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27화 (227/293)
  • 227.

    그렇다고 정한 일을 그만둘 순 없었다. 난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나를 올려다봤다.

    “전하…….”

    “그래, 백작. 이렇게 환대해 주니 기쁘군. 내가 가져온 소식이 그대들 마음에 들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전하께서 와 주셨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음, 그래……. 내가 오는 게 좋은 일인가?”

    내가 처형일을 통보하러 왔으면 어쩌려는 걸까?

    그런데 오렌지 백작이 단언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에드워드 전하라면 저희를 즉시 형장으로 끌어내지 않으셨겠습니까?”

    에드워드의 이미지가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아닌가?”

    “저희의 처형을 막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군. 내가 그대들을 어여뻐하여 처형을 막았을 것이다?”

    “물론 아닙니다, 전하. 저희가 전하를 마음 깊이 섬기고 흠모하고 있음은 물론이나, 전하께서 그러한 이유로 약한 마음을 가졌다 생각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외부의 위협에 우리가 단결해야 한다고 결심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백작은 달변이었다. 난 그렇게 거국적인 판단을 한 적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백작은 간절하게 말하다가 내 뒤를 보고 펄쩍 뛰었다.

    “파이 공작! 이 교활한 늙은이가!”

    “전하 앞에서 예를 차리게.”

    파이 공작은 점잖게 말했으나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그가 욕을 먹든 말든 관심은 없었다.

    “그래. 내 기분이 상해 그대들을 벌하면 어찌하겠나?”

    “저, 전하…….”

    “물론 난 피를 보고 싶지 않지만, 고민이 된단 말이야. 그대들을 살려 둔다고 앞으로 생길 문제를 막을 수 있을까?”

    난 고민을 털어놓았다. 오렌지 백작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응. 그대들의 가문이 지금은 숨죽이고 있지만, 왕실에 막대한 배상금과 병사들을 바치게 되면 불만이 생기지 않겠어?”

    “예? 제 가문이 배상금과 병사를? 왕실에?”

    “물론 그대는 기꺼이 바치겠지만, 가문 구성원들의 의사를 알기 힘들잖아.”

    백작이야 바치고 싶을 것이다. 자기 목이 걸렸으니까.

    난 수도에 모인 사병을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위험한 짓을 할 리 없다.

    하지만 백작이 가문의 모든 재산을 바치고 살고 싶어 한다 해도, 그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또 다른 얘기다.

    백작은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제 아들이 설마 저를 버린다는? 하하, 전하. 무슨 그런…….”

    효심 지극한 아들인가?

    불안해졌는데, 순간 백작의 눈이 커졌다.

    늙고 병든 아버지를 가두고 영주 행세를 하는 자식이 드물지도 않다. 생각대로 백작의 후계자가 특별히 효자는 아닌 모양이다.

    파이 공작이 지원 사격 했다.

    “오렌지 백작은 강한 주인이지만, 이곳에 갇힌 채로는 영향력을 잃고 말겠지요. 다음 대 주인과 협상을 준비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그런가? 난 백작이 계속 오렌지 영토의 주인이길 바라지만 말이야. 백작의 후계자가 부른다고 바로 올지도 모르겠고…….”

    오렌지 백작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나와 파이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가 말했다.

    “저, 전하. 제가 아들에게 서신을 쓰겠습니다.”

    “오, 그래 주겠나?”

    “물론입니다, 전하. 제 아들들은 충성스럽기 짝이 없어, 전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하지만 역시 아버지인 제가 부르면 걸음을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걱정을 덜었군.”

    “전하의 시름을 덜어 드릴 수 있다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좋아. 오렌지 가문의 후계자를 인질로 잡았다.

    영지의 힘이 강하기로는 오렌지 백작이 제일이었다. 다른 죄인들은 오래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 대화를 숨죽여 엿듣는가 싶더니 이내 가족에게 편지 쓰기에 동참하기로 했다.

    이 감옥, 독방이 의미가 있나? 소음 대책도 안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죄인들은 하나같이 공작을 노려봤다. 그가 낸 계략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근데 계책 시행자는 나였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에드워드는 숨만 쉬어도 위협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나는 딱 봐도 맹탕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파이 공작이 원한을 사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었기 때문에, 난 변명해 주지 않고 나왔다.

    왕성은 곧 귀족 후계자들로 북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에드워드를 지킬 인질이 되겠지.

    문제는 에드워드 그 자체였다…….

