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2화 (232/293)

232.

“연애에 취미가 있다면 파티도 좋아하겠군.”

필리프 왕이 말했다.

난 싫어한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눈치 없이 굴 순 없었다.

“싫어하진 않아요.”

“연회는 셔벗에서 즐기는 게 제일이지요.”

“무도회를 좋아하시나요? 셔벗에선 사교 철이면 매일 밤 무도회가 열린답니다.”

성주가 자랑하자 성주 부인이 거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스코티와 갈등 상황 중이고, 난 사신으로 찾아왔다. 게다가 여긴 수도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매일 무도회가 열릴 리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난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대화 흐름인지 모르겠다.

필리프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결정됐군. 초대장을 보내게.”

“예, 폐하.”

“왕자에게 셔벗 문화를 보여 주고 싶었지. 환영 연회보다 더 셔벗다운 환대가 있겠나?”

“현명하신 말씀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성주는 당장 일어날 것처럼 굴었다.

지금 연회를 열겠다는 건가?

내가 언제 외교를 해 봤다고 사신의 역할을 알 리가 없다. 다만 내게 셔벗과 비스코티의 갈등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킬 의무가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난 당황해서 말했다.

“폐하, 저와 사신단은…….”

“사신단. 물론 그들도 연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해야지. 왕자는 아랫사람을 챙기는 주인이군.”

셔벗 왕은 너그럽게 말했다. 원래는 참석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셔벗 왕은 모든 문제가 끝난 것처럼 굴었고, 만찬이 끝나자 성주는 바쁘다며 떠나 버렸다.

난 그레이에게 붙들렸다.

“나 아냐.”

난 변명부터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 추궁하려던 거 아니야? 외국에 와서 사신단의 평판까지 망가뜨릴 일 같은 건 안 했어.”

그레이는 입술을 깨물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전하의 밤놀이까지 제게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게 전하의 사생활에 참견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조프리가 난봉꾼 짓을 하고 다니면 사신단의 위상도 바닥에 떨어지는 거 아닌가? 충분히 공적인 일 같은데.

그리고 그런 말은 인상을 안 쓰고 해야 진심같이 들릴걸.

욕먹을 것 같아서 그 말은 안 했다. 대신 난 사과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그 하인에게 들을 말이 있어서 그랬어.”

“무슨 말이요?”

“셔벗 왕은 진짜 우리를 만나러 온 것 같아.”

그레이는 인상을 썼다.

“그렇겠죠?”

“그리고 이건 내 느낌인데, 셔벗 왕은 내 호의를 사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

“예. 전하께서 눈치채실 정도면 모를 사람이 없겠네요.”

아, 그래.

그레이도 느꼈다는 소리다.

필리프 왕의 태도 때문에 에드워드의 말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셔벗에 가면 후계자 분쟁에 휘말릴 거라던 말.

난 그 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셔벗 왕이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 들 거라는 소리로.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애를 후계자로 삼는 사람은 없다. 후계자라는 건, 달리 말하면 자식이잖아.

나라도 안 그런다.

난 에드워드의 말을 머릿속에서 굴려 봤다. ‘셔벗 왕이 널 후계자로 삼을 거야’라고 했던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걘 원래 말을 제대로 하는 법이 없지만.

사실 에드워드가 한 말은 ‘셔벗 왕이 널 후계자 분쟁에 이용할 거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내 호의를 사서 어떻게 이용할 수 있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프리는 필리프 왕에게 변명하러 온 셈이다. 왕이 원한다면 나를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공들이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의문인 건 또 있었다.

연회를 여는 게 어떻게 조프리의 호의를 사는 방법일 수 있지?

상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다. 셔벗은 왕비님을 이유로 조프리를 불러냈다.

난 셔벗이 조용할 거라고 예상했다. 슬퍼하지는 않더라도 추모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셔벗 왕이 날 후계자로 삼을 리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날 좋게 볼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사랑하는 상대를 잃으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탓하게 되어 있다. 억지를 부리게 되어 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상한 기대를 한 셈이다.

이상한 기대라는 걸 알았으니 기대를 버리면 된다. 난 그레이의 답변을 기다렸다. 명석한 그레이 크래커 공작이 기발한 조프리 이용법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레이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하의 호의를 이용한다고요? 어디에요?”

