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7화 (237/293)

237.

“이곳으로 오면서 아무런 야심도 없었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셔벗 왕은 이상한 사람이지만, 왕비님을 잘 아는 것 같다.

그는 정말 삼촌처럼 굴고 있었다. 이렇게 친근한 친척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친척은 이랬던 것 같다.

그가 왕비님을 언급하는 어조는 몹시 친밀해서, 이 사람은 정말 왕비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어마마마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으셨어요?”

왕비님은 빚을 지고 셔벗 왕을 찾아갈 사람도 아니고, 달리 그에게 폐를 끼칠 리도 없는데.

난 그에게 물었다.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겐 그를 탓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셔벗 왕은 괴로운 듯했다.

“그 애가 나를 싫어했거든.”

“…….”

“나도 그랬지만. 어리석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단다.”

그는 계속해서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나를 싫어해도 어쩔 수 없겠어. 하지만 네가 이곳에서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그런다면 견딜 수 없을 거야.”

* * *

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내가 의아해하던 점이 있다.

왕비님은 부국 셔벗의 공주였다. 왕비님의 배경은 비스코티 내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셔벗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바움쿠헨 백작은 북방의 이민족을 밀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비스코티는 국경의 군대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셔벗 왕과 왕비님 사이에는 교류가 없었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왕비님이 내게 셔벗 왕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셔벗 왕처럼 조프리에게 힘이 될 만한 사람을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조프리를 왕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라면, 후계자가 없는 셔벗은 왕비님에게 탐나는 곳이었을 것이다.

물론 왕비님은 비스코티의 왕비고, 조프리가 노려야 할 왕좌는 당연히 비스코티의 것이겠지만.

‘밀라네가 내게 연락할 리 없지.’

셔벗 왕은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때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왕비님이 공주이던 시절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 비스코티는 이민족에게 국경을 약탈당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민족과의 분쟁은 조프리의 어린 시절 내내 일어났다.

그걸 일단락한 게 바움쿠헨 백작이었다. 그 일로 백작은 나라의 영웅이 됐다. 분쟁을 완전히 종식한 에드워드가 칭송받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난 북방에 나가 본 적이 없다. 조프리는 왕성에서 애지중지 자란 왕자다. 그런 내가 북방의 상황을 귀로 들어서 안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당시 국경의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던 모양이다. 백성들이 국경에 머물고자 하지 않아서, 비스코티의 병사들이 강제로 이주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니까. 백성들을 자국의 병사들이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코티는 셔벗의 밀라네 공주에게 혼담을 넣었다. 지원을 요청한 셈이다.

‘왜 받아들이셨어요?’

난 의아해져서 물었다. 셔벗 왕은 당황했다.

‘내가? 아니란다. 난 거절하려고 했어.’

아니라고?

그가 혼담을 받아들여서 왕비님과 원수가 된 사연인 줄 알았는데.

셔벗 왕은 양국 간의 결혼 동맹이 비스코티에만 이득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비스코티는 북방의 이민족을 막는 방패였다. 비스코티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셔벗에까지 미치게 될 터였다.

셔벗 왕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고, 비스코티를 지원해 혼란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 결혼 동맹이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요?’

난 다시 의아해졌다. 셔벗 왕은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야 밀라네에겐 연인이 있었으니까…….’

‘…….’

‘이런 이야기를 네게 해도 되는 거였을까?’

그는 자신이 말해 놓고 당황했다. 자식에게 어머니의 옛 연인 얘기를 하는 게 좋은 일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저런 고민은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해야 하지 않나?

어설픈 사람이다.

아무튼 문제는 셔벗 왕에게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셔벗 왕과 그 여동생인 밀라네 공주는 나이 차가 상당해서, 밀라네 공주에게 혼담이 들어왔을 즈음엔 왕이 후계자를 갖지 못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보통 이런 경우 왕의 생식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왕비에게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기 마련이다.

셔벗 왕의 부인 로잘린 왕비도 같은 비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셔벗 왕은 이혼할 생각이 없었다.

‘왜요?’

‘그야 싫으니까…….’

‘…….’

당연한 대답이긴 했다.

