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28화 (228/293)
  • 228.

    그레이에게 붙잡혀 삼십 분쯤 잔소리를 듣고, 난 삼십 시간쯤 생각했다.

    사실 그만한 여유 시간은 없었는데, 틈틈이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요는 책임의 문제였다.

    난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누군가의 전부이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신기할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사신단 인선은 문무 양쪽으로 훌륭했으나, 단점을 꼽자면 셔벗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나 빼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듯해서 내가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 * *

    “로웰. 바빠?”

    로웰은 상단에 있었다. 상단 앞은 십여 개의 마차로 북적였다. 그는 상행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과 서류를 두고 대화하던 중이었다.

    “아, 전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시간 내줄 수 있어?”

    “아, 물론이죠…….”

    그러더니 로웰은 미소를 지우고 상행 책임자를 돌아봤다. 난 말을 고쳤다.

    “아니. 바빠도 시간 내. 명령이야.”

    “예, 전하.”

    로웰이 한숨을 삼켰다.

    그는 상단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몇 명이 재빨리 방을 준비하고 차를 내왔다.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신단에 합류할 인선은 한 명 빼고 전부 정해졌어.”

    “예……. 결국 가시는군요.”

    로웰이 목덜미를 만졌다. 단추를 두어 개 푼 상의와 미소를 지운 표정 때문에 그는 평소와는 인상이 달랐다. 날카로운 상인처럼 보였다.

    “내가 무슨 말 하러 왔는지 알지?”

    “예…….”

    “내가 싫어? 같이 셔벗까지 가긴 싫어졌어?”

    난 대놓고 물었다. 로웰이 거절한다면 굳이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서 거절하는 거라면,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

    로웰은 어이없는 듯했다.

    “와, 전하. 그렇게 물어보시면 제가 어떻게 그렇다고 말씀드려요?”

    그렇긴 그랬다.

    왕자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내 주변에 그 소수가 다 모여 있는 거 같긴 한데.

    “아니지?”

    난 그냥 웃으며 말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로웰이 거절 못 하는 이유는 내가 왕자여서가 아닐 것이다.

    “네가 필요해.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로웰 외의 다른 사람을 믿긴 힘들 것 같다.

    셔벗 왕이 진짜 꿍꿍이속을 품고 있는지, 셔벗 사신은 나를 왜 그렇게 노려보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더 수상한 사람을 일행에 끼워 넣고 싶진 않다.

    난 달래듯이 말했다.

    “셔벗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입국 금지 같은 게 걸려 있는 게 아니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뭐 제가 중범죄자라고 그런 게 걸려 있겠어요. 그게 아니라……. 아…….”

    로웰이 내 눈을 피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뭐. 쳐다보지 말라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렇게 신뢰 가득한 눈으로 보시면 제가 좀 곤란해서요.”

    뭐 어쩌라는 거지?

    그가 바라는 대로 미심쩍게 쳐다봐 줬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더니 결국 웃었다.

    뭘까?

    내가 따라서 웃자, 그는 한참 뺨을 문지르더니 내 눈을 들여다봤다. 문지른 뺨이 발그레했다.

    “예, 전하. 사신단에서 전하를 모실게요. 저라도 필요하시다면, 기꺼이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제게 너무 실망하진 마세요.”

    “연애 문제야?”

    로웰과 얽힌 문제라면 그 외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가 쩔쩔맸다.

    “그게, 비슷하긴 한데요.”

    연애 문제네. 난 또 뭐라고.

    난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그거라면 더 실망할 구석도 없는데 뭘.”

    “예? 아니, 그것도 좀…….”

    * * *

    난 말을 재촉해 외성으로 나갔다. 굳이 신분을 밝힐 필요는 없어서 가벼운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덕에 크게 덥지는 않았다. 간혹 ‘이 날씨에 로브를’이라는 눈빛을 던지는 사람들을 지나쳐서 한참을 달렸다.

    귀족군이 주둔한 평지가 나타났다.

    평지는 평소처럼 눈이 탁 트이는 느낌이 아니었다. 잠자리로 사용하는 천막들이 펼쳐져 있어 전체적으로 너저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이는 병사들은…….

    “수가 많네.”

