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29화 (229/293)
  • 229.

    예를 들어 한번 기절했다 깨어난 저 기사는 오렌지 백작의 종질이라는 모양이다. 그럼 사실 귀족도 아닌데, 기사 작위는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안 깨어난 척하며 주변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왕자에게 덤벼들었다는 난관을 어찌 타개할지 고민이 깊은 모양이다.

    “그만 자고 일어나. 왕자를 계속 세워 둘 셈이야?”

    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가 그를 발로 건드리자, 그는 막 일어난 사람처럼 기지개를 켰다.

    난 팔짱 끼고 지켜봤다. 그래. 연기 잘한다.

    “세상에, 전하! 너무도 피로해 깜빡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깨어나자마자 전하를 뵈니 눈이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누추한 곳을 어찌 찾으셨는지…….”

    “그대 이름이 뭔가?”

    “폴리 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전하.”

    “폴리 경. 명성 높은 기사로군.”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난 검을 빼 들었다.

    “내가 결투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대와 같은 기사가 내 검을 받아 주면 기쁘겠어.”

    “예? 자, 잠깐…….”

    “문제가 있나? 맞아. 결투엔 규칙이 필요하지. 상대를 상처 입히면 실격으로 하자.”

    “저, 전하!”

    난 한 합에 폴리 경을 쓰러뜨렸다.

    그는 검을 받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내가 힘이 좋아서가 아니라 균형 잡기에 실패해서다.

    한마디로 실력이 없다.

    이 사람한테 대체 누가 기사 작위를 준 거지?

    귀족군 소속 기사가 다 이 수준인가?

    알렉스가 말려서, 난 그에게 다른 기사들을 시험하도록 했다. 전부 한 합 만에 쓰러졌다. 귀족군은 오합지졸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이 병사들을 이끌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던 거지?

    아, 반역이 아니라 대화랬지.

    기가 찼다. 이 나라는 답이 없다.

    위에선 누가 왕이 되네 하고 있고, 귀족들은 연못이 유행이니 사업이 유행이니 헛소리에, 기사들은 실력이 없고, 평민들은 빚만 쌓고 있다.

    난 사실 귀족군을 반 갈라서 나머지 반은 에드워드의 호위로 붙일까 생각했다. 괜찮은 기사가 있다면 더 좋았다.

    그들에게 충성심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없는 편이 나았다. 본래 모시던 주인에게 너무 충성해 왕자의 목을 노리면 곤란하니까.

    에드워드는 따를 만한 왕자고 모실 만한 주인이다. 거기에 돈과 명예가 더해지면, 감옥에 갇혀 있는 주인을 버리고 선택할 만하다는 판단이 서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답이 없다.

    전부 두고 가도 나라에 위협은 안 되겠다.

    이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가장 끝내주는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일단의 사병이 외출에서 돌아왔다. 부대를 이탈해 어디 다녀온 듯했는데, 뭔지 모를 보따리를 하나씩 지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그들은 우리를 보고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폴리 경이 야단을 떨었다.

    “조프리 전하시다. 예를 갖춰라!”

    사병들은 바로 자세를 낮췄다.

    “2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반갑군. 들고 있는 건 뭐지?”

    난 피곤해져서 예의상 물었다.

    사병들이 대답했다.

    “일용할 양식입니다, 전하.”

    “그렇습니다. 인근 지역의 백성들이 기꺼이 제공한…….”

    “뭐?”

    하다못해 수탈도 하냐?

    * * *

    사병들은 수탈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그들이 급히 출발하느라 영지의 지원이 충분치 않았고, 사정을 아는 수도 근교의 백성들이 그들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빼앗았다는 거잖아?

    설상가상으로 보따리에서 닭이며 뭐며 하는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 사병들은 농민에게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키우는 가축의 씨를 말리려는 모양이었다.

    난 머리가 아팠다.

    기사들은 내 눈치를 보더니 ‘명예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사병들의 억울한 표정을 보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래도, 병사들을 굶긴 지휘관이 책임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난 바움쿠헨 백작을 그곳에 두고 떠났다.

    “저들에게 규율을 가르쳐 줘.”

    “맡겨만 주십시오.”

    궁으로 가는 길에 로웰을 만나 귀족군에게 식량을 보급하라고 지시했다. 규율이 잡히는 것과 굶주리는 건 다른 문제니까.

    그러고 돌아오니 밤이었고, 며칠 뒤면 사신단 출발일이었다.

    며칠 뒤에, 저 오합지졸과 함께 셔벗에 가야 한다.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 보니 나도 여행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경험은 조프리로서 겪었다. 뛰어난 기사와 정예병이 호위로 붙는 데 익숙했다.

    나 엄청 왕자처럼 살아온 거 아닌가?

    내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만큼 거친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 온실을 벗어나 외국으로 가려니 착잡하고 잠이 안 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로부터 며칠은 수면제 신세를 졌다.