셔벗 왕이 변명했다.

‘로잘린과 나는 열한 살에 약혼했어.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했단다. 평생을 함께해 온 가족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니?’

너무 상식적인 대답이라 놀라웠다.

하지만 그 대답은 밀라네 공주의 마음에 차진 않았던 모양이다.

밀라네 공주는 필리프 왕이 로잘린 왕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에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공주는 필리프 왕에게 요구했다. 로잘린 왕비와 이혼해야만 한다고.

‘온 귀족이 밀라네가 누구와 결혼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 그 애에게 혼담이 밀려들었단다. 밀라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내 후계자가 되리라고 다들 믿었어. 권력이 양분될 상황이었지.’

셔벗 왕은 기운이 빠진 듯했다.

왕에게 후계자가 없으면 그 권력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왕비님이 셔벗에서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다음 대 셔벗 왕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귀족들은 다음 대 셔벗 왕과 그 가족들에게 아첨했을 테고, 왕의 권력은 반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전부 가정이지만, 가능성 높은 가정이다.

셔벗 왕은 내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난 그래도 상관없었단다. 하지만 밀라네는 원하지 않았지. 그 애는 셔벗을 사랑했어. 셔벗의 평화를 지키고 싶어 했고, 국익에 보탬이 되고 싶어 했지. 그게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어. 그 애는 내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난했단다. 내가 후계자를 가졌다면 애초에 생기지 않았을 문제라고 했지.’

‘그래서요?’

‘그래서…… 싸웠지. 서로 다신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그 애는 비스코티로 가 버렸어.’

후계자를 생산하는 건 왕의 의무다. 이 세계 사람들에겐 왕비님의 사고방식이 더 흔할 것이다.

‘그랬단다.’

필리프 왕은 완전히 지친 듯했다. 표정에서 활기가 사라지고 깊은 주름만 남았다.

‘평화 협정은 걱정하지 말렴. 너를 보고 싶었을 뿐이란다.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맹세하마.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거야.’

필리프 왕은 약속했다.

난 그가 왜 내게 호의적이었는지 알았다.

그는 그래선 안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왕비님을 그렇게 보내선 안 됐다고 후회하는 것이다.

왕비님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내게 갚고 싶은 것이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다행이었다. 왕비님의 유일한 가족은 왕비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듯했다.

* * *

다음 날 그레이가 찾아왔다. 그는 한 손에 편지를 들고 있었다.

“필리프 왕과 대화는 어떠셨어요?”

내가 ‘안녕,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기도 전에 그가 물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레이는 지금이 아침으로 보이시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떠 있긴 했다. 푹 잠들었던 모양이다.

그레이가 본론부터 들어가길 원하는 것 같아서 바람에 응했다.

“우리가 걱정하던 일은 없을 것 같아.”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난 그레이에게 필리프 왕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줬다.

왕비님이 등장하는 옛날 얘기는 필요 없겠지.

필리프 왕이 내게 사과했고, 평화 협정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레이가 편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게 끝이에요?”

“응.”

뭐가 더 필요한가?

그레이는 납득이 안 된 것 같다.

“맞다. 우리 소르베로 갈 거야.”

셔벗 수도를 언급하자, 그레이는 손끝으로 탁자를 쳤다.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편지가 손끝에 눌렸다.

“필리프 왕이 이곳에 있는데요? 협정을 맺는 데 대신들과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나요? 하지만 그럴 거면 왕이 몸소 이곳까지 내려온 의미가…….”

“아니, 평화 협정은 이미 약속된 거고. 필리프 왕이 소르베에서 왕비님의 추모식을 열겠다고 했어. 거기에 참석해 달래.”

난 책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추모식까지 예상한 건 아니지만, 또 그런 게 없었다면 기분이 이상했을 것이다.

필리프 왕은 왕비님을 애도할 사람이 모두 참석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비스코티의 사신단이 그 기대를 충족시킬지는 모르겠지만, 참석하지 않는 것보단 낫겠지.

저 편지 에드워드에게서 온 걸까?

난 그게 신경 쓰였다. 그레이는 남의 편지 심부름을 할 애가 아니지만, 발신인이 에드워드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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