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26화 (226/293)

226.

모리스 상송은 첫인상과 달리 흠잡을 데 없는 사신이었다.

“조프리 전하의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필리프 폐하께서도 쾌차를 축하하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또다시 나를 뚫어져라 봤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역시 파벨에게 무슨 말 들은 것 같다.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대화에 흥미조차 없는 듯했다.

내가 나서도 되나 싶었지만, 나 아니면 아무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군. 필리프 폐하의 배려에 비스코티를 대신해 감사를 전하네.”

“무슨 말씀을요. 전하의 건강이 비스코티만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다. 금색 속눈썹 아래서 파란 눈동자가 빤히 상송을 쳐다봤다.

대화 내용이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 필리프 폐하께서도 양국의 평화를 원하시니 내 마음도 기쁘네.”

“예. 폐하께서는 교양 있고 명예를 아는 분입니다.”

상송은 진지하게 말했다.

자랑인가?

“그러나 폐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비스코티에서 사절조차 보내지 않는 것은 어떠한 연유입니까? 폐하께서는 마땅히 분노할 일로 군대를 일으키셨으나, 비스코티가 겪은 불운한 일로 인해 군사 행동을 멈추셨습니다. 또한 조프리 전하를 기다리며 비스코티의 침묵을 인내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비스코티가 혹여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협박이었던 것 같다.

대전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야 셔벗 사신이 듣기 좋은 말 하려고 이곳까지 찾아왔을 리 없다.

“나라의 큰일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네. 나는 필리프 폐하께서 이를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어.”

“물론입니다, 전하. 필리프 폐하께서는 전하의 마음을 알고 계시지만, 셔벗의 귀족들은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이들. 폐하께서는 그들의 분노 역시 이해하고 계십니다. 이 먼 타국에서 홀로 돌아가신 공주님의 비통함은 어찌할 것입니까? 폐하께서는 비스코티가 태도를 분명히 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상송이 말했다.

‘그렇군. 폐하께서는 괴로워하실 필요 없네. 비스코티에도 같은 아픔을 가진 자가 있어 폐하를 뵈러 갈 테니.’

난 그렇게 답하려고 했다.

그런데 방관하던 에드워드가 먼저 말했다.

“셔벗에서는 군주가 결정한 일을 그 신하들이 반대한단 말인가? 그 말은 이상하군.”

“그런 뜻으로 올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셔벗의 신하들은 더없는 충성을 왕실에 바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분노를 금하지 못한다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런가? 비스코티는 셔벗의 동맹국이며, 왕비 전하께도 예를 다했네. 다시없을 규모의 장례였지. 셔벗에서 이를 모르리라 생각지 않아. 그러나 셔벗에서는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을 찾듯 비스코티를 재촉하고 있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실례지만 조프리 전하께서는 공주님의 혈육이십니다.”

“그러니 조프리가 셔벗 사람이다?”

“그렇게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만…….”

에드워드와 상송이 서로를 쳐다봤다.

분위기가 영…….

“에드워드.”

“응.”

내가 부르자,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가 상송을 향해 단조롭게 말했다.

“셔벗에서 조프리를 자국의 왕족처럼 대우하겠다니 기쁘군. 적어도 셔벗 국경 안에서 위험해질 일은 없을 테지. 그러나 국경에 도적이 많아 내 형제의 안전이 걱정이야. 양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불행한 일은 없어야겠지.”

사신단을 꾸리는 데 시간이 필요하단 소리다.

그런데 상송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전하의 안전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리프 폐하의 정예군이 국경에서부터 전하를 보호할 것입니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귀족들의 표정이 밝았다. 셔벗의 호의라고 느끼는 듯했다.

좋은 건가?

그러나 에드워드의 표정은 그 반대였다.

그는 말없이 상송을 노려봤다.

* * *

에드워드는 복도에 나오자마자 말했다.

“셔벗 상황이 예상보다 더 나쁠지 몰라.”

“무슨 뜻이야?”

“들었잖아. 셔벗 왕이 네 호위를 명령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내부 상황이 악화되었는지도 몰라. 셔벗의 귀족들이 제 나라 왕과 뜻을 달리한다고? 가벼운 말이라도 사신의 입에서 나올 게 아니지.”

