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셔벗의 사신은 학자 같은 분위기의 남자였다. 학자 같은 건 분위기뿐만이 아니어서, 그는 실제로 비스코티에서도 이름 높은 문장가였다.
“모리스 상송입니다, 전하.”
난 자청해서 사신을 맞이하겠다고 나섰다.
에드워드가 말리지 않으니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난 왕성으로 들어오는 사신을 맞으러 나갔고, 사신 모리스 상송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날 아나?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날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왕자는 보통 유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왕자를 무례할 정도로 쳐다보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듣던 것보다 더 헌앙하고 훌륭한 분이시군요.”
모리스 상송은 안 그럴 것 같은 얼굴로 입에 발린 말을 잘했다.
“그대를 알아. 그대가 지은 시로 문학을 공부하기도 했는데 직접 보게 되니 신기하군.”
“전하께서 제 시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기쁩니다.”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셔벗은 예술의 나라입니다. 기후는 따스하고 어디서나 시를 낭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역시 전하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그곳의 군주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을 텐데.”
웃으며 말하자 모리스 상송은 미소도 짓지 않고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를 만날 날만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난 모리스 상송이 수상쩍어졌다. 표현이 과하다.
게다가 이름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본인이 유명인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데서 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디서였지?
좋은 기억이 아니었던 듯한…….
“파벨의 아버지잖아요, 전하! 그 사람이 사신으로 왔어요?”
로웰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생각났다. 파벨의 이름이 파벨레 상송이었다. 모리스 상송의 아들이잖아!
“파벨한테 무슨 얘기 들었나?”
좋은 얘긴 아니었을 것 같은데. 파벨은 내게 여러 차례 접근했지만 우리가 잘 지내진 않았다. 그러다가 에드워드와도 갈등이 생긴 듯했고……. 얼마 뒤에 아카데미에서 사라졌다.
설마 셔벗에 비스코티 왕자들에 대한 악명이 퍼져 있을까?
“그럴 리 없을 텐데요.”
로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말했다.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그분이……. 아니 그 사람이 파벨 말을 듣는 상황이 상상이 안 가서요. 자기 기준에 못 미치는 상대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람들 가끔 있잖아요?”
로웰이 말하는 주체는 모리스 상송이다.
그런데 기준 이하인 사람이 파벨이야?
“하지만 자기 자식이잖아.”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죠.”
로웰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분은 아니에요. 확신해요.”
모리스 상송을 잘 아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로웰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냈다고 할 정도다.
셔벗도 잘 알 것 같은데.
“셔벗에서 얼마나 살았어?”
셔벗에 가겠다고 결심한 것치고 난 그 나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글쎄요. 햇수로 따지면 사 년쯤 될 것 같은데요. 다른 나라들도 오고 가긴 했지만요.”
난 감탄했다.
“오래 지냈네. 셔벗 문화도 잘 알겠다.”
로웰이 시원스레 답했다.
“물론이죠. 셔벗이야 워낙 음식이나 예술도 훌륭하고, 연회 문화도 발달한 곳이니까요.”
“연회 자주 참석해 봤어?”
“아……. 예? 물론 그렇진 않지만요.”
그는 갑자기 발을 뺐다.
“사교계는 어때?”
“사교계라는 게 일 년만 참석 안 해도 뒤처지는 곳이어서요.”
“최신 가십을 알고 싶은 것도 아닌데. 사교계 인사를 아는 정도면 충분해.”
“글쎄요, 제가 전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외국인을 사교계 중심에 끼워 주는 곳도 아니고요.”
로웰이 미소 지었다. 화사해서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혹시 이 주제 불편해?”
“설마요.”
굉장히 불편한 것 같았다.
난 선약이 있다는 로웰을 밖으로 보내 줬다.
로웰은 잔도 비우지 않았다.
영 찜찜한 반응인데. 셔벗이 싫은가?
셔벗에 가는 게 싫은 건가?
“…….”
어? 나 자신에게 놀랐다.
애초에 난 로웰에게 셔벗에 같이 가 줄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왜 당연히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 거지?
* * *
그야 분위기가 그랬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로웰은 당연한 듯 나와 함께 도망쳤다. 그 뒤에 이어진 상황에서도 자기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도왔다.
위험한 일은 혼자 해결하지 말라고 내게 말한 적도 있다. 충심 깊은 신하처럼.
에드워드가 수상하면 그냥 외국으로 도망치자고도 했다. 그건 같이 가 준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따지고 보면 분위기에 휩쓸린 것 같기도 했다.
