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이델라는 몹시 우울해서 그를 상대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아하니 그는 놔두면 사고를 칠 사람이었다.
“전하를 의심하라는 건가요? 그분은 신의 있는 분이세요.”
“남자를 모르는군요! 순진하기도 해라. 이델라 양 같은 어린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애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하이신걸요.”
이델라가 순진하게 항의하자 약혼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분이야말로 믿을 수 없는 분입니다! 신문을 안 읽는군요? 하기야 이델라 양 같은 아가씨가 읽을 만한 물건도 아니긴 합니다만…….”
이델라는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이 사람은 말끝마다 ‘아가씨’를 붙이지 않으면 말이 안 나오나?
“전하께서 왜요? 신문에 무슨 기사가 실렸나요?”
“과거 행적을 보면 미래를 알 만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훌륭한 왕자이시긴 하지만, 이델라 양처럼 어린 아가씨들에게는 치명적인 분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예전 기사를 찾아보다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와 같이 영리한 사람들이라면 눈치챘겠죠…….”
서론이 길었다.
“와, 정말 대단하세요. 그게 뭔가요?”
“고급 정보지만, 이델라 양이 물어보니 설명을 안 드릴 수가 없군요. 제가 추측하기에 그분이 숨겨 둔 애인만 열둘은 넘을 것 같습니다. 이것만 봐도 전하께서 신의라고는 모르는, 부럽기 짝이 없는……. 아니,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세상에.”
이델라가 입을 가렸다.
약혼자는 그 모습이 작은 동물처럼 귀엽고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빚 대신 그녀를 아내로 들이겠다는 손해 보는 약속을 할 리 없었다.
겁을 좀 주면 이델라는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녀를 왕자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약혼자는 강한 소유욕을 느꼈다.
이게 사랑이 아닐 리 없었다. 왕자와 대적해 여자를 뺏겠다고 결심할 정도라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전하와 다른 남자입니다. 이델라 양이 일전의 무례를 사과한다면, 관대하게 다시 받아 줄 마음이 있습니다.”
겁을 주었으니 달랠 차례다. 약혼자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델라의 시선이 이상했다. 그의 뒤를 보는 듯했다.
그는 등골이 오싹했다. 뒤를 돌아보자, 날카롭게 생긴 귀족이 기사를 대동하고 서 있었다. 귀족이 대뜸 말했다.
“왕성 앞에서 전하를 모욕하다니. 틀림없이 반역자와 한패로군.”
“와, 역시 그렇군요.”
이델라는 슬픈 듯 말했다.
약혼자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
“이상하다 했어요. 전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 한때 약혼자였던 분이라 마음이 안 좋네요. 혐의를 부인하지 못하면 일주일 뒤 공개 처형이겠죠…….”
“예?”
약혼자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그게, 저기,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전하께서 파렴치한에 신의 없는 분이라는 게 그런 뜻이 아니었나요?”
이델라가 놀랐다.
제발, 입 좀!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이델라의 입단속보다 일의 수습이 먼저였다. 약혼자는 귀족을 돌아보며 비굴하게 웃었다.
“저기, 혐의를 부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제 생각에, 진심을 증명하기에 전 재산을 바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이델라가 말했다.
약혼자는 그녀를 다시 봤다.
순진한 게 맞나?
골칫거리를 퇴치한 이델라는 다시 우울감에 젖어 들었다.
수도에서 재회한 체레니아가 몹시 기대하며 이델라의 연애사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침울해졌다.
왕자님과 그녀의 소문을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그녀는 얼마나 무능한 사람인가. 게다가 문제는 얼마나 끌고 오는가.
“저 사람, 제 고향에선 대단한 부자였어요. 어차피 이자놀이로 얻은 돈이니까요. 이번 사신단에 쓰이면 돈도 만족할 거예요.”
이델라가 유능하게 말했다.
그레이는 ‘약혼자가 있었어요?’ 같은 초보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왕자의 측근이 게으름 피우는 꼴을 기분 나빠 하기로 했다.
“왜 그 돈을 제게 맡깁니까?”
“소공작께서 사신단에 합류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번거로운 일을 남에게 맡기는 버릇 들이지 마세요. 예산이야말로 믿을 만한 측근이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전하께는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부족하니까요.”
알렉스 바움쿠헨이나 로웰 몽블랑은 할 수 있는 일이 특화되어 있다.
예산 관리라면 로웰에게 맡겨도 되겠지만, 셔벗에 도착하면 그자는 서류 작업보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요령 피우지 말고 전하께도 말씀드리세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혼자 업무를 떠맡다가 당신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전하께서 행복해하시겠군요.”
그레이가 실컷 빈정거렸으나 이델라에게선 예상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기뻐하는 것 같지? 그레이는 기분이 나빠졌다.
