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1화 (231/293)
  • 231.

    그 훌륭한 필리프 왕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그는 쉴 새 없이 말했다.

    “사신단 환영식은 수도에서 열어야겠지. 다들 왕자를 환영할 거야.”

    “…….”

    “온 나라의 귀족을 불러 왕자를 소개하고……. 아니지. 너무 많은 사람을 부를 필요는 없겠지. 왕자를 소개할 만한 사람이면 충분할 거야. 번잡스러운 건 싫거든.”

    “…….”

    “또 만찬을 준비해야겠지. 여독을 푸는 데 좋은 음식만 한 게 없어. 가리는 음식이 있나? 잘 먹지 못하는 음식이라거나.”

    혼잣말인가 싶어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질문이 들어왔다.

    필리프 왕이 내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도 말 위에서 몸을 돌린 채였다.

    “아니요.”

    무슨 질문이었지?

    눈치껏 대답하자, 필리프 왕은 다시 웃었다.

    “건강하군. 건강이 제일이지.” 하면서.

    이상한 일이다. 셔벗 왕은 잘 웃는 사람이었다.

    왕비님이 우울한 분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난 왕비님의 웃는 얼굴을 한정된 상황에서만 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왕비님과 닮지 않았다.

    눈을 깜빡인 순간, 필리프 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다정해서 난 깜짝 놀랐다.

    필리프 왕이 미소 지었다.

    “날씨가 좋지 않나? 성주가 햇살이 좋은 방을 준비해 뒀을걸세.”

    “감사합니다, 폐하.”

    나도 미소 지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렇지. 그 말을 빼먹었군. 나를 편히 불러도 좋네. ‘야’는 곤란하겠지만. 필리프 삼촌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니, 그건 좀…….

    * * *

    성주 부부는 우리를 환영하며 부디 자기 집처럼 머물러 달라고 말했다. 그들이 환영한 게 사신단인지 셔벗 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가 대접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삭신이 쑤시는 느낌이었다. 오는 길에 피로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먼지투성이 몸을 씻고 나오자, 도트가 수건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왕자님, 문밖에서 하인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왜 쉬지 않고?”

    “앗, 제가 일 시킨 거 아니에요! 성주가 보낸 하인들이라나 봐요. 돌려보낼까요?”

    도트가 머리의 물기를 제거하며 물었다.

    감시인가? 반사적으로 생각한 건 나뿐인 모양이다. 누가 내게 하인을 보내기만 하면 의심하는 습관이 든 것 같다.

    “잠깐 들어오라고 해.”

    “네? 정말요, 왕자님?”

    도트는 몹시 당황하면서도 문을 열었다.

    하인들에게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나도 외부인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인들은 이 성의 내부자이기도 했다. 적어도 셔벗 사람이니만큼, 나보다 셔벗 왕에 대해선 더 잘 알겠지.

    성주가 보낸 하인은 남자 셋, 여자 셋으로, 후자는 하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원 키가 크고 외모가 번듯한 사용인들이었다. 성주 피넛 백작의 위세를 알 만했다.

    그들은 문이 열리자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 모시러 왔습니다. 부디 전하의 휴식에 도움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가장 앞에 선 하인이 말했다. 왕자를 상대하는데 발음도 좋고 표정도 자연스럽다. 노련한 하인이다.

    “응, 고마워.”

    이 사람은 안 되겠다.

    난 둘러보다가 가장 뒤에 있던 하인을 지목했다.

    “이름이 뭐야?”

    “저, 저 말입니까?”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앞에 있던 하인의 눈총을 받고 말했다.

    “한스입니다, 전하. 모,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응. 한스는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은 쉬어도 돼.”

    한스는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난 문을 닫았다. 가까이서 보니 한스는 첫인상보다 더 어린 얼굴이었다. 조프리보다 어린 것 같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왕자님. 왕자님도 어른이시니까요.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도트가 결연하게 물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다.

    왜 저러는 걸까? 상관없지만.

    “쉬고 싶으면 들어가도 돼.”

    “예, 왕자님.”

    도트가 나가자, 한스는 크게 숨을 삼켰다. 겁먹은 모양이다.

    셔벗에도 비스코티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퍼져 있나?

    왕비님이 셔벗인인 만큼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그 나라’ 사람들은 거만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원래 국경을 맞댄 나라와는 사이좋을 수가 없다.

    조프리는 이번 분쟁의 씨앗은 아니다. 하지만 곁가지쯤은 됐다. 셔벗인이 내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대도 이상하지 않다.

    “따듯한 초콜릿이라도 마실래?”

    도트에게 잠깐만 있어 달라고 할걸.

    잠깐 후회됐지만, 초콜릿쯤이야 나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스는 볼을 붉히더니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벗을까요?”

    뭐?