    탑을 벗어나자 햇살이 내리쬐었다. 하늘이 파랗게 맑았다. 난 파이 공작을 돌아봤다.

    “스승님. 스승님껜 따님이 있죠.”

    “예, 전하. 왕성에 머물게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공작은 내게 말했다.

    “전하께서 비정한 책략을 내실 수 있는 분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성품이 너무도 온화함을 걱정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공작의 원한은 산 것 같다.

    “좋은 스승님을 둬서요.”

    대강 대답했는데도 공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전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목숨이 아까워서요?”

    “그렇겠지요.”

    “…….”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전하께서 약속을 지킬 것을 믿기 때문이겠지요. 에드워드 전하가 이곳으로 올라왔다면, 그들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가 마음을 바꿔 살려 줄 수도 있잖아요.”

    난 괜히 삐딱해졌다.

    공작이 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봤다.

    “그분은 귀족들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귀족들이 왕비님을 이곳으로 불렀고 그래서 모든 불행이 시작됐다. 에드워드는 귀족들을 싫어한다. 귀족들은 그 사실을 저번 공개 처형 때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왕이 측근으로 아끼던 이들을 모욕하고 목을 잘랐다. 왕의 궁을 폐궁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는 효심 깊은 아들의 행태는 분명 아니며, 귀족들을 존중하는 왕자의 행동도 아니다.

    “전하께선 훌륭한 군주가 되실 겁니다.”

    파이 공작이 말했다.

    “예……. 스승님은 다시 갇혀 계시는 게 좋겠네요.”

    이 성에 에드워드의 편은 없다.

    사실 조프리 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원래 사람은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았다.

    난 아직도 충성이라는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온전히 믿고 자신을 맡길 수 있을까?

    그러나 에드워드는 이곳에 남아서 왕국을 통치해야 할 입장이다.

    난 막연히, 그가 당연히 왕이 되길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권력욕이 있는지 어떤지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는 왕이 될 왕자였다. 내가 아는 그의 정체성은 그랬다.

    표정 없는 에드워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야심은커녕 아무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라고 소중히 여길까?

    * * *

    그레이는 다저녁때 찾아와서 말했다.

    “아시겠지만, 저도 사신단에 합류해요.”

    “왜?”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그레이가 사신단에 필요하다고 요청한 기억도 없다.

    “왜냐고요? 에드워드 전하께 못 들으셨어요? 직접 명받았는데요.”

    그레이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 앞에 앉았다.

    “제가 필요하실 텐데요. 상징성도 있고요. 전 조프리 전하의 뛰어난 계략 덕분에 ‘전하 시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있잖아요. 변심한 귀족파 수장 세력으로.”

    “그래서?”

    사과라도 받고 싶은 걸까? 크래커 공작 가문의 드높은 명성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제가 전하를 따라 사신단에 참여하면, 두 세력의 화합이 되는 셈이니까요. 정확히는, 귀족들이 전하께 굴복한 모양이 되겠죠.”

    “이미 충분히 굴복한 거 아니었어?”

    난 기자들의 수배령을 풀어 주었다. 왕자를 뒷배로 둔 기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자 더 과감해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 왕자 시해를 계획했다는 귀족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게 정보를 고했다고 알려진 크래커 소공작과 파이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초에 어떻게 하였기에 그런 불충한 무리들과 엮이게 되었겠냐는 것이다.

    온 성의 궁인들이 기사 제목을 떠들고 다녔다. 기자들은 확실히 여론을 선도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신문 매출량도 크게 늘어난 모양이었다. 일단 양지에서 신문을 읽을 수 있다는 이점이 컸다.

    잘은 모르겠지만, 기숙사장은 기뻐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다 사족이에요. 중요한 건 제가 동참하면 전하께서 더 안전하실 거라는 거죠.”

    에드워드가 나를 지지하고 귀족파가 동행하는 모양새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키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네가 가면 에드워드는?”

    “전하가 왜요?”

    그레이는 이해 못 하는 듯했다.

    “에드워드 혼자 궁에 남잖아.”

    한숨이 나왔다.

    걘 강한 애가 아닌데, 이미지 때문에 손해 보는 경향이 있다…….

    “지금 에드워드 전하를 걱정하세요? 전하 자신을 걱정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그래, 고마워. 넌 걱정도 곱게 안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더라.”

    되는대로 대답하자 그레이의 이마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결국 화나게 한 것 같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