* * *
에드워드는 사신을 상대하기 위해 귀족들을 대전으로 불러 모았다. 이번에는 내게도 연락이 왔다.
옷을 차려입고 준비하는데 바움쿠헨 백작이 궁으로 찾아왔다.
백작은 외성 밖에 군을 주둔한 채 기사단만을 끌고 왕성에 들어왔다는 듯했다. 바움쿠헨 군이 질서 정연하게 위용을 갖추고 있어서, 성 밖에 군대가 모여 있는데도 분위기가 험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이 나라에서 잘 훈련된 기병 집단을 가지고 있는 귀족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백작은 그중 하나였다.
“전하, 크게 한 건 하셨더군요.”
“백작이 할 말인가? 대단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데.”
“예……. 언제 알아차리셨습니까?”
“그 점이 중요한가?”
“무릎을 꿇을까요?”
백작이 물었다. 또 흰소린가 했는데 백작은 정말로 바닥에 무릎을 댔다.
“명령 없이 행동한 벌을 청합니다, 전하.”
“무엄한 소리 말고 일어나게.”
그러자 백작은 정말 일어났다. 뭐 하자는 걸까?
그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전 전하께서 귀족들을 상대하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들을 솎아내어 붙잡는 것은 물론, 처분할 명분을 세우고 망설이던 귀족들까지 마음을 정하게 만드셨더군요.”
“내가 좀 훌륭하지.”
듣기 좋은 말이라면 넘치도록 들었다. 백작까지 내 얼굴에 금칠할 필요는 없었다.
“떠올려 보면 전하께선 마음 여린 분이었으나, 그로 인해 오판을 저지른 적은 없으셨습니다. 어리석은 놈은 저였죠.”
“백작, 어디 아픈가?”
에드워드에게 협력했다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있었던 것도 같은데 저렇게 나오니 생각이 싹 사라졌다.
“전하께선 정말 아랫사람이 충성 맹세할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질 않는군요…….”
백작은 내가 잘못했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나오는 말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맹세?”
“바움쿠헨의 기사 폴먼은 저 자신과 가문을 걸고 전하께 충성하겠습니다. 저의 검은 전하를 위한 것이고, 저의 명예는 전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존재할 것입니다.”
그는 몸을 낮추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백작은 진심이었다.
무엄한 발언이라기에 백작의 원래 주인은 이미 죽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를 거야.”
“무슨 상관이랍니까? 제가 오래도록 왕을 모셔 봤는데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니더군요.”
재미로 충성하나?
“어떤 일은 마음보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전 전하께 충성을 바쳐 왔지만 제 입으로 맹세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감히 전하의 의중을 묻지도 않고 움직일 건방이 나왔던 거겠죠.”
“백작. 이미 알겠지만 난 셔벗에 갈 거야.”
“예. 이 대륙에 평화를 가져오시겠군요.”
이쯤 되면 웃기려는 건지 진짜 아부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웃어 버렸다. 백작이 씩 웃었다.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
“명령이시겠죠.”
“그래. 명령이야. 사신단에 합류해 나를 보호해.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물론입니다, 전하.”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궁을 나서자 바움쿠헨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자 그들은 내 뒤를 따랐다. 매끄러운 갑주가 반사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가는 길마다 궁인들과 귀족들이 멈춰서 경의를 표했다.
* * *
대전에 들어서니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왕좌는 비어 있었고 단 아래만 사람들로 가득했다.
참석한 귀족이 많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부를 수 있는 대로 긁어모은 느낌이었다. 셔벗 사신 앞에서 얕보일 수 없다는 속내가 보이는 듯했다. 내가 눈치챌 정도라면 셔벗 사신도 알 것이다.
관리의 안내에 따라 단 가까운 자리에 섰다. 바움쿠헨 백작은 안내받지 않았는데도 내 곁에 섰다.
“저, 각하…….”
“뭔가?”
백작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관리는 따지지 못하고 돌아갔다.
근처에 서 있던 파이 공작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근신 중이었는데 이 자리까지 참석하지 않을 순 없었다.
맞은편에는 그레이가 보였다. 재상을 대신해 참석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크래커 공작은 그에게 작위를 물려주려는 듯했다.
다른 귀족들은 내게 다가오고 싶어 했지만, 공작과 백작 사이를 뚫고 들어올 용기는 내지 못했다.
난 그들이 신기했다. 내 기분이 나쁘면 어쩌려고 다가오는 걸까?
셔벗에 정말 간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굳었다.
멍하니 사신이 들어오길 기다리다가 갑자기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드워드가 내 앞에 있었다.
“조프리.”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를 따라 단 위로 올라갔다. 귀족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에드워드는 나를 옆자리에 세우고 정면만 봤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관리가 사신의 입장을 알렸다.
정문이 열렸다. 모리스 상송을 앞세운 셔벗의 사신단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