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5화 (235/293)
  • 235.

    “훌륭한 기사로군.”

    “전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습니다. 하나 전하께선 저를 반기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에이드 경은 서운하다는 듯 지껄였다.

    “전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수도에서부터 이 변방까지 밤낮을 달려왔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그런데 이 기사가 나를 모욕하는 방식이 이상했다. 뭘 하려는 건지 들어나 보자 싶었는데, 그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예. 저는 이렇게 미남자이지 않습니까?”

    뭐라는 걸까?

    내가 말문이 막혀서 에이드 경을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펴고 으쓱했다. 미국인 같은 제스처였다. 속되게 말해서 양키 같은…….

    뭐 하는 캐릭턴지 모르겠다.

    키가 크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건가? 미남의 조건에 키가 들어가는 것도 같지만, 키가 크다고 다 미남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실 난 어지간해서는 남의 외모에 감탄하지 않았다. 이 세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외국인처럼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 천사 같던 에드워드에게 심미안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를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렇군…….”

    “전하께선 어찌나 미남을 좋아하시는지, 눈에 띄는 미남이라면 측근으로 끼고 돌며 놓아주질 않으시잖습니까? 전하의 명성이 너무도 높아 제 귀에도 소문이 들어오더군요! 과연 이곳에서 전하를 뵈니 허명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

    기사의 목소리가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기사들이야 수련하며 내지르는 게 기합이니 복부 힘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큰 목소리였다.

    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잠시 조용하던 홀은 곧 수군대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뭐 이런…….

    이게 공격인가? 내가 이거에 대응을 해야 하나?

    그때 로웰이 불쑥 나섰다.

    “이런, 에이드 경.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습니까?”

    에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로웰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로웰 몽블랑? 너, 로웰 몽블랑이로군!”

    그가 로웰의 이름을 말하자, 갑자기 곁에서 성주 부인이 탄성했다.

    난 성주 부인을 돌아봤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그 몽블랑이었군요?”

    “저런 자를 곁에 두십니까? 아니, 미남이긴 하지만…….”

    성주가 당황한 듯했다.

    ‘로웰 몽블랑이 왔다고?’

    ‘소문의 그…….’

    홀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들렸다. 아까처럼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이번엔 내가 화제가 아니었다.

    연회장에서 좀 놀랄 거라고?

    로웰의 기준은 나와 다른 모양이다.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로웰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간혹 ‘로웰이 누구야?’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귀족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 그!’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로웰은 소동에 개의치 않았다.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태연하게 에이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는 이미 미련을 버렸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리 마지막 만남이 마음 아팠대도 전하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로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에이드를 올려다봤다. 물기 도는 눈이 조명을 받아 촉촉하게 반짝였다.

    “너 뭐, 뭐라는…….”

    에이드는 등장 이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성주 부인이 들고 있던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 외에도 여기저기서 부채 바람이 이는 걸 보니 이 갑작스러운 치정극을 다들 흥미진진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실을 에이드도 알아차렸다.

    “누가 미련이 남았다고!”

    “예. 실은 미련은 제게만 남은 거군요.”

    로웰은 미소 지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 아파지는 미소라 성주 부인이 탄식했다.

    “에이드 경. 여기서 이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마음이 안 좋으시겠지만, 전하께선 몽블랑의 연인이 아닌 사신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셨는걸요.”

    “마음을 추스르길 바라오. 그대도 훌륭한 기사인데 이렇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야…….”

    셔벗의 귀족들이 에이드를 말렸다.

    “이런 헛소리에 넘어가다니……. 아니, 누구가 그런 한심한 놈이라는 거야!”

    에이드는 반발했으나 여론을 넘을 수 없었다.

    난 감탄하며 로웰을 쳐다봤다. 그는 내 곁으로 돌아와서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다시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문제를 피하고 싶으신 거죠? 이런 일에 진지하게 대응하실 필요 없어요. 셔벗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연애 사건이고 그 다음이 술이거든요.”