    난 한스가 첫 단추를 풀기 전에 그 손을 잡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다.

    한스가 나를 올려다봤다.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조명 탓인가? 아까보다 더 어려 보였다.

    미친 거 아니야?

    피넛 성주 뭐 하는 사람이야?

    하인을 들인 의도가 그런 게 아니었다고 설득한 뒤에야 난 셔벗 성주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니면 셔벗의 문화가 이상하거나.

    도트 없이 초콜릿을 찾는 데는 실패해서, 난 그냥 끓인 물에 찻잎을 우려 넣고 한스에게 들려 줬다.

    그는 한 모금 먹고 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차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 용무를 다했다. 김 오르는 잔이 주는 온기 덕분에 그는 마음이 풀어진 듯했다.

    “사실, 다들 며칠 잠을 자지 못했어요.”

    어린 하인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성의 집사가 갑자기 중요한 손님을 시중들어야 한다며 그들을 이 방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성주가 문제인 것 같다.

    “일이 많았나 보네.”

    난 그렇게만 대꾸했다. 하인이 볼을 붉혔다.

    “중요한 손님이 와 계셔서요.”

    “오래 계셨나 봐.”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어요. 지난주에 찾아오셨으니까요.”

    하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다른 중요한 손님이 또 찾아오신다고 해서, 그 손님맞이를 하느라 또 정신이 없었어요. 그분이 비스코티의 조프리 전하실 줄은 몰랐어요.”

    난 하인에게 쓸데없는 정보를 몇 가지 더 물어본 뒤, 도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보냈다.

    셔벗 왕은 나를 기다렸던 것 같다.

    왕이 있어야 할 자리는 왕성이다. 그가 왜 국경에 나와 있었을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겉으로 보이기에는 그렇다.

    내가 마차에서 돌린 시뮬레이션에 ‘셔벗 왕이 나를 맞으러 온다’ 같은 예측은 없었다. 그가 내게 호의적일 거라는 예상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셔벗이 위험해서.’

    에드워드의 목소리와, ‘왕위 다툼에 휘말릴 거야.’ 하는, 역시 에드워드가 남긴 경고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진짜?

    * * *

    셔벗식 만찬은 과연 화려했다.

    참석한 사람은 필리프 왕과 성주 부부, 나와 그레이였다.

    재상은 왕의 실정을 막지 못한 책임과 일부 귀족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줬다.

    그가 좋은 재상으로 기록될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모르겠다.

    내가 재상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나이 든 이리 같은 느낌이었다. 늦둥이 아들이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팔불출이었지만.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서 자랑스러울까?

    작위 승계는 원칙적으로 왕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왕의 대리인인 에드워드가 허락해서 그레이는 크래커 공작이 됐다.

    대단한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난 그렇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에드워드는 이미 성년이고, 나도 곧 생일이 다가온다. 조프리의 생일이지만.

    난 처음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간절히 성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옛날 일이다.

    만찬에 참석하기 전, 바움쿠헨 백작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전하. 밤놀이도 좋지만, 슬슬 한 명에게 정착해 진지한 애정을 나눠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뭐라는 걸까?

    “백작, 무슨 소문을 듣고 다니는 거야?”

    “소문이 아니라, 그 녀석이…….”

    백작은 눈치를 보더니 말을 바꿨다.

    “하여간 전하, 술과 색을 즐기던 기사 중에 오래 산 놈이 없답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 난 손만 흔들어 그를 내보냈다.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럽지는 않은 법이다.

    그 헛소리의 출처를 깨달은 건 성주를 만난 뒤였다. 성주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전하, 밤은 편안하셨습니까?”

    “신경 써 준 덕분에. 환대에 감사하네.”

    “별일도 아닌 것을요. 전하께서 마음에 드셨다면 그 아이를 전하의 전담 하인으로 두겠습니다. 그 아이도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면 영광이겠지요!”

    뭘까? 대화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기류를 셔벗 왕도 느꼈다.

    “밤? 그렇군. 건강하다는 건 좋은 거야.”

    그가 아무 말이나 했다.

    난 억울했다!

    그레이가 나를 돌아봤다. 그러더니 날 눈빛으로 질책하지도 않고 테이블을 노려봤다. 그게 더 무서웠다.

    “전하께서 연애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소식쯤은 저도 들었습니다. 셔벗의 백성들에게도 전하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비스코티와 달리 셔벗에서는 연애가 흠이 아니랍니다.”

    성주가 나를 추켜세웠다.

    이 분위기는 아니다. 난 변명할 필요를 느꼈다.

    “소문은 대개 과장된 점이 있지.”

    “하하, 물론이지요. 셔벗 사교계에서 제일가던 인사도 동시에 열다섯 명은 못 만난 것을요. 사람들, 입방정도 참!”

    난 억울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