로웰은 성실한 데다 착한 성품이었다. 놀랍게도 한 번에 여섯 다리를 걸치는 것과 사람이 착한 건 별개의 문제인 모양이다.
어쨌든 연애 게임 공략 상대까지 될 만한 인물이니까, 문어발 연애를 하는 데도 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착해서 곤란한 사람을 두고 볼 수 없는 성격인 거지.
그게 적용돼서 나를 도왔지만, 형편 좋아진 왕자를 더 이상 모시기 싫을 수도 있다.
원래 외국 출장이란 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알렉스랑은 상황도 다르고…….
난 알렉스에게도 같이 가 줄 거냐고 물었지만, 그가 날 따라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한 적도 없었다.
도트가 화병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꽃이 장미가 아닌 걸 보니 에드워드의 선물은 아니었다.
“도트. 내가 셔벗에 가는데 안 따라올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왕자님. 설마 절 두고 가실 생각이셨어요?”
도트가 나를 휙 돌아봤다. 그러느라 화병을 깰 뻔했다.
“셔벗은 물도 음식도 다르잖아. 안 맞을지도 모르고.”
“그럴수록 제가 왕자님 곁에 있어야죠! 음식이 안 맞아 탈이라도 나시면 어떡해요?”
“외국 여행 해 봤어?”
“아니요!”
둘 다 외국 여행은 처음인 셈이다.
탈 나는 사람이 둘로 늘어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난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해 보자.”
도트가 기뻐했다.
“알렉. 원하지 않는다면 비스코티에 남아도…….”
“예?”
알렉스는 물구나무선 채 팔 굽혀 펴기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몇 분째 저러고 있었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있었는데 다른 게 궁금해졌다.
“아니…….”
“제가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전에 하신 질문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응, 그래.”
내가 무슨 질문을 했는데?
알렉스가 진지해서 물을 수 없었다.
“전하를 호위하는 중에도 무례를 무릅쓰고 훈련에 매진했지만, 셔벗에 가기 전에 제 근육을 더 키우기는 무리일 듯합니다. 능력이 부족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기사라니 부끄럽습니다.”
거기서 근육 더 키우게?
뭘 하고 싶은 걸까? 지금도 몸 두께가 내 두 배는 될 듯했다.
아무튼 알렉스가 우울해해서 난 그를 위로했다.
“내 기사가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런 기사를 받아들인 내 안목에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자기 비하 그만하고 일어나. 보기 좋은데 왜. 더 근육질이 되고 싶어?”
알렉스는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아니지만, 제 능력으로는 전하를 업고 단신으로 셔벗 왕성에서 탈출하기 힘들 듯하여…….”
“고민했다는 질문이 그거야?”
그게 고민거리야?
아두를 업고 적군 사이를 탈출한 조자룡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단련하신다면, 궁에서 대피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렉스는 부끄러워했다.
어처구니없어 말을 놓쳤나? 어쩌다 결론이 내가 단련해야 한다는 쪽으로 났는지 모르겠다.
“검술 훈련 말하는 거야?”
“원하신다면 도와 드리겠지만, 제 생각에 전하께선 지구력과 근력을 키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너 하는 거 따라 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할 수 없다.
에드워드가 겉으로는 대단한 근육질도 아닌 주제에 힘이 장사인 이유가 있었다. 기사가 받는 훈련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닙니다. 제 생각에, 전하께는 달리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 기사 수련을 막 시작했을 때 체력을 기르기 위해 받은 훈련입니다…….”
알렉스가 눈을 빛내며 설명했다.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알렉스처럼 기쁘게 회상할 장면은 아니었다.
바움쿠헨 백작도 비슷한 거 시켰는데. 그거 괴롭히는 거 아니었나?
아무튼 알렉스는 고민의 여지도 없이 동행할 듯했다.
사신단에 두 사람의 합류는 확정됐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했다. 누군가를 잊고 있는 듯한…….
이델라.
아카데미로 돌아갔나?
* * *
이델라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자만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 다른 골칫거리도 함께 가져왔다. 다행히 두 번째 골칫거리는 아버지처럼 일부터 벌이고 보지 않았다.
“자신의 애정 상대가 실은 약혼까지 했었다고 하면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습니까? 왕자 전하의 연인이라니, 지금은 세상이 당신 것 같겠지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전하의 애정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설마 전하께서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 거라느니, 두 사람이 결혼을 할 거라느니 한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약혼자는 말 많은 사람이었다.