    로웰은 재빨리 속삭이고 “실례했어요.” 하며 팔을 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다들 잔뜩 취해 있어서 연애 사건을 목격하면 정신을 못 차릴 거라는 뜻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셔벗 귀족들은 전부 한 손에 잔을 들고 있었다.

    내가 마신 건 샴페인이었지만 그들의 잔에 든 건 색채가 달랐다. 다들 얼굴이 붉은 게 흥분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너 천재인가 봐.”

    “과찬이세요.”

    로웰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난 아까부터 궁금하던 걸 물었다.

    “그런데 여기 귀족들은 어떻게 다들 널 알고 있어? 너 중앙 사교계에서만 활동했다지 않았어?”

    “…….”

    로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커튼 뒤에 필리프 왕이 서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듯했다.

    “국왕 폐하 입장하십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홀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귀족들은 왕에게 인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셔벗 왕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벌인 연회에서 내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걸 방치했다.

    애초에 에이드조차 셔벗 왕이 불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부모 자식과 형제간에도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게 왕족이다.

    타국으로 보낸 여동생에게 그가 아무런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자식을 이용할 마음만 품었을 수도.

    조프리를 이용하려던 사람은 많았다.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부터 그 형제와 친구까지도 수도 없이 조프리를 재고 시험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충격받을 리 없었다.

    문제는 셔벗 왕이 원하는 걸 쥐여 주지 않는다면 평화 협정이 지난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실례합니다, 조프리 전하. 필리프 폐하께서 독대를 청하십니다.”

    시종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난 로웰과 알렉스를 돌아봤다. 그레이는 벽에 붙어서 이델라와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는데, 아마 방금 전 일을 논의하는 듯했다.

    “동행하겠습니다.”

    알렉스가 당연한 듯 따라붙었다. 그러나 시종이 그를 가로막았다.

    “폐하께서는 조프리 전하만을 따로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녀올게.”

    난 알렉스에게 말하고 시종의 뒤를 따랐다.

    이건 뭘까?

    “미안하구나. 불쾌한 경험을 하게 했어.”

    방에 들어가자마자 셔벗 왕은 내게 사과했다. 그가 내 손을 잡아서 난 몸을 뺄 수도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께서 잘못하신 일도 아닌데요.”

    난 당황한 척했다. 실제로 놀라기도 했기 때문에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셔벗 왕의 짙은 눈썹이 일자로 처졌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말했다.

    “내가 연회를 열었고 그곳에 너를 초대했지. 네게 좋은 기억만 주고 싶었단다. 그 애가 그리 경솔하게 굴 줄은…….”

    내가 엇나갈까 봐 달래는 걸까? 난 삐뚤게 생각하려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셔벗 왕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했다.

    한숨이 나왔다.

    음모에 몇 번이나 휘말려도 발전이 없다. 에드워드는 숨만 쉬어도 나쁜 계획이 떠오르는 것 같던데 내 머리는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상대가 수작만 부려도 알아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

    탓해 봐야 주인이 나였다. 내가 그렇지 뭐.

    “에이드 경을 폐하께서 부르셨어요?”

    “뭐?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니?”

    셔벗 왕의 말투도 달라졌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마치…… 나를 어린 조카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것도 내 기대일까?

    “미셸은 경솔해서 실수가 잦은 아이지. 그 애가 널 좋은 마음으로 환영할 리 없어. 어째서 내가 그 애를 부르겠니?”

    그는 속상한 듯 물었다. 그러더니 스스로 답을 냈다.

    “날 경계하는구나.”

    “예.”

    거짓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미 말했다. 난 셔벗 왕이 무언가 싫은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잠시 침묵했다.

    “신중하구나.”

    그는 기뻐하는 듯했다.

    내가 신중한 사람이라면 방금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리 없다는 건 무시하는 모양이다.

    난 아무 논리나 붙여서 조프리를 칭찬하는 사람을 몇 명 알았다.

    필리프 왕은 이상한 데서 왕비님을 닮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