왜 모르는 척이지?

“셔벗 후계자 분쟁에.”

그레이의 입이 벌어졌다.

“이런 당연한 걸! 어리석은!”

난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스스로에게 화난 듯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어리석어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어요. 전하께서 짚어 주시지 않고는 깨닫지 못하다니, 저는…….”

“에드워드한테 못 들었어?”

난 설마 싶었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다.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누구요?”

“에드워드. 나보고 셔벗에 가면 후계자 분쟁에 휘말릴 거라던데.”

“그런 말을 하셨다고요?”

그레이한테 얘기 안 했다고?

이 자식 나한테 또 아무 말이나 한 거 아니겠지? 에드워드에 대한 불신감이 치솟았다. 난 아래로 억눌렀다. 에드워드가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아니겠지?

“그러니까, 전하께서 셔벗에 오지 말아야 했던 이유는…….”

그레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난 예상 대답을 제시했다.

“실컷 이용당할 테니까? 그런데도 외국 사신 신분이라 대응도 못 할 테니까?”

“그게 아니죠! 셔벗 왕이 전하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하잖아요? 셔벗의 환대를 보여 주겠다며 국경까지 몸소 찾아왔잖아요! 왜 전하를 셔벗에 눌러앉힐 속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너라면 외국인을 후계자로 삼고 싶겠어?”

그레이는 기가 막힌 듯했다.

“전하는 반이 셔벗인이잖아요!”

“평생을 비스코티에서 살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없다고?

내가 셔벗 백성이라면 상관 많을 것 같은데.

* * *

난 로웰을 불러들였다.

셔벗은 이웃 나라지만 내가 있던 시대와는 달라, 가볍게 외국 여행을 다녀오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귀족은 몸이 재산이다. 왕국의 주인인 왕이 제 몸 아끼듯 영지의 주인인 영주도 제 몸은 끔찍이 여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여행자는 후계자가 되지 못할 차남 이하 귀족 자제들, 혹은 상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잃을 게 없는 사람만 여행을 다니는 셈이다. 혹은 여행이 직업인 사람만.

로웰은 여행자의 조건에 완벽히 부합했다. 상인인 데다 귀족의 막내아들이다. 그가 어쩌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가 자유로운 영혼이라 다행이었다.

로웰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교계에 출입 가능한 나이가 되고서부터, 셔벗에서 열리는 파티는 안 가 본 곳이 없다고.

“대단한데. 왕도 본 적 있어?”

난 감탄했다.

“예. 왕실 주최 연회에도 참석해 봤으니까요. 인사도 올린 적 있어요. 제가 인사드린 걸 기억하진 못하시겠지만요.”

“셔벗 왕실 분위기는 어때?”

“제가 셔벗 왕족은 아니라서요.”

당연히 그렇겠지.

“왕궁 시녀와 연애해 본 적 없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전 책임지지 못할 짓은 저지르지 않아요, 전하.”

로웰이 웃으며 말했다.

다섯 다리는 책임질 짓인가? 바람둥이의 윤리관은 이해하기 힘들다.

“하녀는?”

로웰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셔벗 왕실이라고 해도, 국왕 부부밖에 없으니까요. 셔벗의 로젤린 왕비는 결혼한 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 아이를 가지지 못했죠. 그래도 금슬은 좋았어요. 대신들도 필리프 왕을 재촉하지 않았거든요.”

“신기하네. 왕권이 강해서인가?”

귀족 사회에서 불임은 이혼 사유가 된다.

“그것도 있겠지만요. 제가 한창 파티를 다녔을 땐 다들 공작의 자식 중 한 명이 왕위를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형제 상속.

왕에게 직계 자손이 없으면, 계승권을 가진 형제에게 왕위가 넘어간다.

이해가 안 되는데.

“필리프 왕이 몇 살이었지?”

“그것까지는 저도 잘…….”

“마흔여덟이에요.”

그레이가 대답했다. 별걸 다 안다.

“노환이 생길 나이는 아니잖아.”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셔벗 왕은 젊고 건강해 보였다. 왕이 건강하기만 하면, 왕위 다툼은 수면 위로 쉽게 부상하지 않는다.

대체 에드워드는 뭘 보고 그런 말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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