    “이미 보고받아 보셨잖습니까?”

    바움쿠헨 백작이 대꾸했다.

    “응. 숫자는 보고받았는데,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예. 저들 모두가 누군가의 자식이고 형제겠지요.”

    부담 가지라는 건가?

    “전하께서 저들을 살리셨군요.”

    돌아보니 백작은 웃고 있었다.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담이 사라지지도 않아서, 속이 이상했다. 내가 저 사람들 목숨을 살리러 가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저 병사들은 나와 셔벗까지 가서 동고동락할 것이다. 내가 귀족군을 빼앗은 이유는 위험인자를 비스코티 밖으로 빼돌리기 위해서다.

    반역자의 군대가 뭐가 예쁘다고 원래 있던 영지로 돌려보낼까.

    병사들이 반역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귀족들은 신중을 기해, 자신들의 계획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사병을 이끌고 달려오던 기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랬다.

    병사들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백작, 내가 잘 모르는데 군사 주둔지가 원래 이런 느낌인가?”

    “어떤 모습을 상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뭐 후방이 다 이런 느낌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천막 사이로 빨랫줄이 걸려 있고, 돌아다니는 병사들 중 갑옷을 입은 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캠핑장 같은데.

    원래 후방 기강은 이 정도인 모양이다.

    “그렇군. 싸움 내기도 흔한 모양이야. 하지만 저러다 진짜 싸움 날 것 같은데.”

    “예? 군영 한가운데서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돈 내기를 합니까?”

    바움쿠헨 백작이 내가 보는 곳을 봤다. 돈을 걸고 싸움판을 벌이던 병사 두 명이 서로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지휘관은 무얼 하는가!”

    백작은 머리끝까지 분노해서 달려 나갔다. 그가 탄 말이 두 사람을 날려 버렸다.

    후방은 원래 이렇다며?

    저래도 되나?

    그럴 리 없었다.

    “웬 놈이냐!”

    창을 든 기사가 천막에서 달려 나왔다. 저 사람이 지휘관인 모양이다. 기사는 대단한 근육질이었고, 자기 키보다 큰 창을 한 손으로 다루고 있었다.

    반면 바움쿠헨 백작은 맨손이었다.

    “안 도와도 돼?”

    “누구를 말씀입니까?”

    알렉스가 되물었다.

    그러게 말이었다. 내가 눈을 뗀 잠깐 사이 사태는 진압되어 있었다.

    “습격이다! 습격이야! 왕성 앞에서 기사를 습격하고도 네놈이 살 것 같으냐?”

    기사가 바닥에 눌린 채 몸을 뒤틀었다. 백작이 그를 짓밟고 있었다.

    난 병사들이 달려들까 경계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고, 대신 다른 천막에서 기사 몇 명이 튀어나왔다.

    “웬 놈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들은 알렉스에게 한 대씩 맞고 조용해졌다. 기절한 사람은 조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병사들이 우리에게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마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첫인상 끝장난 것 같은데.

    저 사람들 데리고 셔벗 갈 수 있나?

    귀족들이 동원한 사병은 수가 많았다. 각자 모은 병사가 많지 않더라도 여러 영지에서 모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 이 위험 인자들을 셔벗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지만, 전부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가 많으면 셔벗 입장에선 위협으로 느껴질 것이다.

    반만 데려가자.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 사병들을 보아하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응. 빚이 얼마라고?”

    “삼천 만 골드입니다, 전하.”

    “혹시 어디 섬이라도 샀어?”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빚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 빚쟁이인 게 아닐까?

    노예 수가 늘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통계도 안 잡히는 채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은행에 돈을 빌린 게 아니니 나라에 기록이 없다. 뭐 이런…….

    이들은 빚 때문에 백작이 명령하는 대로 사병으로 차출된 모양이었다. 본래 직업은 농민이고, 당연히 군사 훈련 따위 받은 적 없다.

    이들은 영지로 돌아가도 또다시 채무자 생활을 할 뿐이다.

    기강이 해이한 이유는 당연히 해서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몰랐기 때문이고, 애초에 지휘관이라고 붙은 기사들부터 군사 지휘 경험이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핏줄이기만 하면 기사 작위는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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