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6화 (236/293)

236.

난 그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신중한 사람이라면 역시 물어보지 않았겠지만, 난 참을 수 없었다.

“제게 뭘 바라세요?”

“내가 네게 뭘 바란다고?”

셔벗 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당황한 듯했다.

“설마. 왜 그런 생각을 했니? 난 네가 셔벗에서 푹 쉬고 가길 바랄 뿐이란다.”

내가 아는 휴식이랑 셔벗 왕이 아는 뜻이 다른 걸까?

보통 일하러 다른 나라에 간 사람이 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내게 일을 시킨 사람은 셔벗 왕이었다. 나를 사신으로 지목했잖아?

사신으로 왔더니 왕이 맞으러 나오고, 연회에 참석했더니 후계자 후보가 시비를 걸고 있다.

여기서 쉴 수 있다면 난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나쁜 뜻으로 너를 불렀다고 생각했니?”

“…….”

셔벗 왕은 펄쩍 뛰었다.

“아니란다! 셔벗은 쉬기 좋은 나라잖니. 날씨도 따듯하고 술도 맛있단다. 사시사철 파티가 열리지.”

좋은 나라인 이유가 그건가?

셔벗 왕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진짜 이 사람 뭘까?

* * *

모리스 상송은 파벨이 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은 제가 종자인 양 미셸 에이드를 모시고 왔는데, 그 모습을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이 봤다.

눈으로 보진 않았으나 하인을 통해 전해 들었으니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귀족들은 ‘상송이 에이드 공자를 지지한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 모리스는 어떤 공작의 편도 들지 않았고 어떤 공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왕이 총애하는 귀족이었다. 그의 행동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했더구나.”

모리스는 아들을 꾸중했다.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리스는 아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은 상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귀족이라면 저런 태도를 취할 리 없다.

모리스는 명성 높은 문장가였으나 종종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다른 귀족들에게서 ‘명예를 모르는 요즘 귀족 젊은이들’에 대해 듣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귀족들이 굳이 자신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으나, 부끄러운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그런 젊은이의 대표 격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파벨이 말을 얼버무렸다.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돌아왔다면 영지에서 자중할 것을, 어째서 에이드 경은 찾아갔느냐?”

“제가 찾아가지 않았어요.”

파벨은 풀이 죽어 말했다. 모리스는 그가 답답했다.

“웅얼거리지 마라.”

파벨의 목소리가 한결 커졌다.

“제가 찾아가지 않았다니까요? 그분이 찾아와서 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고요.”

“그래서 기고만장해 따라왔느냐? 어찌 그리 생각이 짧아.”

모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아들은 젊은 귀족들과 어울려 다니며 으스대는 것을 좋아할 뿐, 스스로의 성취를 쌓는 데는 흥미가 없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비스코티의 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리스는 그가 다른 나라에서도 부끄러운 평판을 쌓을 것이 걱정되었으나, 같은 해에 조프리 왕자도 입학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아들의 유학을 허락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제대로 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모리스는 비교하고 싶지 않았으나, 파벨에 비하면 조프리는 너무도 훌륭히 자랐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드 경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이지 마라. 조프리 전하께 그가 어찌 대했는지 들었을 것이다. 품행이 경솔해. 그 곁에서 네가 뭘 이루고자 하느냐?”

파벨은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모리스는 그가 어째서 유학을 포기했는지 물은 적이 없었다.

그가 엉망인 꼴로 돌아와서 요양할 때는 한번 찾지도 않다가, 이제 와 조프리 왕자를 건드렸다고 꾸중을 하는 것이다.

저 조프리 왕자 때문에 그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남을 더 챙기세요? 저보다 본인의 평판이 더 중요하신 거죠!”

파벨이 반발했다.

모리스는 저도 모르게 정색하고 말했다.

“그분이 어째서 남이 되느냐?”

파벨은 모리스가 여느 때처럼 그를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를 괄시하는 게 취미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상대해 주어도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왕자가 그럼 남이지 뭐란 말인가?

모리스는 아차 해서 말을 바꿨다.

“그분은 양국의 평화를 위해 찾아온 사절이다. 정중히 대해야 마땅해. 에이드 경 곁에서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전하께 예의를 다하도록 해라.”

“예…….”

파벨은 싫었다. 왕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뼈가 시렸다.

아버지는 대체 왜 이렇게 왕자를 챙긴단 말인가?

정말로 조프리 왕자를 왕으로 올릴 셈인가? 가문 차원에서 지지할 생각인가? 파벨은 또 다른 의미로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 * *

“저도 셔벗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요.”

