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0화 (230/293)
  • 230.

    31. 셔벗에서 생긴 일

    셔벗으로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비구름은 머리 위에 머물다가 오후가 되자 사라졌고, 너무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걷기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사신단은 머무는 영지마다 환대받았다. 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줄 정도의 여유를 찾았다.

    문제는 없었다.

    몇 가지 이상한 점은 있었지만.

    알렉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내가 붕대를 푼 날부터 그는 운동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강도가 대단하진 않았다.

    일정이 바빠서 운동할 시간을 내기도 힘들었고, 애초에 알렉스부터가 좋은 선생님이 아니었다.

    ‘혹시 불편한 데가 있으십니까?’

    ‘응, 다리가 뻐근한가?’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의 몸이 약해진 걸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스는 쩔쩔매며 스무 번 반복해야 하는 자세를 반으로 줄여 줬다. 좋긴 했지만, 엄살에 쩔쩔매는 선생님이 학생을 운동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알렉스가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상한 건 바움쿠헨 백작이었다.

    “백작, 무슨 일 있나?”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자 백작이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었다.

    “제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군요.”

    “응. 알렉이 좋은 선생님이라.”

    아들 칭찬이 듣고 싶었나?

    대답해 주자, 백작은 오묘한 표정으로 박수를 보내며 사라졌다.

    박수는 왜 보낸 걸까?

    애초에 왜 엿보고 있었던 거야?

    이상한 사람은 또 있었다.

    “전하. 혹시 간식을 좋아하십니까?”

    모리스 상송이 마차로 다가와 물었다. 그에게도 물론 마차가 있었다. 셔벗에서부터 타고 온 마차였는데, 셔벗의 재력을 보여 주는 것처럼 외관부터 훌륭했다.

    상송은 종종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행렬을 따르곤 했다. 알렉스도 몸이 피로하다며 종종 하는 행동이어서, 그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국 왕자에게 막대 사탕을 챙겨 주는 건 이상하지 않나?

    거절하면 양국 우호에 문제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난 좋게 대답했다.

    “싫어하진 않지.”

    “좋아하시는군요. 다행입니다.”

    모리스는 멋대로 내 대답을 이해하더니, 자기 마차로 가서 사탕 바구니를 들고 왔다.

    “드십시오.”

    내가 이 사람한테 화낸 적 있나?

    당분이 부족해 보이나?

    “고맙지만, 이렇게까진 필요 없는데…….”

    “제겐 사탕이 많습니다.”

    아, 그래.

    궁금한 정보는 아니었다.

    모리스는 내 떨떠름한 반응을 보더니 덧붙였다.

    “셔벗은 디저트가 발달한 나라여서요.”

    자랑하려고 준 건가?

    아무튼 이런 말 그대로 이상한 일이 몇 번 일어났지만, 대체로 평온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알렉스가 나를 운동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동 중에 저래도 되나 싶었지만. 되니까 시키는 거겠지.

    로웰과 이델라는 관리들이 탄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바쁜 것 같다.

    모리스가 준 사탕에선 물론 독이 검출되지 않았다. 모리스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수상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피곤하면 졸거나 사탕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긴 여정 끝에 우리는 국경을 넘었다.

    국경이라는 건 영지의 경계와 비슷했다. ‘여기서부터 다른 나라’라는 표시가 걸려 있진 않다. 만리장성이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국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셔벗군이 주둔해 있기 때문이다.

    협정에 따라 셔벗군은 압박을 멈추고 군사를 물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국경에 주둔한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난 보는 순간 압도됐다.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응.”

    셔벗 사신단에선 모리스가, 우리 쪽에선 그레이가 출발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평지를 지나 셔벗 주둔군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셔벗 주둔군에서 윤기 흐르는 털을 가진 흑마가 나왔다.

    주둔군 쪽이 시끄러운 것 같다고 느꼈다.

    그 말에 탄 사람은 가벼운 갑주를 걸친 남자였는데, 기사에게 무언가를 명령하는 듯했다.

    명을 받은 기사가 날듯이 달려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조프리 전하께 말씀 올립니다. 어느 분이 조프리 왕자 전하십니까?”

    난 말에서 내려 그의 앞에 다가갔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복잡한 문제로 얽힌 타국 왕자에게 취하기엔 너무 공손한 태도 아닌가.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필리프 폐하께서 전하를 환영하십니다. 폐하께선 전하와 함께 성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뭐라는 걸까?