에드워드는 멈춰 섰다. 나와 같은 얘기를 들었던 게 맞나?

내가 특별히 멍청한 건 아니길 바랐다. 귀족들도 못 알아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갈 거야?”

“가야지.”

처음부터 위험한 거 아니었나?

셔벗에 가기만 하면 볼모로 잡힐 것처럼 이야기되던 게 얼마 전이었다. 새삼스레 위험하다고 해도 얼마나 위험한지 감도 안 잡혔다.

볼모로 잡히는 것보단 셔벗 왕의 보호를 받는 게 안전하겠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에드워드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말했다. 그의 검은 옷에 시선이 갔다.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도 조의를 뜻하기 위해 어두운 차림을 하고 나왔다. 셔벗의 사신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어두운 옷을 입고 나온 건 내게 특별한 느낌을 줬다.

“내가 빌어도?”

멍하니 그의 옷을 보다가 귀가 뜨였다.

당황해서 쳐다보자, 그는 벽에 몸을 기댔다.

내내 에드워드는 기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는데, 난 그 태도가 뭘 뜻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자포자기한 듯했다.

“넌 알잖아. 여기 내 자리가 없다는 거.”

나도 모르게 달래듯 말했다. 내가 셔벗에 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만들어 주는 자리는 필요 없고?”

“이미 남이 만들어 준 자리는 가져 봤어.”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이미 이곳에 자리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엾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뿐이지. 쓸데없이 책임감만 훌륭하잖아.”

“내가 책임감이 있다고?”

내가 얼마나 책임을 피해 도망 다녔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 헛웃음이 나와서 웃고 있는데 에드워드는 내 손을 빼앗아 갔다.

“그래. 넌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걸 책임지고 싶어 하고 너 자신에게 엄격하잖아. 그걸 내가 이용했지. 널 원망하고 싶어서.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웃음이 멈췄다. 그는 로제 부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넌 원망할 나도 필요 없는 거지. 기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야.”

그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았다. 화인을 찍듯 천천히 닿았다 떨어졌다.

“그런 널 존경해.”

손이 떨렸다. 에드워드는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그게 전부였다. 난 어째서인지 겁에 질렸다.

“에드워드, 네 호위 기사는 어디 있어?”

“호위?”

“왕성 안이라도 위험하잖아. 넌 왕위에 오를 왕자인데. 왜 혼자야?”

그게 전부터 이상했다.

에드워드는 오히려 내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 반응했다.

“호위를 둬야 해?”

“당연하지. 안전을 위해서…….”

“안전?”

그는 낯선 것처럼 단어를 발음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그러더니 그는 사신단 구성은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물었다. 그가 말을 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처음부터 사신단 얘기를 하고 있었을 텐데.

바움쿠헨 백작이 함께할 거라고 말하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네.”

“에드워드, 왕이 될 거지?”

난 문득 물었다.

에드워드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그게 중요해?”

우리는 같은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중요하지도 않은 걸 왜 물어보겠어?’ 그런 쪽지를 보낸 적 있다.

“어머니를 지키겠다고 왕성에 들어왔어.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했지. 그 다음엔 너를 지키는 게 내가 살아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고……. 이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드워드는 다시 벽에 기댔다. 그는 실 끊어진 인형 같았다.

* * *

“이곳입니다, 전하.”

파이 공작이 앞장섰다. 그 뒤를 그레이와 내가 따랐다. 호위로 붙은 알렉스가 후미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탑을 올라갔다.

귀족을 가두는 탑은 왜 이렇게 높은지 알 수 없었다. 대우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교도관은 반역자들이 각자 독방을 받았다고 알려 줬다.

“그래? 한방에 가둬 뒀어도 괜찮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바꾸겠습니다, 전하.”

“그럴 필요까진 없고.”

교도관과 공포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계단을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독방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을 오렌지 백작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전하! 전하!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조프리 전하께서 오셨다! 전하!”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르는 건가?

“교도소장. 혹시 죄인들을 극진히 대했나?”

“그럴 리가요! 감히 전하께 해를 끼친 죄인들을 대우할 리 있겠습니까?”

교도소장은 극구 부인했다.

겁에 질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보면 반역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겁먹어 있어야 일이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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