난 분위기를 맞췄다.

셔벗 왕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누구나 탐낼 만한 나라지.”

“…….”

함정이었나?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역시 셔벗 왕은 나를 후계자 경쟁과 엮고 싶은 것 같다.

평화 협정이란 건 셔벗과 비스코티 사이에 체결되는 것이지만, 평화를 결정하는 건 결국 양국의 왕이다. 두 나라는 왕정 국가니까.

셔벗 왕이 평화를 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협정은 체결되지 않는다. 사신단의 임무는 실패하는 셈이다.

생각을 해 보자. 셔벗 왕의 속셈을 잘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바만 얻어 낼 계획을…….

떠올릴 수 있으면 내가 여기 앉아 있을 리가 없지.

“폐하께서 저를 터무니없는 야심가라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전 이곳에 정말 평화를 위해 찾아왔어요. 저는 사신으로서 제게 주어진 업무를 다하고 싶어요.”

내 말이 셔벗 왕의 심기를 건들지 않길 바랐다. 말을 골랐지만,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훌륭하구나.”

셔벗 왕이 말했다.

뭐가요? 난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를 이용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시면 된다는 뜻이었어요. 처음부터 비스코티와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으셨던 거죠? 저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게 목적이셨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했니?”

“폐하께서는 비스코티에 분노하고 계신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았고, 셔벗인들도 그렇더군요. 분노는 감정이잖아요. 감정에는 계산이 따르지 않지만, 폐하께서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으니까요.”

“무슨 생각일까?”

셔벗 왕은 계속 물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동그란 눈이 나를 보며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좋은 이야기꾼이라도 된 기분이다.

이렇게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에 대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이드 경이 연회장에서 저를 모욕할 때 그냥 지켜보고 계셨잖아요.”

그건 환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나 같은 사람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셔벗 왕이 날 가지고 뭘 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나로서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나야 셔벗 왕이 해 달라는 건 다 해 줘야 할 처지긴 하지만.

갑자기 셔벗 왕은 사색이 됐다.

“알고 있었니?”

어?

“그러려던 게 아니었단다. 네가 알고 있을 줄 몰랐는데, 아니, 실은 알고는 있었는데…….”

“예?”

“정말 널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단다.”

그가 너무 쩔쩔매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사람이 왜 나한테 변명하고 있지?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나?

“그럼 왜 그러셨어요?”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

그게 뭐야?

“그게, 미셸이 무슨 짓을 할지는 뻔하잖니. 갑자기 네가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해서 발이 멎어 버리더구나. 정말 나가서 말릴 생각이었단다. 조금만 구경한 다음에…….”

그가 쩔쩔맸다. 저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확신했다.

“생각보다 훨씬 잘 대처하더구나. 네가 대동한 게 그 로웰 몽블랑이라고 들었을 때는 어찌하려나 싶었는데, 아주 영리한 수하를 두었어. 셔벗에서 가장 높게 치는 게 재치 있는 태도지.”

변명하던 내용은 또 이상해져서 갑자기 내 칭찬으로 바뀌었다. 셔벗 왕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미안하구나.”

셔벗 왕이 다시 풀이 죽었다.

“첫인상이 좋지 않았을 것 같구나.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다 미셸 같지는 않단다. 실은 다들 너를 좋아해.”

“그렇군요…….”

‘다들’이 누굴까?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기쁘지 않구나?”

셔벗 왕은 의외인 듯했다. 난 그의 태도가 더 의외였다.

이 분위기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왕은 단순한 인물이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 않았다. 비위를 맞춰 주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 사람이야 내가 뭘 하든 싫어할 사람이었겠지만.

셔벗 왕은 종잡을 수 없었다. 왜 난 이 사람이 왕실 사람 같지 않을까? 실은 그는 귀족 같지도 않았다. 어딘가 어설픈 데다 욕망 덩어리 같지도 않다.

“이상하구나, 왜 기쁘지 않을까?”

“셔벗에서 저를 반가이 맞아 주신다니 기뻐요. 어마마마의 일로 비스코티에 악감정이 쌓였을 줄 알았는데요. 양국의 평화를 위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난 정석적인 대답을 했다.

“정말로 기뻐하지 않는구나. 이상해…….”

그는 자기 생각에 빠져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는 당혹스러운 듯 나를 뜯어봤다.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걸까? 난 얼굴을 문질렀다. 뭐가 묻어나진 않았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신데요?”

“밀라네가 애를 이렇게 키웠을 리 없는데.”

“…….”

그는 내가 아주 신기하다는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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