    난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한 뒤에는, 침착하기 위해 애쓰며 다시 말에 올랐다.

    왕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경우는 그 왕이 직접 명령한 상황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곳에 셔벗 왕이…….

    말이 되나?

    난 목을 빼고 살펴봤다. 셔벗 주둔군이 다시 보였다. 주둔군 방향이 시끄럽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위풍당당한 흑마가 보였다. 흑마에 탄 남자가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사람이 필리프 왕이야?

    미친 거 아냐?

    셔벗 왕이 어떤 사람이든 부르는데 무시할 순 없었다. 호위를 끌고 다가가자 필리프 왕과 그 주변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필리프 왕은 온화한 표정이었다. 다른 나라 왕자를 보겠다고 국경까지 찾아온 정신 나간 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뒤로 그레이가 보였다. 그레이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서 있었다.

    난 그에게 눈짓했다.

    이 사람 미친 사람이야?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뜻이 통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필리프 왕은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했다.

    표현 그대로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두 팔을 벌렸다.

    왕보다 높은 곳에 있을 순 없어서 나도 말에서 내렸다.

    “환영합니다!”

    필리프 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외교적 관례에 어긋나지 않나?

    그런데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

    필리프 왕이 모리스 상송을 돌아봤다.

    “비스코티에선 인사할 때 포옹을 하지 않는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폐하.”

    필리프 왕은 표정이 밝아지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셔벗에 온 걸 환영하네, 조프리 왕자! 말을 편히 해도 되겠나? 그대가 오길 무척이나 기다렸어.”

    그러더니 그는 날 덥석 안았다.

    주변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병장기 빼드는 소리 같은 게 들렸는데, 안긴 채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다들 무기를 집어넣어. 셔벗은 조프리 왕자를 환영하네! 위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어. 그렇지 않나, 조프리 왕자?”

    “예, 폐하. 물론입니다.”

    난 일단 동의했다.

    팔을 풀어 주면 편하겠지만, 내가 왕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폐하, 하지만 저쪽이 먼저…….”

    “조프리 왕자, 그대의 호위는 아주 충성스럽군! 마음에 들어.”

    셔벗 기사의 항의를 필리프 왕은 물리쳤다.

    난 그제야 왕의 품에서 벗어나 주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렉스와 바움쿠헨 기사단이 검을 빼 든 채였다.

    머릿속에서 비상 신호가 울렸다. 난 재빨리 외쳤다.

    “검을 넣어! 이 무슨 무례인가? 죄송합니다, 폐하. 예기치 못한 일을 겪어 호위가 당황한 듯합니다.”

    필리프 왕의 탓도 있다는 뜻이다.

    이제 셔벗에선 문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셔벗이었고, 상대는 이 땅의 주인이었다. 내가 알던 유일한 왕은 트집을 잡는 데 도사였다.

    어떻게 될까?

    “아주 마음에 들어.”

    필리프 왕은 미소 지었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건 충성스럽다는 뜻이지! 짐은 기사의 제일 덕목이 충성이라고 생각하네. 복잡한 생각 같은 건 기사에게 필요 없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타당한 말씀이십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는 만족한 듯 내 호위를 둘러보더니 활짝 웃었다.

    “그럼 문제는 없는 건가? 비스코티의 사신단을 위해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네! 여독 탓에 피로하겠지. 어서 성으로 들어가세.”

    난 셔벗 왕과 정말로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채 성으로 들어가게 됐다…….

    * * *

    내가 셔벗에 대해 아는 바는 다음과 같다.

    셔벗은 넓은 평지를 보유한 나라였다. 기후가 따듯해 농사짓기 좋고, 식문화가 발달했으며, 나라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 있어 이동이 용이했다.

    온갖 조건이 갖춰졌으니 부유하지 않기가 힘든 나라였다. 비스코티에 유행하는 사치스러운 귀족 문화와 놀이 등은 이 나라에서 시작됐다.

    물론 처음부터 이 나라가 강대했던 건 아니다. 비스코티도 히스강의 주인인 적이 있었다.

    지금 와서야 옛날의 영광이지만.

    필리프 왕은 뛰어난 지배자였다. 즉위 이후 수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나 그는 성공적으로 제압했고, 현재 셔벗은 평온하고 강대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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