕을 듣고 넘길 순 없잖아.”
“물론이죠.”
여기엔 그레이도 의견을 같이 했다.
“사신으로 와서 싸우자고 덤빌 수도 없고.”
결투를 신청하면 내가 질 거고.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전하께선 잘하셨다고. 하지만 미셸 에이드는 이미 전하께 덤빌 속셈이었죠.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어요. 그자가 아무리 단순한 기사라도 괜히 그랬겠어요?”
그레이는 안경을 벗더니 눈 밑을 눌렀다. 나와 달리 그는 전날 밤 한숨도 못 잔 모양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확신을 준 거예요. 전하께서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리라는 확신을. 전 그런 확신을 줄 만한 사람이 이 셔벗에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전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지 모르겠네요.”
* * *
찝찌름한 경고를 남기고 그레이는 나갔다. 그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기사를 무시했는데, 그에 반해 미셸 에이드의 인내심은 높게 평가했다.
난 그레이의 생각대로 미셸 에이드가 철저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근거를 가지고 남에게 시비를 걸 부류의 사람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뭐 내게 사람 보는 눈이 있진 않지만.
그레이는 필리프 왕을 의심하라는 투였다. 하지만 난 필리프 왕이 그랬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생각하면,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의 답장을 보는 게 낫겠다.
난 그레이가 두고 간 편지를 펼쳤다. 내 예상이 맞았다. 편지 겉봉에 에드워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진짜 매를 키웠나?
무협지 같은 데 나오는 전서응이나 전서구에 나도 로망이 있었다. 진짜 이렇게 빠르게 연락이 된다고? 나도 날려 볼 수 있나?
하지만 내용을 읽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당신을 보내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안전을 방비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
얜 왜 편지만 쓰면 자꾸 존댓말일까?
‘당신’ 뭔데? 이거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인질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선물은 언제나 제게 힘이 되는군요. 다정한 마음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나야말로 단어 선정마다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인질들이 데려온 기사들을 호위 기사로 포섭했습니다. 인질에게서 얻어 낸 금과 무기를 기사들에게 선물하니, 기사들은 제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더군요. 시류를 읽는 감이 뛰어난 자들입니다. 호위가 아무리 형편없는 실력을 지녔어도 수가 많으니 편리하더군요. 얼마 전 습격에도 쉽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 습격당했어? 다친 덴 없어?
아니, 기사 실력이 형편없으면 호위로 삼지를 마…….
애초에 못 믿을 자들을 왜 호위 기사로 두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가 주목하는 기사의 덕목에 충성심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충성심이 없는데 실력도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 아닌가?
-왕의 변고가 알려지며 불충한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자들이 하나둘 생기는 듯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비스코티를 한번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가 뭘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얘가 내 편지를 읽고 답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편지를 나만 이상하게 쓰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에드워드도 만만치 않게 업무 보고를 하고 있다.
다 내가 하라고 한 거긴 한데.
말미에 가서야 안부 편지다운 내용이 나왔다.
-당신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프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과한 요구에 응하지 말고, 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길 바랍니다.
-추신. 원치 않는 약혼 제의를 막는 데 당신이 데려간 비서가 도움이 될 듯합니다.
-당신의 에드워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볼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긁적이다 보니 한숨이 나왔다. 얘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일단 일부터 생각할까.
추신이 그나마 쓸 만한 내용이었다.
원치 않는 약혼 제의. 약혼이 들어올 거라는 뜻인가? 연애결혼이 유행한 건 최근의 일이다. 귀족들은 원래 가문 간의 이해관계로 약혼하고 결혼한다. 왕족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조프리가 비스코티 정계에서 입지가 단단한 왕자는 아니어도, 이만한 재산에 신분이면 누구나 탐낼 만은 했다.
그런데 약혼을 막는 데 비서가 도움이 될 거라고?
내 비서진에는 그레이와 로웰, 이델라가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믿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그레이를 제외하고 나와 한 번 이상씩 열애설이 났다는 특징이 있다…….
그게 아니라도, 에드워드가 언급한 사람이 이델라라는 직감이 왔다.
이델라를 꼭 집어서 내 약혼을 막는 방패로 사용하라고 충고한 셈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우리가 연인인 척이라도 하란 소린가?
이델라의 장래는 어떻게 하라고? 연인 행세라고 해도 셔벗에서만 이루어질 연극이니, 비스코티까지는 소문이 안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귀족 사회라는 게 은근히 좁았다. 소문이 한번 나면 순식간이다. 이 경우 내 입에서 나온 ‘오피셜’이라고 못이 박힐 거다.
이델라가 또 셔벗 귀족과 결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상황은 더 곤란해진다. 왕자와 복잡한 관계인 사람과 결혼할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물론 이델라를 위해 그 정도 용기도 못 낼 사람이라면 나도 결혼시키고 싶지 않지만…….
어? 의외로 사람 가려내기 괜찮은 방법인가?
“…….”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에드워드, 너 그래도 돼?
내가 이델라랑 연인처럼 다녀도 괜찮아?
* * *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아직 아무도 내게 약혼을 제의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머리 복잡해질 필요는 없다.
사실 약혼이야 뭐든 핑계를 대서 거절하면 되는 거기도 했다. 셔벗 공작쯤 되는 사람이 제안한 게 아니면, 조프리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거만한 이유로도 거절할 수 있다. 왕자 신분이 이렇게 괜찮을 때가 있다.
난 알렉스와 아침 훈련을 하러 나갔다. 의외로 훈련은 내게 도움이 됐다.
체력을 증진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받는 게 좋았다.
알렉스의 목표대로 ‘기사 열일곱 명을 따돌리고 도망치기’ 같은 건 일 년을 꼬박 운동해도 무리일 것 같지만.
“전하, 로웰 몽블랑과 다정한 사이셨습니까?”
몸을 풀고 있는데 알렉스가 뜬금없이 물었다.
무슨 뜻일까?
“우리 안 다정해 보였어?”
되묻자 알렉스는 당황했다.
“그러셨습니까?”
“너랑 나도 다정한 사이잖아.”
알렉스의 눈이 다시 커졌다.
“하루 종일 너랑 붙어 다니는데. 다정하기로는 너랑 내 관계가 제일 아냐?”
“그렇군요.”
알렉스가 놀랐다. 난 도대체 저 다정하다는 발언이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기도 전에 공터에 도착했다. 성주가 호의를 베풀어 내준 공터는 내 수련용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성주가 왕자에게 내준 장소에 침범할 만큼 간 큰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공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오셨군! 조프리 전하.”
미셸 에이드가 이상한 존댓말로 나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