    발신인 불명이라고 해야 할지, 사실 누가 보냈는지 뻔한 그 선물은 약효가 좋았다. 마시고 눈만 감으면 곯아떨어졌다.

    “운동이 효과가 있나 봐요! 잘 주무시니 안색도 맑아지셨어요.”

    내가 뭘 먹고 있는지 모르는 도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의 기쁨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약병은 잘 숨겼다.

    사신단 출발 당일은 하늘이 어두웠다. 새벽부터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 이슬비라도 쏟을 듯했다.

    천문박사들은 죄를 지은 듯 행동했으나, 난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나라 안에서 이동할 것이다. 비 때문에 입을 피해가 크지 않다.

    계절은 여름이었다. 난 최근 며칠간 귀족군을 상대하면서 갑옷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배웠다. 주둔지에서도 갑옷을 전부 착용해야 하지 않나 했던 건 끔찍한 생각이었다.

    “날이 너무 무더운 것보단 낫겠지.”

    “전하의 머리 위로 내리는 비는 하늘의 축복일 것입니다.”

    처벌을 피한 천문박사가 덕담했다.

    뭐 그렇게까지야, 라고 생각했지만, 난 웃으며 받았다.

    “부디 그러길 바라.”

    덕담하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뻔뻔해지고자 하면 얼마든 태연하게 굴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를 메운 인파 앞에서 태연하긴 힘들었다.

    사신단이 출발하는 건 뭐 대단한 국가 행사가 아니다. 개선군이라도 맞는 듯 행동할 일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꽃바구니를 든 채 거리로 나와 있었다.

    아직 왕성 안에 있는데도 그들이 내는 소음이 들렸다.

    기대라면 많이 받았다. 조프리가 된 이후 안 그런 날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몸이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사신단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머리를 넘기고 옷을 갖춰 입은 그는 강인하고 냉정한 왕자 같았다. 그레이가 조언했을까? 지금 에드워드가 남에게 보여 줘야 할 그런 모습이었다.

    그가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진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남들이 듣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긴장돼?”

    아니라고 대답하면 멋있겠지. 당연히 긴장됐다.

    떨면서 당당한 척하는 것도 웃길 것 같다.

    “응.”

    “그만둬도 돼.”

    난 몸을 뒤로 빼고 그를 쳐다봤다.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다. 긴장이 한순간 날아갔다.

    “혹시 미쳤어?”

    “설득에 실패해도 네 탓 아니야. 애초에 이 갈등부터가 네가 책임질 일 아니잖아. 네가 가지 않는대도 누가 뭐라겠어.”

    “저 밖의 사람들이?”

    “괜찮아.”

    난 안 괜찮은데 왜 네가 괜찮아?

    에드워드가 손을 내밀었다. 빈 공간이 있으면 채우는 게 사람 본능이라, 난 무심코 잡았다.

    에드워드는 멈칫했다.

    놓아야 할까? 나도 당황하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내 책임이니까.”

    무슨 소린가 했다.

    “아……. 사람들이 갑자기 다 이건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네 욕을 할 거다?”

    “그건 아닌데. 원하면 그렇게 만들어 줄게.”

    “이게 위로야?”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위로법이 통했다. 손 떨림이 멎었다.

    “괜찮아졌네.”

    에드워드도 내 손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나보다 내 상태를 먼저 알아챘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내 손을 놓았다.

    “가.”

    그리고 그는 남들에게 들릴 목소리로 나를 축복했다.

    “존경하는 내 형제, 네 여정에 행운이 함께하길.”

    끝이었다. 난 마차에 올랐다. 마차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트와 알렉스도 내 뒤를 따랐다. 난 계단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봤다.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난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이게 좋은 생각일까?

    난 계단에서 내려와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에드워드에게 다가가자 그는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쳐다봤다.

    저렇게 잘 꾸며 놨는데도 애가 눈 밑은 검었다.

    남한테 수면제 챙겨 주지 말고 네 잠이나 어떻게 해 봐.

    왜 난 이런 게 보일까?

    “에드워드. 편지해.”

    난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난 셔벗에서 전쟁을 막을게. 넌 이 나라에서 혼란을 막아. 날 돕겠다고 했잖아. 셔벗은 위험하다며? 이 나라가 망하지 않아야 날 도우러 오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에드워드의 표정이 이상했다. 나도 내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제대로 된 목표를 심어 주고 있는 걸까?

    “편식하지 말고, 호위 기사도 고용해. 네 건강 이제 네가 챙겨야지. 네 옆에 그레이도 없잖아.”

    내가 뭐라는 걸까?

    그때 에드워드가 나를 끌어안았다.

    “편지할게.”

    낮은 목소리가 귀에 속삭이고…….

    에드워드는 떨어졌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인형에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어떤 경이로운 감정에 휩싸여서, 난 마차로 돌아갔다.

    무슨 대화를 하셨냐고 도트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귀가 화끈거리는데…….

    ‘네가 허락했어.’

    에드워드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이상하게 간지러워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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